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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33화 (133/186)

133화

자신이 촌장 아들이라며 쩌렁쩌렁 소리치며 패악 부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우와, 촌장님 불쌍해.

하지만 아들이 저렇게 자란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예를 들면…….

“지금 이게 무슨 짓들이야!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러는 거야!”

“아, 아빠!”

“오오, 보르논!”

이렇게 말도 안 되게 과보호하는 부모님이라던가.

난 좀 심드렁해진 표정으로 세기의 신파를 찍고 있는 부자를 봤다. 보르논이라 불린 촌장의 아들은 어림잡아 180은 훌쩍 넘을 정도로 덩치가 컸는데, 아직도 부모님의 치마폭에 싸여 있는 꼴이란!

아니, 이 경우엔 바지폭인가?

내가 이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촌장은 보르논의 팔뚝을 잡은 앤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밀치려고 했다.

하지만.

“어? 지금 촌장이 치려고 한 거예요? 우와, 아트락시아 마을 촌장은 막 관광객도 치고 그러나 봐요? 그럼 자기 마을 사람들한텐 대체 어떻게 대한단 거지?”

앤은 호락호락 당하고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여유롭게 촌장의 팔을 피하며 동시에.

“으아아악!”

보르논의 팔을 뒤로 꺾어 버렸다.

“아차, 촌장님이 저를 밀치려고 하니까 피하다가 이렇게 됐잖아요.”

“그럼 놔!”

“내가 왜? 그러게 누가 사람을 치래?”

앤이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눈까지 동그랗게 뜨고서. 저 표정은 메리의 말을 빌려 ‘얄밉지만 아군일 땐 든든한 표정’이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밀쳐진 노인을 보호하고 있던 메리가 나서며 말했다.

“부전자전.”

촌장이 냅다 손부터 드니 아들도 그런 거 아니냐는 비꼼이었다. 간결한 말에 구경꾼 무리에서 작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이익……!”

촌장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치욕은 처음이라는 듯이. 씨근덕거리던 촌장이 뒤를 홱 돌아보며 외쳤다.

“경비병! 경비병! 지금 당장 이 난봉꾼들을 추방하도록 해! 축제 분위기를 다 망치고 있잖나!”

지금 축제 분위기를 망치고 있는 이들이 누군데!

구경꾼 대부분의 표정에서 같은 생각이 읽혔지만 다들 촌장이 무서운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촌장과 보르논의 생각은 읽을 가치도 없었다. 뻔하고 짜증 나는 피라미 악당 같은 생각들뿐이었으니.

뒤에서 내내 구경만 하던 내가 나설 때가 됐다.

난 인파를 헤치고 촌장과 대치하고 있는 앤의 앞으로 나섰다.

“아가씨?”

“아가씨, 위험해요.”

앤과 메리는 혹여나 내가 촌장과 보르논의 폭력에 휘말릴까 봐 깜짝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러라지.

오히려 내게 손가락이라도 하나 대는 게 일을 더 빨리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난 내심 그렇게 바라며 입을 열었다.

“상황을 쭉 지켜봤는데요. 지금 아저씨가 다른 곳을 보며 걷다가 앞에서 잘 걷던 저 할아버지와 부딪힌 상황인 거죠? 근데 오히려 성은 아저씨가 내고 있는 거고요?”

내가 상황을 다시 짚자 촌장이 슬그머니 보르논을 봤다. 이런 전 상황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아들부터 보호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이거, 아까 저랑 아저씨의 일이랑 똑같잖아요. 전 아까 앤과 대화하느라 앞을 못 봤고, 아저씨는 똑바로 걸어왔죠. 전 아저씨처럼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휘청거린 것도 아니니, 아저씨 말마따나 아저씨의 눈으로 보고 피했더라면 부딪치지 않았을 텐데.”

“지금 부딪친 게 내 잘못이란 거야?! 난 잘못 없어!”

“그럼 저 할아버지는 왜 잘못이 있나요?”

“그건……!”

보르논의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그는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제 아버지처럼 얼굴을 검붉게 물들였다.

“너 뭐야! 너 누군데 감히 어른한테 말대답을 따박따박―”

“저 할아버지도 아저씨보다 어른 아니에요? 근데 아저씨는 할아버지 막 밀쳤잖아요.”

“너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보르논은 앤에게 잡히지 않은 다리를 확 들어 올렸다. 그대로 날 뻥 차 버리려 한 모양이지만, 난 걱정 없었다.

“찰 수 있으면 차 봐요. 제가 누구냐고 하셨죠.”

턱, 콰당!

보르논의 팔을 잡고 있던 앤이 그대로 그의 팔을 잡아당겨 바닥에 패대기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완벽한 업어치기였다.

“으, 으악…….”

갑자기 세상이 전복되고 낙법도 모르고 그대로 나자빠진 보르논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촌장은 물론 사람들도 얼어붙어 아무런 말도 못했다.

타박, 난 그런 보르논의 얼굴 근처로 가 서서 말했다.

“라티아 라움디셀. 그게 제 이름이예요.”

“!!!”

보르논의 눈이 크게 홉뜨였다. 동시에 당혹과 절망, 공포로 물드는 게 보였다.

만만하게 봤던 꼬맹이가 사실은 제국의 영웅이 명예 따님으로 선언한 사람인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하긴, 난 귀찮단 이유로 귀족들이 제 얼굴을 알릴 때 쓰는 선전용 초상화도 그리지 않았지. 공작님도 자신의 책상에 올려 둘 초상화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고…….

돌아가면 한 장 정도는 그려 둘까 봐.

나중에 홀로 살 때를 대비해서 괜한 잡음이 생기지 않기 위해 그리지 않았던 거지만, 아직 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진 한참 남았다. 그 전까지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귀찮을 듯싶었다.

난 보르논을 보며 말했다.

“두 눈이 멀쩡한데도 나를 피하지 않았고, 부딪쳐서 날 넘어지게 만들었고, 내가 건넨 사과도 받지 않았고, 돌아갈 때 째려보기까지 했지?”

손가락을 꼽으며 그 수를 세니, 내 말이 이어질 적마다 남자의 얼굴은 하얗게 백지장이 되어 갔다. 웃음이 나왔다.

“왜? 제 아무리 대단한 촌장 아들이라고 해도 평민이라서, 귀족모독죄가 두렵긴 한가 봐?”

보르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하지만 내가 몸을 돌리려 하자 간신히 한 마디를 하긴 했다.

“사, 살려 주세요…….”

물론 난 대답하지 않았고 말이다.

* * *

작은 찻집. 우린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아, 정말 살았습니다.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우리가 도와준 노인이 꼭 답례를 하고 싶다고 연거푸 권했기 때문이었다. 딱히 뭔가를 바라고 한 행동도 아닌데 답례를 받자니 민망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계속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여기로 자리를 옮긴 참이었다.

그리고 난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네, 네? 주, 주교님이시라고요?”

우리가 도운 노인이 다름 아닌 디케 신전의 제1 주교라는 소리였다.

어쩐지 남자가 밀쳐도 안 밀리더라! 역시 그냥 노인이 아니었어!

자신을 ‘하인리드’라고 소개한 노인이 멋쩍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숨길 생각이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만, 잠행을 나온 참이어서요.”

나긋나긋한 목소리, 인자함을 녹여 소리를 만들면 이럴까? 자상하면서도 사람의 귀를 사로잡는 마력이 있었다.

“도와주셔서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주교가 내 앞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저도 실례를 범했습니다. 주교님께 할아버지라 부르다니…….”

나도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고개를 숙였다. 내 곁에 선 앤과 메리도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주교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 잠행이 감쪽같았단 소리 같아 기쁘던걸요.”

하인리드가 먼저 자리에 앉으라 말했고, 난 눈치를 보며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마침 차가 나와서 우리는 잠시간 조용히 차를 마셨다.

밖은 이미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공작님이 걱정하실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때, 하인리드가 입을 열었다.

“잠시 영애와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는데 자리를 비워 주실 수 있습니까?”

앤과 메리가 내게 동의를 구하는 시선을 건넸다. 난 아까부터 삐로리가 꿈쩍도 않고 숨어 있는 가방을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 저쪽 테이블에 가 있어 줘.”

삐로리가 있으니 괜찮다 말한 뜻을 알아들은 건지, 두 사람은 군소리 없이 자리를 마련해 줬다.

하인리드가 상냥한 갈색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난 당연히 그가 나와 눈이 마주쳤으니 나붓한 눈웃음을 지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송구합니다.”

“아, 앗, 주, 주, 주교님.”

하인리드는 온몸이 난도질당한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무척이나 괴로워 보여, 나는 드물게 말을 엄청나게 더듬고 말았다.

“어디가 편찮으신 건가요? 지금 당장 사람을―”

“아닙니다.”

“……네?”

“그런 게, ……아닙니다. 아픈 게 아니고…….”

하인리드가 힘겹게 말을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다물었다 열기의 반복. 난 하인리드가 왜 이러는지 몰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제라도 의사를 부르는 게 낫나?

내가 안절부절못하자, 하인리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윽고 그가 토해 내듯 말했다.

“라티아 글라델리스.”

순간 난 멈칫거렸다. 내심 직원이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찾아와 주길 바라느라 통로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오로지 하인리드만 보고 있었다.

글라델리스라니, 난 라움디셀이라 나를 소개했고 이제는 라움디셀이 맞다.

그런데 나를 글라델리스라고 부르다니.

이건 멸칭일까? 아니면…….

찰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섞여들었는데 하인리드의 말 한마디에 모두 산화되고 말았다.

“당신의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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