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아니, 아니야. 만약 라티아가 알아차렸다면 내가 모를 리 없어.’
라티아는 항상 영특하게 굴면서도 어딘가 맹하고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건 카르시안과 함께 있으면 확 증폭되는 눈치꽝 같은 것이었다.
삐로리는 라티아의 수호천사이기 이전에 3개의 이름을 가진 대천사였다. 어린아이의 설레는 마음 하나, 무심코 나온 실수 하나 모를 리 없다.
하여 삐로리는 조금 찝찝한 마음을 안은 채, 라티아를 향한 의심을 걷었다. 그러나 한 번 지펴진 의심의 불씨 탓에 그의 검은 참깨 같은 눈은 때때로 날카롭게 빛날 게 분명했다.
* * *
기부를 마친 나는 즉석에서 성력으로 석판에 새겨 주는 기부패를 받았다. 5천만 골드. 어마어마한 금액을 기부한 만큼 석판을 새겨 준 대신관의 얼굴은 아주 싱글벙글했다.
난 지난 3년간 클로드에게 받은 사재와 내탕금 등을 싹 쓸어 왔다.
덕분에 라티아 라움디셀의 계좌는 텅 비었다지만 나에겐 티아나 아메시스트 계좌가 있었다.
사실 티아나 아메시스트의 계좌에 있는 돈도 들고 오고 싶었지만 아직 공작님한테 내가 차명계좌가 있단 걸 말씀드리지 못했어.
‘우릴 믿지 못해서 돈을 모아 두고 있던 거냐? 떠나기 위해?’ 같은 말을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들을 자신이 없어 여태 도망쳤다.
물론 떠날 마음은 아직도 어느 정도 있다. 대체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카르시안은 분명 이리스를 만나 사랑에 빠질 것이다.
카르시안은 남자 주인공이고 이리스는 여자 주인공이니까. 이건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바뀌지 않을 이 세계의 진리였다.
순간 가슴 깊은 곳이 욱신거렸다. 몸이 화끈거릴 정도로 따끔한 통각에 나도 모르게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아가씨?”
그 바람에 석판을 놓칠 뻔하여, 곁에 있던 메리가 깜짝 놀라 나를 불렀다.
“아…….”
난 메리가 가까스로 잡아 준 석판을 내려다봤다. 날카로운 얼음 송곳으로 찔린 것 같던 통각은 신기루인마냥 사라졌다.
그건 대체 뭐였을까?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리스 생각을 할 때마다, 아니. 그녀가 여주인공이고 나는 악역 조연이라 결국 카르시안의 곁을, 라움디셀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이렇게 아팠다.
어째서?
의문이 따랐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무척 궁금했지만 알면 안 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난 애써 생각을 환기시켰다. 마침 좋은 구실도 있었다.
“오천만 골드라니, 새삼 손에 힘이 빠질 정도로 큰 금액이란 생각이 들어서…….”
“아아, 무리도 아니죠.”
내가 석판을 떨어트릴 뻔하자 조금 놀랐던 대신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만한 금액은 가주들께서 직접 오실 때나 기부받곤 하는 큰 금액이니 말입니다.”
그의 말마따나 5천만 골드는 절대로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황실에서 매년 기부하는 금액이 1억 정도이고 황가의 최측근이라 불리는 이들이 5천만에서 6천만 골드 사이의 금액을 기부하니까.
그런 큰 금액을 나같이 어린아이가 기부하니, 뒤늦게 현실 감각이 들어 손에 힘이 빠질 만도 하다고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했다.
우리를 정문까지 배웅해 준 대신관이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 운을 뗐다.
“참, 라움디셀 공작령으로 바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아, 네. 그럴 생각이에요. 새로운 식구도 생겼으니 준비할 게 많아서요.”
난 앤의 품에 폭 안겨 잠든 작은 강아지를 눈짓했다. 기부하기 직전 신전의 유기 동물 보호소에서 입양한 카르시안의 수호천사였다.
“아, 이야기 들었습니다. 유기 동물 보호소에서 강아지를 입양하셨다고요.”
“네. 제 반려조 덕분에 만난 아이인데, 이 또한 어떤 인연이지 않을까 싶어서요.”
사실은 삐로리가 괴롭혀서, 카르시안의 수호천사라서, 급히 입양하는 것이지만 굳이 알릴 필요는 없겠지.
내 말에 대신관이 감동받은 얼굴로 눈을 빛냈다.
“실은 저 유기동물 보호소엔 자녀의 극성에 못 이겨 동물을 사고 다 자라서 흥미가 떨어지자 버림받은 아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아주 가슴 아픈 일이며, 큰 사회 문제라고 덧붙였다. 나도 사지 말고 입양하잔 입장이긴 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부도 하고 동물도 입양하시다니. 영애의 몸엔 덕이 가득하실 겁니다. 주신께서 굽어살펴 주시길.”
대신관이 부쩍 감동받은 얼굴로 날 향해 합장하고 기도하듯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금 뻘쭘했지만 대신관의 축복을 받아 두면 어디에든 좋을 테니 잠자코 있었다.
축복의 기도를 마친 대신관이 말했다.
“새 식구가 생겨 빠르게 귀가하시려는 마음은 알지만, 만약 마음이 있으시다면 로키울 산맥 아래 마을을 구경해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마침 축제 중이니 말입니다.”
“축제요?”
“예. 아트락시아 마을이라고, 이 근방에선 가장 큰 마을인 데다가 로키울 산맥 근처라 여름에도 선선해서 구경하기 딱 좋을 겁니다.”
마을 축제라, 그러고 보니 살면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황성 전야 경매 파티 같은 파티나 영애들과 친목을 다지는 티파티는 종종 다녔지만.
마을 축제는 어떤 느낌일까?
내 마음이 슬그머니 들뜨기 시작한 걸 들킨 모양인지, 심심한 얼굴로 잠든 강아지만 쓰다듬던 앤이 말했다.
“잠깐 들러 볼까요? 볼거리가 많을 거 같은데.”
“저도 좋은 생각 같아요, 아가씨. 아가씨께선 그간 이런 축제에 참여하실 기회가 없었잖아요.”
웬일로 메리가 앤의 말을 두둔해 줬다. 축제 생각에 들뜬 마음에 화다닥 불이 붙는 게 느껴졌다.
큼큼, 난 목을 가다듬고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난 별로 생각 없지만 두 사람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잠깐 정도라면…….”
어쩐지 축제에 가고 싶어 어쩔 줄 모르고 있다고 말하자니 좀 창피해져 아닌 척을 했다. 하지만 그런 날 귀여워 죽겠다는 듯 보는 앤과 메리의 표정을 보니 소용없는 짓이었나 보다.
“그럼 다음에 또다시 만나 뵙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저도 오늘 아주 뜻깊은 시간이었어요.”
난 대신관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추운 로키울 산을 내려갈 준비를 단단히 마쳤다. 올라올 땐 무척 힘들었지만 내려가는 건 금방이었다.
어쩌면 카르시안의 수호천사라는 좋은 인연을 만났기 때문에, 또 저 밑에 마을 축제라는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 * *
“와아……!”
분명 여름인데도 한창 마을 축제가 펼쳐지고 있는 아트락시아 마을은 아주 선선했다.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덕분에 아무리 걸어도 땀이 나지 않을 듯싶었다.
게다가 그 바람을 타고 리본은 한들거리고, 광장에서 울리는 음유시인들의 노래가 꽃가루와 함께 날아와 가만히 서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아가씨, 저기 닭꼬치가 있어요!”
“왕!”
“아, 이쪽으로 가면 음식 가판대가 늘어선 거리인가 봐요.”
“삐쭈릿!”
앤과 강아지, 메리와 삐로리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 강아지는 사실 마차에 두고 오려고 했는데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결국 데리고 나왔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푹 자더니 쌩쌩해진 것 같기도 했고.
난 나보다 더 들뜬 이들을 보다 가장 먼저 뭐 좀 먹자고 할 생각이었다. 이때였다.
“엄마! 나 저기 저 사탕 사 주세요!”
“아빠, 아빠! 저 목마 태워 주세요!”
내 뒤에서 앞으로, 부모님의 손을 꼭 잡은 아이들이 밝은 목소리로 외치며 달려나갔다. 난 앤과 메리에게 달려가려던 자세 그대로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와아, 엄마. 여기에 조개 목걸이가 있어요!”
“아빠 한 입, 엄마 한 입!”
“뛰지 마, 넘어져!”
“괜찮아! 아빠가 잡아 줄 테니까!”
축제가 한창인 마을의 거리는 정말 왁자지껄했는데, 그중의 대부분이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며 환한 웃음을 터뜨렸고 또 어딜 가든 함께하며 즐겁게 축제를 즐겼다.
엄마, 아빠, 그 소리가 계속해서 내 귓가에 맴돌았다.
난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특히 엄마, 아빠 하고 소리 내어 부를 때는 아이도, 그 소리를 듣는 부모도 모두 다.
저 단어들이 저토록 행복한 울림이 있는 말이었던가?
아리송했다. 분명 익히 알고 있는 단어인데도 난생처음 듣는 외국어를 들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이러는 와중에도 아이들은 수도 없이 불러 댔다.
“엄마!”
“아빠!”
저들의 절대적인 원군이자 가족들을.
“가, 족…….”
머릿속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늘 나에게 윽박지르고 경멸하듯 치를 떠는 눈빛, 끝내는 나를 저주하며 죽은 그들의 목소리까지.
순간 오싹한 한기가 들었다. 난 멍하니 손을 들어 내 목을 매만졌다.
아직, 잘 붙어 있어.
이 목은 내가 엄마, 아빠라는 단어와 맞바꾼 목숨이었다. 난 살아남기 위해 나의 부모님이자 가족인 글라델리스 후작가를 고발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에, 회귀 전에 나를 배신했으니까…….
숱한 이유가 따랐지만 그럼에도 내가 목숨과 가족을 맞바꿨단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클로드가 아무리 나를 친딸처럼 대해 줘도, 결국 우리는 남남. 난 사생아였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피를 절반은 잇고 있었다.
진짜 핏줄을 버린 죄는, 과연 용서받을 수 있는 종류인 걸까?
내가 자리에 우뚝 굳은 채 서 있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부르던 앤과 메리가 시선을 교환하는 게 보였다.
“엄마, 여기예요!”
“아빠! 우리 저기 가 봐요!”
신나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은 걸까?
앤과 메리는 물론이고 메리의 어깨에 앉아 있던 삐로리마저 표정이 굳어 버렸다.
나 때문이었다. 내 과거사를 아니,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일 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난 괜찮다고 해야 해. 즐거운 축제를 망칠 순 없어.
하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아가씨.”
“아가씨…….”
결국 앤과 메리가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괜, ……흐.”
난 그들에게 괜찮다 말하고 싶지만, 울듯이 웃어 보이는 게 고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