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중앙 지방에 있는 라움디셀 공작령에서 대신전이 있는 로키울 산맥까지는 세 개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할 만큼 멀었지만, 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텔레포트가 좋긴 좋네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한 로키울 산맥의 초입에서, 메리가 중얼거렸다.
공작령은 여름이 완연한데, 로키울 산맥은 겨울이었다. 손을 가져다 댄 창문에 성에가 껴 있었고, 몹시 차가웠다.
내가 창문에 호오, 입김을 불 때였다.
“아니지, 텔레포트도 좋지만 제일 좋은 건 역시 돈인 거지.”
앤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메리의 말을 정정해 줬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텔레포트는 거금을 내야만 이용할 수 있는 아주 편리한 전송 마법이었으니까.
“돌아갈 때도 텔레포트를 타면 좋겠어요. 텔레포트를 타고, 타고, 와서 한 시간 남짓 걸린 거지. 그냥 마차로 이동하면 일주일은 걸린다면서요?”
앤이 두 손을 포개어 잡고는 내 앞에서 기도하듯 말했다. 난 그런 앤을 보다 킥킥 웃었다.
“응, 텔레포트로 돌아가자.”
그렇지 않아도 내가 일주일이나 마차여행을 한다고 하면 클로드가 경을 칠 것이다. 어쩌면 만사를 제치고 말을 타고 달려올지도 모른다.
내 말에 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돌아갈 때도 편안하게 간다는 게 무척이나 좋은 모양이었다.
마차 밖에서 마부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으니 이만 내려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대신전은 누구든 걸어가야 한다고 그랬죠.”
앤이 깜빡했다며 황급히 머플러를 둘렀다.
난 아까 메리가 꼼꼼히 겨울 옷을 입혀 줘서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단단히 싸매 줘서 좀 답답할 정도다.
지난 겨울, 수잔이 직접 떠 준 니트 모자에 볼끼처럼 만든 귀마개, 캐시미어 목도리와 자체 발열이 되는 털실로 만든 손모아 장갑까지.
여기에 방한 코트까지 입힌다는 걸 간신히 말렸다.
“그럼 문을 열게요.”
메리가 앤과 나의 차림새를 한 번 더 확인해 주고 나서 문을 열었다.
마차 안은 난로 덕분에 포근한 훈기가 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문을 열자마자 확 들이닥치는 차가운 겨울 공기가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와아, 진짜 겨울이네요.”
먼저 마차에서 내려 나를 내려 준 앤이 새하얗게 눈옷을 입고 있는 산을 가리키며 감탄했다.
“저 겨울에 산 와 보는 거 처음이에요.”
내 주머니에 소형 탕파까지 넣어 준 메리가 조금 발그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생각해 보니 나도 그러네. 겨울 바다는 질리도록 가 봤는데.”
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두 사람은 원래도 해적이니 산보단 바다와 가까운 이들이었다. 라움디셀 공작령에 온 지난 3년간 내가 공작령에서 나가질 않았으니, 멀리서 눈 덮인 산은 봤어도 오른 적은 없었을 거고.
“나도 눈 덮인 산을 오르는 건 처음이야.”
환생 전에도, 회귀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우리 셋 다 처음이네?”
내가 앤과 메리의 손을 한쪽씩 잡으며 웃자, 두 사람의 광대가 볼록 솟았다. 겨울옷으로 꽁꽁 싸매, 약간 동그래진 내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그러게요. 우리 셋 다 처음이네요.”
“좋아요. 그럼 처음이니까 기운내서 가 보자고요!”
메리와 앤이 내 손을 꼭 맞잡아줬다.
하지만 이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정색을 하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
[아 추워 죽겠으니까 빨리빨리 가자고, 쫌!]
내 코트 안쪽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자마자 빽 소리를 질러 버리는 삐로리였다.
“그러게, 내가 그냥 성에 있으라고 했잖아.”
[바늘 가는 데에 실이 가는 거 몰라? 라티아가 가는데 내가 어떻게 성에 있냐!]
앤이 눈치를 줘도 삐로리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진한 믿음이 어린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치, 라티아?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이지?]
삐로리의 검은 깨 같은 눈에서부터 스페이드 모양의 반짝이가 날아와 내 얼굴에 마구 박혔다.
난 내심 앤과 같은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이는 삐로리를 보고 있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한숨을 꾹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애써 웃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대답에 삐로리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거봐!’ 하듯 고개를 턱 치켜 올렸다. 물론 그만큼 찬바람에 더 많이 노출되어 금방 목을 콕 움츠렸지만.
[자, 빨리 빨리 가자고. 아무리 단단하게 입었다 하더라도 밖에 오래 있다간 감기 걸려.]
삐로리가 명령 아닌 명령을 했고, 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내 코트 사이로 비쭉 튀어나온 삐로리를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삐로리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해서, 우리는 얼른 로키울 산맥 정상에 있는 대신전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기로 했다.
* * *
얼마나 걸었을까? 대신전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신전 입구 안은 야외여도 ‘신의 가호’라는 축복 덕분에 춥지 않았다. 덕분에 세 사람은 하나둘씩 옷을 벗고 가벼운 차림이 되었다.
“디케 신전에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도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메리가 라티아가 벗은 코트와 모자를 끌어안았을 때였다. 마침 라티아를 기다리고 있던 사제들이 나와 환영해 줬다.
라티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잠깐 둘러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대신전에 오는 게 처음일 뿐만 아니라, 한겨울 산속에 자리 잡은 봄이 무척이나 신비로워 조금 거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입니다. 편히 둘러보십시오.”
이런 사람이 많은지, 사제는 익숙한 듯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세 사람은 대신전의 정원에서도 초여름에나 피는 여름 장미가 가득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와, 여기만 날씨가 봄이네.”
“그러게, 꽃도 피어 있네. 열 발자국만 뒤로 가면 까마득한 겨울인데.”
아무 데나 앉아서 피크닉을 해도 즐거울 정도로 정원은 아름다웠다. 세 사람이 어디 앉아서 쉴 곳이 없나 주변을 둘러보던 때였다.
“……삐르륵?!”
내내 라티아의 어깨에 앉아 얌전히 있던 삐로리가 갑자기 발작을 하듯 날개를 퍼덕거렸다.
“아, 앗! 삐로리!”
깜짝 놀란 라티아가 어깨를 움츠리자, 삐로리가 높게 날아올랐다. 순간 다른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대신전의 정원에도 새는 많았기에 이내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삐로리! 무슨 일이야?”
라티아가 불렀지만 삐로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높게 날아오른 채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뭐지? 이 느낌은?’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워 보였다.
“삐로리!”
“내려와, 삐로리!”
앤과 메리가 아래에서 손을 내저었지만, 삐로리는 지금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여름 장미가 핀 정원으로 오고 나서야 느껴지던 기묘한 감각이 하나 있다.
‘설마, 설마……!’
삐로리는 봄과 여름 꽃이 화사하게 핀 대신전의 정원을 세차게 날아갔다.
“앗, 삐로리!”
그 모습을 본 라티아가 황급히 쫓아갔지만, 삐로리는 벌써 한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 후였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모르겠어. 하지만 삐로리가 저렇게 경황이 없어 보이는 모습은 처음 봐.”
라티아의 뒤를 따라온 메리의 물음에, 라티아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따라가 봐야겠어.”
“네, 알겠어요.”
“저 건물로 들어갔어요!”
라티아와 메리, 앤도 삐로리를 따라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이들을 만났다.
“여긴…….”
바로 종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지내고 있는 여러 동물들이었다. 개, 새, 고양이에 이어 쥐, 기니피그 심지어는 작은 여우까지! 한쪽 구석엔 뱀이나 도마뱀 같은 파충류도 있었고 졸졸졸 소리가 들리는 작은 연못가엔 금붕어나 개구리도 있었다.
“왈! 왈왈!”
“미야아.”
낯선 이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몇몇 동물들이 울었고, 그 소리를 듣고 한 남자가 구석의 문을 열고 나왔다. 사육사인 모양인지 점프 수트를 입고 있는 남자의 품엔 작은 강아지가 안겨 있었다.
그가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오신 분들이시죠? 여긴 외부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만.”
혹여나 동물들에게 해로울까 봐 날이 선 목소리였다.
“아, 저희는…….”
그에 메리가 앞으로 나서 남자의 오해를 풀어 주려던 때였다.
“삐익!”
높은 천장 쪽에서 빙글빙글 돌던 삐로리가 갑자기 활강하더니 사육사의 어깨에 턱 걸터앉았다.
“앗, 삐로리!”
라티아가 불렀지만 삐로리는 사육사의 어깨에서부터 팔뚝을 타고 내려오더니, 그의 품에 꼭 안겨 있는 강아지를 마구 쪼기 시작했다.
“이, 이러지 마!”
사육사도 당황했고, 삐로리의 느닷없는 행동에 라티아는 물론이고 앤과 메리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삐로리의 기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는데.
“삐!”
차딱, 차딱! 발톱을 말아 넣은 세 개의 발바닥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강아지의 등을 마구 두드렸다.
그 순간 라티아는 삐로리의 표정을 읽었다.
‘으이구, 이 화상아! 어디 숨어 있나 했더니, 여기에 콕 박혀 있냐? 내가 얼마나 찾은 줄 알아!’
아무래도 삐로리와 강아지는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