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킁.”
내가 코를 훌쩍거리자 메리가 얼른 손수건을 건넸다. 난 손수건에 코와 입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고마어…….”
코맹맹이 소리가 민망해 다시 코를 훌쩍거렸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조금 멀리서 들려왔다.
“와아아!”
“엄마아아!”
난 그쪽을 돌아보다 고개를 숙여 벤치 위에서 동동거리고 있는 발을 내려다봤다. 우린 지금 축제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아까 내가 느닷없이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결과적으로 난 앤과 메리가 축제를 즐기는 것도 방해한 게 되었다. 메리는 지금 내 곁에서 눈치를 보고 있고, 앤은 마실 걸 사 오겠다며 강아지, 삐로리와 함께 잠시 자리를 비웠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다 같이 손을 잡고 축제를 즐겨야 하는데…….
난 킁, 다시 코를 훌쩍거리고 말했다.
“메리, 미안해…….”
“네?”
“축제, 나 때문에 못 즐기게 됐잖아.”
창피하고 미안해서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괜히 고개를 숙이고 몸을 옹송그리니, 메리가 내 앞으로 와 몸을 낮췄다.
“아가씨,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쪼그려 앉은 메리가 깨끗한 손수건으로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내 눈가를 문질러 주며 말했다.
“아가씨 때문이라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내가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잖아요.”
“…….”
“내내…… 신경 쓰고 계셨던 거죠? 그게 작은 불씨 때문에 터진 것뿐이고요. 오히려 제 탓을 하셔야 해요. 그동안 아가씨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으니까요.”
“아니야! 내가 왜 메리를 탓하겠어! 이건,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걸…….”
“그렇다면 아가씨의 잘못도 아니에요. 아가씨는 나쁘지 않으니까요.”
메리가 다정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나를 위로해 줬다. 난 말문이 막힘과 동시에 불편하게 응어리졌던 미안함이 사르르 녹는 걸 느꼈다.
내가 입술만 오물거리자, 메리가 내게 양해를 구하고 나를 꼭 안아 줬다.
“아무도 아가씨를 손가락질하지 않아요. 아가씨를 탓하거나 욕하지 않아요. 절대로요.”
“그치만 난…….”
난 가족을 사지로 내몰았는걸.
내가 미처 말을 꺼내지 못하자, 메리가 잠시 기다려 주다 입을 열었다.
“누가 그랬는데요, 신은 일부러 인간의 기억을 미화시켜 좋은 추억만 남긴대요. 절망과 고독, 외로움에 빠져 있지 못하게. 그렇게 사람을 계속 선한 곳으로 이끈대요.”
난 메리의 품에 안겨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몸이 맞닿은 탓에 메리가 말할 때마다 진동이 느껴졌다. 그래서 꼭 심장으로 이야기를 해 주는 것 같았다.
“아가씨는 착하고, 강해서 그래요. 그래서 힘들었던 기억을 빨리 떨치고 좋았던 기억만 가지게 된 거죠. 아가씨께 3년 전의 일을 떠올리라고 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아가씨께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들은 결코 아가씨의 가족이라는, 귀한 이름을 가질 만한 이들이 아니에요.”
단단한 목소리였다. 날 꼭 안아 준 팔은 휘청거리는 몸을 붙잡아 주는 것 같았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에게 그들이 가족이었듯, 그들도 내가 가족이었어.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어떻게 했지?
그들이 날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난 왜 뒤늦게 그들을 가족이라 여기고 있었을까?
내 가족은 여기에 있는데.
난 손을 뻗어 메리를 꼭 끌어안았다. 메리의 몸이 살짝 굳다가 이내 이완되었다.
공작님, 수잔, 삐로리, 길버트, 버틀러, 앤, 메리 그리고 카르시안.
이들이 진짜 내 가족이야.
메리는 날 강하고 착한 아이라고 말해 줬지만, 아니다. 난 약하고 멍청한 아이다.
그러니까 자꾸 나아갈 길에서 휘청이는 거겠지.
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아직 축제는 끝나지 않았잖아. 그럼 이제부터라도 즐길 수 있는 거 아닐까?”
“맞아요. 아직 축제는 한창 하고 있는 중이에요. 가판대 아저씨한테 물어보니 일주일은 더 할 거라던데요.”
“앗, 앤!”
메리의 뒤에서 불쑥 나타난 앤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시원한 얼음과 민트 잎이 동동 띄워진 레모네이드가 들려 있었다.
“자요. 이거 마시고 기운 내서 같이 축제를 즐기러 가요!”
“응! 좋아! 즐겁게 놀자!”
조금 전과 달리, 내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 * *
“흐아, 재밌었다!”
난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벌써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
“광장에서 보는 노을은 정말 굉장했죠?”
“응, 하나둘씩 켜지는 램프 때문에 꼭 노을과 동시에 별이 뜬 것 같았어.”
앤의 말에 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옆에서 메리가 넘어지니까 조심히 걸으라 알려 줬지만 이미 늦었다. 처음으로 즐긴 축제의 여운에 흠뻑 젖어 있던 난 옆에 있는 앤을 보며 걷다가 앞에서 오던 남자와 부딪치고 만 것이다.
“앗!”
“아가씨!”
남자는 덩치가 어마어마했는데, 그 바람에 내가 튕겨져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앤과 메리가 황급히 나를 일으켜 줬고, 난 남자를 올려다봤다. 험상궂은 얼굴이 무척 무서웠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제가 앞을 못 봤어요. 죄송해요.”
내가 앞을 보고 걸었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테니까. 남잔 심기가 불편한 듯 보였지만 내가 건넨 사과를 받아 줬다. 대신 날 한 번 세차게 쏘아봤다.
“아니 사과를 했는데도 왜 저렇게 봐?”
앤이 어이없단 듯 남자의 등에 대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난 그런 앤을 말렸다.
“내가 잘못한 거 맞잖아.”
“그래도요. 아가씨랑 부딪혔단 말은 저쪽도 아가씨를 못 봤단 말 아니에요? 피차일반인데 뭐야, 진짜…….”
“좀 그렇긴 하네요. 아가씨는 뒤로 나자빠지기까지 했잖아요.”
앤과 메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난 다치지 않았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니냐며 두 사람을 달랬다.
“삐쪼릿!”
삐로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날개를 퍼덕거렸지만, 이미 남자는 인파 사이로 사라진 후였다.
나도 솔직히 마지막에 째려볼 필요까진 없지 않나, 생각했지만 뭐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이 아닌가. 내게 중요한 사람도 아닌데 즐겁게 즐긴 축제의 마지막에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아 참았다.
하지만.
“눈을 얻다 두고 다니는 거야!”
막 마차에 타려는 때 뒤에서 시끄러운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빼어보니, 소란의 중심엔 아까 나와 부딪쳤던 남자와 한 노인이 있었다.
“뭐야? 아까 그 남자잖아?”
“그러게, 무슨 일이지?”
앤과 메리가 소곤거렸다. 나도 무슨 일인가 지켜보고 있었는데, 남자가 노인의 어깨를 팍 밀쳤다.
“사과하면 끝날 일을 왜 이렇게 키워? 부딪친 건 당신 잘못이잖아!”
“윽!”
밀쳐진 노인이 비틀거렸다. 꽤 강하게 밀쳐진 듯 보였는데도 노인은 뒤로 나뒹굴지 않았다. 노인이 어깨를 움켜쥐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부딪친 탓은 자네가 다른 곳을 보며 걷느라 그런 거 아닌가.”
“눈은 나한테만 있어? 영감 장님이야? 앞에서 똑바로 보고 걷고 있었으면 영감이 피하면 되는 거 아냐!”
“피했네. 그런데 자네가 다른 곳을 보며 걷느라 휘청거리는 바람에 부딪혔잖나.”
“허, 이 영감 말하는 것 좀 보게. 그래서 지금 부딪치는 바람에 날 자빠트려 놓고 잘못한 게 없단 말이야?!”
“그건…….”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남자가 한눈을 팔았고, 저 노인이 남자를 피하려고 몸을 틀었지만 마침 남자도 비틀거린 탓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뭔가에 정신이 팔린 남자는 그대로 나뒹굴었고.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 같다 생각했는데.
“아까 남자랑 아가씨의 일이랑 똑같네?”
그러고 보니 나와 남자의 입장이 바뀌었을 뿐 똑같았다.
“그런데 저 남자는 보기보다 허약한가 봐. 할아버지가 부딪쳤다고 뒤로 나자빠지냐.”
앤이 고소하다는 듯 킥킥 웃었다. 메리도 슬그머니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난 웃을 수 없었는데.
흐음, 저 할아버지…… 어딘가 묘하게 익숙하단 말이야?
희끗한 회색 머리칼도, 그 밑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와 선해 보이는 인상과 허름한 차림새까지. 내가 익숙할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도 어딘가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걸까?
내가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관찰하던 때였다.
“아니 이 영감탱이가 보자 보자 하니까……!”
남자가 노인이 하는 말을 듣고 옹호해 주기 시작하는 구경꾼들을 의식했는지 냅다 손을 든 것이다.
여유롭게 노인을 뜯어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앤, 메리!”
“네!”
“네!”
내가 부르자 두 사람은 순식간에 인파를 헤치고 노인의 앞에 당도했다.
“윽!”
앤이 내리쳐지는 남자의 손목을 턱 잡았고, 메리는 노인을 자신의 뒤로 보내 보호했다.
“뭐야!”
당황한 남자가 소리치며 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노인한테 손을 들다니,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야? 그렇게 못된 짓만 하니까 이렇게 약하지.”
“뭐, 뭐?”
약하단 소리에 버튼이 눌린 건지, 남자가 눈을 홉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남자는 여전히 앤의 손아귀 안이었으므로.
결국 남자가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내가,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야! 난 이 아트락시아 마을 촌장의 아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