?135화
* * *
“…….”
간밤의 꿈자리가 무척 사나웠다.
멍하니 눈을 뜨고 깜빡거리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일어났나.”
고개를 드니 침대에 기대어 앉은 클로드가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어, ……어라? 제, 제가 왜…….”
난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어제 분명 내 침대에 누웠는데?
늦게까지 공부를 하긴 했지만 메리가 수잔을 불러오는 바람에 꼼짝없이 수잔표 따듯한 우유를 마시고 누웠다. 그리고 잠들었는데…….
“기억 안 나나.”
내가 왜 지금 공작님 방에 있는 거지?
“일단 그건 좀 됐으니 옷 좀 놔주거라. 몸이 저려.”
“옷이요?”
클로드가 이불 위를 눈짓했다. 그를 따라 시선을 내리니, 클로드의 옷을 꽉 움켜쥔 내 손이 보였다.
으, 응?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왜 이러고 있는지 더더욱 모르게 됐다.
멍하니 옷을 쥔 손만 보고 있자니, 클로드가 픽 웃으며 서류를 넘기던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니 딱 한 번만 말해 주지.”
“네?”
“어제 새벽, 네가 찾아왔다.”
“새벽, ……네?”
“그것도 야간 당직을 서던 앤에게 업혀서.”
난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 누군가에게 업혔던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앤의 등이었나?
클로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날 향해 외치더군.”
훗, 하고 클로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
대체 내가 뭐라고 말했기에 저토록 기쁜 표정인지, 흐뭇해서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인지 모르겠지만 살짝 불안해졌다.
클로드가 간밤의 일을 상기하듯 꿈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 죽지 마세요.’라고.”
“……네?”
“네가 날 그토록 걱정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헥터에게 들은 모양이지? 내가 요즘 밥을 잘 먹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요즘 근육이 너무 붙어서 절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에 놀라 자다 경기를 일으키다니. 울면서 찾아와 한다는 소리가 죽지 말라니.”
클로드가 그답지 않게 엄청나게 길게 말했다. 하지만 연신 씰룩거리는 입꼬리와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 때문에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고작 끼니 좀 줄였다고 사람은 죽지 않는다, 라티아. 하지만 네 걱정은 기쁘게 받아들이마.”
클로드가 쿡쿡 웃으며 내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 줬다.
그러니까 지금 클로드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내가 자다가 경기를 일으켰고 앤에게 업혀 클로드를 찾아왔다. 그리고 클로드에게 ‘아빠 죽지 마세요’라고 말했다는…… 소린가?
……왜?
“나, 참. 이제 열한 살씩이나 되어서 밤에 자다가 ‘아빠’를 찾아오다니. 그것도 ‘아빠’가 걱정되어서 울면서 찾아오다니.”
클로드는 아침부터 상쾌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여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양 연신 중얼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내 덕에 저렇게 기뻐하니 나도 기분이 좋았겠지만, 어쩐지 오늘은 좀 이상했다.
뭘까, 이…… 찝찝함은.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간밤에 꿈자리가 사나웠기 때문일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뭔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난 지난밤에 무슨 꿈을 꿨지?
보통 꿈에서 깨면 조금이라도 꿈 내용이 생각나기 마련인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무섭고…… 두렵고…… 또 슬펐던 것 같다. 지금도 내 가슴은 놀라서 욱신거리고 있으니.
“어떠냐. 아침도 같이 먹겠느냐?”
클로드가 신이 나서 말했다.
“그렇겠지? ‘아빠’의 건강이 걱정되니 같이 먹겠지? 흠, 내 식사의 양을 일일이 체크하겠다고 하면 곤란해지는데.”
하지만 그러길 바란다는 양 클로드가 생기 가득한 붉은 눈으로 날 힐끔거렸다.
지난 1년 동안 난 클로드와 ‘명예 부녀’라는 이름으로 더욱 가깝게 묶이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공작님…… 가끔 성가셔…….
원래도 장난기 많고 짓궂은 사람이긴 했지만 내가 티아나 아메시스트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조금 더 심해졌다. 물론 좋은 쪽으로.
‘그렇군, 그렇게 된 거였어. 역시 엄청난 투자처군.’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삐로리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그 뒤로 나는 본격적으로 상업에 대해 배우게 됐다.
시엘 선생님과 함께 공부한 민상법은 이제 웬만한 변호사와 독대를 해도 대화가 통할 정도고, 지금은 가끔 클로드의 무역업 보좌를 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공작님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는데, 쓸쓸한 모양인지 어쩐지. 내가 ‘아빠’라고 부를 때마다 이렇게 들떠 하신다.
못 살겠다니까.
그렇지만 지난 1년간 난 경험치가 충분히 쌓였다. 이럴 때 휘말려 어영부영 클로드와 함께하다간 이대로 쇼핑이나 피크닉을 가서 하루 일정이 몽땅 망가져 버릴지도 모른다.
해서, 난 딱 잘라 말했다.
“아뇨. 밥은 제 방에 가서 먹을래요. 어제 앤도 많이 놀랐을 테니까요.”
그리고는 클로드가 붙잡지 못하게 깡총 뛰어 침대를 벗어났다.
“라티아, 라티아? 정말?!”
뒤에서 클로드가 애타게 불렀지만 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나는 이 하이페디움 제국의 황제 레오나르도 디카인드 에멜하르트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 * *
“정말 너무하는군. 이런 때에도 황도 접근 금지 명령을 풀지 않다니. 카르시안과 만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건만.”
검은 상복으로 갈아입은 헥터가 입을 비쭉거렸다. 마찬가지로 상복을 입은 클로드가 눈치를 줬지만 헥터는 “내가 뭐.” 하고 하나 남은 눈만 흘길 뿐이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다녀오마.”
“이 몸이 대신 카르시안한테 안부 전해 주지.”
클로드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헥터는 호위 기사의 명목으로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했다. 황제의 장례식을 향해.
오늘 오전, 황제가 붕어했다.
아침 사냥을 나갔던 이가 주검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인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고, 이에 대한 의견이 무척이나 분분했지만 지금은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황제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소식은 넓디넓은 하이페디움 제국에 순식간에 퍼졌다. 모두가 비통함을 금치 못했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 속에서 나만 홀로 멈춰 있었다.
에메르나가 끝내 황도 접근 금지 명령을 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클로드는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귀족은 없다. 라티아를 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에메르나는 오히려 돌아가신 황제 폐하의 유지를 잇는 것이 우선이라며, ‘한 번 내려진 황명을 거역할 셈이냐’고 밀어붙였다.
결국 클로드는 황비파 세력에 밀려 버렸다.
레오나르도가 세상을 뜬 후 권력은 황태자인 제네스에게로 기울었다. 그러니 제네스의 친모인 에메르나가 진정한 실세란 소리였다. 제네스는 아직 성인이 아니기에 수렴청정이 필요하므로.
난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봤다.
“아가씨, 안으로 들어가시겠어요?”
다가온 메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밖에 있고 싶어.”
“그럼 양산을 가져올게요. 벌써 가을이라곤 하나 아직 볕이 따가우니까요.”
“응. 알았어.”
메리가 곁을 떠나고 나는 현관에 홀로 남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난 딱히 장례식에 가고 싶은 게 아닌데,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1년간 열심히 억누른 반쪽짜리 귀족이란 추문이 다시 도는 게 두려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슬픈 걸까?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리다 못해, 그 속에 담아 놨던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이상해, 황제가 죽을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난 원작을 읽었으니 그가 단명할 운명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새삼스레 충격을 받을 일도 없다.
무엇보다 나와 접점도 크게 없던 사람인 걸.
4년 전에 황성 전야 파티 때 한 번, 재판장에서 한 번, 마차에서 또 한 번, 1년 전에 라움디셀의 그루안 상단에 왔을 때 한 번, 만찬장에서 또 한 번.
기껏해야 만난 횟수는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은데 왜? 왜 난 이런 슬픈 기분을 느끼는 거지?
문득 어젯밤 내가 클로드에게 말했다는 내용이 생각났다.
‘아빠 죽지 마세요.’
난 왜 무서운 꿈을 꾸고, 밤에 경기를 일으키고, 그런 말을 했던 걸까?
가만히 올려다본 초가을의 하늘은 무척이나 높고 푸르렀다. 커다란 뭉게구름은 새하얗고 깨끗해서 보기 좋았다. 날아가는 새가 평화로웠다.
이렇게 좋은 날, 레오나르도가 죽었다.
그게 이상했다.
난 메리가 양산을 들고 돌아올 거라는 것도 잊은 채 걸음을 옮겨 본관의 그랜드 홀로 향했다.
보통 연회나 파티가 이루어지는 곳이지만 지금은 각종 진귀한 보물들을 전시하는 간이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여, 이곳에 있다.
내가 레오나르도에게 받은 ‘헤바테인’이.
난 검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제 11살이 됐건만 내 손에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 ‘헤바테인’이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레오나르도처럼.
순간 머릿속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래 어린아이에겐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크게 느껴지는 법이지. 네가 지금 태산처럼 크게 보는 것도 어른이 되고 보면 작게 보일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받아라.’
이상해요, 황제 폐하. 폐하께선 분명 내가 자라면 작게 보이는 게 있을 거라 하셨는데, 이상해요.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전 헤바테인이 높고 무겁게만 보이는걸요.
나도 모르게 속으로 읊조린 말이었지만, 어쩐지 그건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이제 이 세상에 없는 레오나르도에게 무슨 말을?
모르겠다.
그저 검을 받드는 나를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웃던 그 미소를 한 번 더 보고 싶을 뿐이었다.
원작을 읽는 내내 그렇게 인상적인 등장인물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