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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34화 (134/186)

134화

내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라니.

난 가만힌 눈을 깜빡거렸다. 이윽고 대답했다.

“네, 알고 있어요.”

난 또 뭐라고.

내가 사생아라는 것쯤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건 내가 재판에서 대놓고 말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의 어머니는 레이시나가 아니고 대리모다. 귀족이 아닌 평민일 터.

아, 혹시 그래서 날 글라델리스 영애라고 부른 건가?

음……. 어쩌면 내가 아까 촌장의 아들에게 말했던 귀족모독죄 어쩌구저쩌구 이야기를 하려는 걸지도 몰라.

사생아이니 반절만 귀족이라 그 죄가 적용되지 않는다, 뭐 그런 말로.

헉, 설마 지금 내가 보르논한테 공갈 협박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고, 공갈…… 협박까진 아니지 않나?!

머릿속이 어지럽게 팽팽 돌아갔다. 무슨 생각을 해도 다 그럴싸해서 오히려 더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그런 내게, 하인리드가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응? 이게 아닌가?

나는 의아해서 하인리드의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생각도 읽히지 않아 나의 초조함은 배가 되어 갔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어쩐지 영영 알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다만 헤어지기 전, 나를 불러세운 하인리드가 어쩐지 울고 싶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신탁을 후회합니다.’

……라고.

* * *

늦은 새벽, 한 남자가 조용히 침대를 벗어났다. 걸치고 있던 흰 잠옷을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그 위에 인기척을 없애는 마법이 걸린 긴 로브를 걸쳤다. 후드까지 단단히 쓴 남자는 그야말로 어둠에 녹아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총명한 녹색 눈동자만큼은 숨겨지지 않았다.

남자가 걸어간 자리마다 물가에 아롱거리는 빛의 잔상 같은 안광이 남았단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남자의 눈은 형형했다.

살기가 아닌 즐거움과 기쁨, 행복 따위로.

늦은 밤이라 피곤할 법도 하건만 그 걸음새는 날아갈 듯 가벼웠다. 남자는 쏜살같이 제가 기거하는 곳을 빠져나와, 지난 1년간 매일 같이 향했던 곳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당도한 곳은 다름 아닌 황후궁.

새벽에 체통도 없이 달리고 있는 황제, 레오나르도의 하나뿐인 연인이자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곳이었다.

“후우…….”

지난 1년간 매일같이 달려와서 그런지 이제는 숨도 차지 않았다. 그러나 밖에서 묻어온 공기가 차가워, 소중한 이를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 잠시 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루니아. 나 왔어.”

“들어오세요.”

안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달이 휘영청 높게 뜨다 못해 한쪽으로 훌쩍 기울어진 시간인데도 여전히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레오나르도는 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매번 심장이 떨렸다. 매일 듣는 소리인데도 왜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은한 수면 등을 켠 채 침대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던 루니아가 보였다. 그녀는 새까맣게 몸을 숨긴 레오나르도를 보자마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줬다.

“오늘도 밤이 들어오는 것 같았어요.”

“미안해, 매번 이런 꼴로 찾아와야 해서.”

“그런 말 말아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약속인 거잖아요.”

루니아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레오나르도가 황급히 앞으로 다가왔다. 후드가 벗겨진 레오나르도의 아름다운 은발이 하느작하느작 흘러내렸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니아는 그런 레오나르도를 보며 쿡쿡 웃었다.

“당신은 달을 닮았죠. 그래서 전 밤이 참 좋아요. 고개를 들면 언제나 달을 볼 수 있으니까요.”

루니아가 손을 뻗자 레오나르도가 황급히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바닥에 제 뺨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오늘은 제가 달을 쥐었네요. 달이 내려와 준 덕분에.”

루니아가 농담을 건넸지만 레오나르도의 볼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죄인처럼 말이다.

기실 지난 1년간 레오나르도는 단 한 순간도 죄인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왜 비통해하시나요. 전 매일 이렇게, 달을 만날 수 있어서 기쁠 뿐인데.”

루니아의 다정한 물음에도 레오나르도는 입술을 달싹이는 게 고작이었다.

1년 전, 레오나르도는 만찬에 초대한 라티아 라움디셀에게서 풀 한 뿌리를 받았다. 처음엔 그게 무엇인지 몰랐으나 이내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라움디셀 공작령에서 대접받았던 상쾌한 향이 일품이던 차. 그 차를 마시는 동안, 그리고 그 후로 얼마간 레오나르도는 에메르나의 곁을 떠날 때면 으레 찾아오던 두통이 말끔히 씻겨 나간 것을 느꼈다.

반신반의하며 레오나르도는 직접 뿌리를 우려 마셔 봤고, 이윽고 깨달았다.

‘그 뿌리, 바람개비 꽃 뿌리가 해답이란 것을.’

에메르나가 레오나르도에게 부린 사특한 주술의 해주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날, 레오나르도는 곧장 루니아를 찾아갔다. 누군가가 제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에메르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해야 했던 자신을 참회하기 위해.

용서를 받고자 찾아간 건 아니다. 그렇게까지 철면을 깔 수는 없었다. 다만 알리고는 싶었다.

‘이제 더 이상 에메르나에게 놀아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레오나르도는 아이리스의 만류에도 루니아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보는 연인의 상태는 곧 죽어도 이상할 것 없어 보였다. 다만 그를 사로잡았던 라일락 꽃처럼 사랑스러운 보라색 눈동자는 여전히 총명했다.

그 순간 저절로 말이 나왔다.

‘라티아 라움디셀 영애가, 나에게 바람개비꽃 뿌리를 줬어.’

아, 먼저 죽여 달라고 빌었어야 했는데.

하잘것없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찧어 흘러나온 피로 지금 제가 제정신이란 걸 알려 줬어야 했는데.

후회가 막심했지만 그게 틀린 답은 아니었다.

‘라티아…… 라움디셀 영애가요?’

총명한 눈빛에 어떠한 감정도 담지 않은 채 레오나르도를 보던 루니아의 표정이 일순간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우연인지 아닌지, 루니아 또한 그 날 아론이 가져온 바람개비꽃 뿌리를 달여 마셨다고 했다. 그 뿌리는 라티아가 줬다고 한다.

그 뿌리를 달여 마신 탓일까? 늘 해가 짐과 동시에 시드는 꽃처럼 잠들어야 했던 루니아는 밤늦게까지 달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연모하고 사모하여 끝내는 그리움 속에서도 잊지 못하던 달을.

그로부터 1년 동안 레오나르도는 매일 밤 황제궁을 빠져나와 루니아를 찾았다.

처음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루니아는 고개를 돌려 창밖만 바라봤고, 레오나르도는 루니아를 찾아와 한 시간가량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떠날 뿐이었다.

그러길 3개월, 루니아가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오늘은 초승달이네요.’

루니아는 어릴 적부터 짧게 잘린 레오나르도의 머리칼을 보며 늘 초승달을 닮았다며 칭찬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레오나르도가 퍼뜩 고개를 든 순간,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레오나르도의 눈에 처음으로 눈물이 고였다. 그동안은 울 자격도 없기에 참아 왔던 그 나름의 피눈물이었다.

그가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등나무 꽃이 피어 있어.’

루니아는 등나무 꽃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녀의 미들네임도 등나무를 뜻하는 위스테리아였다. 해서, 레오나르도는 루니아에게 고백할 때 등나무 꽃을 언급했었다.

‘너를 만난 그 순간부터 내 마음엔 늘 등나무 꽃이 피어 있어.’ ……라고.

레오나르도 말의 뜻을 알아들은 루니아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가 이내 사르르 접혔다.

부부의 극적인 재회였다.

그러나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이리스와 아론이 레오나르도와 루니아의 밀회를 극구 반대했으니.

‘에메르나 황비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요!’

레오나르도는 죄인이기에 죽은 듯이 있었지만 루니아는 아니었다.

‘당할 만큼 충분히 당했다고 생각한단다.’

그러며 그녀는 바람개비꽃 뿌리를 우린 차를 마셨다. 요컨대 에메르나에게 대항할 방법을 찾았으니 그녀가 무슨 술수를 부리든 헤쳐 나갈 수 있단 뜻이었다 아론은 불안했지만 루니아는 누가 뭐래도 레오나르도 옆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하여, 두 사람의 밀회는 에메르나의 눈을 피해 아주 깊은 새벽에 조심스럽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를 용서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란 소리를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황제 폐하.’

부자 관계는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레오나르도가 죄인처럼 루니아의 손바닥에 뺨을 기댄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이유였다.

“실패했어. 아론은…… 이제 나와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아.”

사랑하는 연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인 만큼 레오나르도는 아론을 각별히 사랑했다.

에메르나의 주술이 풀린 지금, 아론이 태어났던 날의 기쁨을 고스란히 알고 있다. 동시에 아론의 첫 생일 연회 때 에메르나의 주술에 빠졌던 공포 또한.

“그래서 포기하실 건가요?”

루니아의 물음에 레오나르도는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야. 난 아론에게 아버지는 못 되겠지만 그래도…… 당신의 곁에 서도 되는 남자로 인정받고 싶으니까.”

“세상에선 그런 남자를 아버지라고 한답니다.”

레오나르도의 어리숙하면서도 결연한 다짐에 루니아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가?”

그가 어벙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바람에 루니아의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고 말이다.

레오나르도는 에메르나의 주술에 걸려 있던 지난 12년 동안 깊은 고치 속에 갇혀 있었다. 기억은 전부 있지만, 그 기억 동안 선택은 레오나르도의 몫이 아니었기에 성장을 하지 못했다.

모순적이게도 루니아는 그게 좋았다.

‘내 기억 속의, 나의 레오나르도.’

그녀가 사랑했던 레오나르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여기에 있으므로.

레오나르도를 끌어당겨 안는 루니아는 요즘 매일이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다음 날, 레오나르도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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