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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28화 (128/186)

128화

잠시 후, 난 아직 진정되지 않은 손으로 카르시안의 편지를 열어 봤다.

손끝에서 맥박이 치는 것 같아.

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꺼내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보는 이가 없는데도 괜히 민망했지만,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민망함이고 뭐고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네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삐로리가 창문을 두드려서 놀랐어.]

첫 문장부터 이러했으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너무 거세게 뛰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과부하에 걸렸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심장은 한 차례 멈췄다.

“내,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가까스로 가라앉았던 얼굴의 열기가 다시 확 몰렸다. 가만히 있어도 지금 내 볼과 목이 뜨끈뜨끈한 게 느껴질 정도였다. 눈동자가 잘게 떨려 글자가 어지럽게 보였다.

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일부러 소리 내서 말했다.

“다, 당연히 그렇겠지. 내가 황도 출입 금지령을 받았단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까…….”

카르시안은 착하고, 다정하고, 친절하다. 심성이 따듯하니까 분명 날 걱정했을 거다.

왜냐면 우린 친구니까.

그런데 이번엔 다른 의미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 어?”

난 편지를 잠시 내려두고 가슴께를 더듬었다. 아까 철렁하고 심장이 떨어진 느낌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줍고,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어떻지?

가슴 부근을 더듬던 손을 내려 명치 쪽을 지긋하게 눌렀다.

꼭…… 체한 것 같아.

철렁하고 떨어진 심장이 이쯤에 걸린 것 같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딱히 힘을 쓰지도 않았는데 손바닥이 저렸다.

뭐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카르시안하고 난 친구가 맞는데.

그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찌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정전기가 오른 것 같기도 했고, 눈물이 나기 전 시큰거리는 눈시울의 느낌이 온몸을 타고 흐른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병에 걸린 건 아니겠지?”

괜히 무서운 기분이 들었지만, 또 가만히 있으면 괜찮아졌다. 속이 좀 울렁거리고 조금 전까지 나들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두근두근 설레던 마음이 조금 울적해지긴 했지만.

몸 상태를 좀 더 지켜보다가 문제가 생긴 것 같으면 수잔에게 말해 봐야겠다.

난 내려 둔 편지를 다시 집어 들고 그다음 문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편지 고마워.]

간결한 문장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장장 편지지 5장에 달했다. 심지어 앞뒤로 적어서, 엄밀히 말하면 10쪽이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지난번, 짧은 편지에 서운했단 내 마음을 달래 주려는 걸까? 어쩌면 지난번 편지 때도 이만큼 이야기를 적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심지어 글씨도 깨알 같고 빡빡하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도 역시 부족했다. 내 시선이 편지의 끝으로 내려갈수록, 손에 들고 있는 장수가 줄어들수록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니까.

아직 카르시안이 한참이나 부족한데 벌써 내 남은 편지는 한 장뿐이다.

시계를 보니 네 장의 편지를 읽는 동안 무려 15분이나 지나 있었다. 카르시안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자그마한 글씨로 담아 놨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짐과 동시에 빠르게 헛헛해지고 있었다. 글자 하나, 하나 카르시안이 읽어 주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리는데도 곁이 허전했다.

“다음엔 통신구를 몰래 보내 볼까 봐.”

아카데미에선 통신구를 사용할 수 없지만 예리엘 만물 상단에서 판매하는 거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혼자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런 생각을 다 하네…….”

회귀 전, 불법을 저질러서 한 번 죽음을 경험한 탓일까? 난 이 하이페디움 제국의 주신인 정의의 신, 디케가 두려웠다. 그래서 회귀 후엔 가능한 떳떳한 행동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내가 아카데미의 규정에 대놓고 어긋나는 행동을 하려고 하다니.

“끙…….”

그렇지만 정말 카르시안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난 내 안의 악함과 싸우느라 카르시안의 편지를 잠깐 내려놓아야 했다.

“휴, 참자. 괜히 꼬투리 잡힐 일을 하면 안 되지. 카르시안을 보는 건 좋지만, 들켰다간 에메르나 황비가 카르시안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이번에야말로 클로드의 손이 닿지 않게끔 어떤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 난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 오로지 카르시안의 안전만을 생각하자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집어 들었는데.

[종이의 여백이 줄어드는 게 야속해.]

“……으!”

카르시안은 역시 날 잘 알고 있다. 내가 아쉬워할까 봐 이런 말을 마지막 장의 첫 문장으로 한 게 분명했다.

[아버지한테 통신구를 구해 달라고 할까 봐.]

심지어 그다음 문장은 내가 생각한 내용 그대로였다.

[하지만 라티아 너는 그러지 말라고 하겠지?]

그 글자에선 아쉬운 마음이 듬뿍 묻어났다. 내가 허락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다는 듯이.

난 키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응. 나도 조금 전까진 너랑 같은 생각을 했어. 하지만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만약 들키면 너도 곤란해질 테니 나도 참을 거지만.]

중얼거리며 다음 문장을 읽으니, 우린 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우습고 기분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애틋한 손길로 편지를 쓸었다.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보존제를 듬뿍 뿌렸는지 살짝 우둘투둘한 느낌이 났다.

그 뒤로 사소한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결국 편지는 마지막 문장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럼 이만 줄일게.]

마지막 문장은 다른 글자들과 달리 미묘하게 더 짙은 느낌이었다.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꾹꾹 눌러 쓴 것처럼 굵기도 굵었고.

긴 편지가 끝났는데도 아쉬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한 번 더 읽을까 하려던 때, 구석의 자투리 공간에 더 작은 글씨가 쓰여 있는 걸 봤다.

[추신. 5년은 생각보다 금방 가. 우리가 함께 있던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길 테지만 괜찮을 거야.]

응? 5년? 웬 5년이지?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황도에 가지 못하는 건 10년이다.

“아, 졸업하면 바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런가?”

환생 전과 달리 하이페디움 제국에서 성인이 되는 나이는 18세이다. 그래서 하이페디움 제국의 귀족들은 10살쯤 입학해서 8학년 과정을 거쳐, 성인이 된 후 졸업하는 게 보통이다.

카르시안은 지금 13세이니, 5년 후면 성인이긴 하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아카데미에 늦게 들어갔는데.”

카르시안은 열셋에 입학했으니, 21살은 되어야 졸업이 가능할 터였다. 이러나저러나, 우리가 보려면 8년이 남았단 소리다.

그런데 왜 5년이라고 하는 걸까?

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편지는 묵묵부답이었다.

* * *

사흘 후, 난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왜냐면 오늘, 하이페디움의 주신인 정의의 신 디케의 신전에 가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난 마중을 나온 이들을 향해 발랄하게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라.”

“애들이 따라가니까 걱정은 안 하지만 말이야.”

클로드와 헥터가 손을 흔들어 줬다.

“맞아요.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를 안전하게 지킬게요.”

“저도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뭐야, 나 하나로는 부족하단 뜻이야?”

“넌 가끔 주위가 산만해지잖니.”

앤과 메리가 사이좋게 투닥거렸다. 난 두 사람을 보고 키득거리다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가 문을 닫자, 클로드가 계단을 내려왔다.

내가 창문을 내리니, 그가 말했다.

“가서 보여 줘. 네가 아직 건재하단 걸 말이야.”

“네, 알겠어요.”

클로드가 마부에게 고생하라며 말을 건넸고, 마부는 기쁜 얼굴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몇 차례 말이 푸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가 출발했다.

“조심히 다녀 오십시오!”

“다녀오세요!”

뒤에서 버틀러와 수잔이 내내 참고 있던 걱정을 터뜨렸다. 내가 홀로 공작령을 벗어나는 게 처음이다 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선 따라오고 싶은 눈치였지만, 클로드가 나 혼자만 보내겠다 했으니 어쩔 수 없이 배웅하는 것 같았다.

난 창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걱정 말라는 듯 씩 웃어 줬다. 클로드가 위험하니 안으로 들어가라 소리쳤지만 난 열심히 손만 흔들었다.

“아가씨, 위험하니까 어서 들어오세요.”

메리가 엄한 목소리로 혼내기 전까지 계속 말이다.

오늘 내가 느닷없이 디케의 신전에 가는 이유는 단순했다. 황도 접근 금지령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클로드의 명예 따님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알려 줘야지. 내가 황도에만 나가지 못하는 것뿐이지, 다른 곳엔 얼마든지 다닐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여전히 난 어엿한 ‘라움디셀’이란 걸.

가문의 위세를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신전에 가서 막대한 기부금을 내는 것 아니겠는가.

카르시안의 편지를 읽고 완전히 회복된 나는 곧장 클로드를 찾아가 디케의 신전에 가고 싶다고 알렸다.

‘신전에 가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가서 뭘 하려고?’

‘아, 그게요. 기부를 좀 하려고요.’

‘기부?’

‘네. 가주도 아닌 제가 다른 가문에선 가주가 직접 내러 올 법한 기부금을 내는 거예요.’

‘막대한 기부금이라…… 흐음. 제법 괜찮은 생각이군. 그러면 은근히 너를 업신여기던 이들의 입도 딱 다물릴 테지.’

물론 기부금은 내가 그간 저금해 둔 사재에서 낼 것이다. 클로드가 기꺼이 내주겠다 했지만 난 극구 사양했다.

‘제가 내고 싶어요. 공작님이 대신 내주면, 제가 막대한 기부금을 내는 효과가 떨어질 것 같아요.’

클로드가 내주면 아무리 내가 기부를 했다 하더라도 심부름꾼에 불과하지 않나. 이런 내 생각을 안 클로드는 선뜻 고개를 끄덕여 줬다.

곧 가을이니 새 옷을 사라는 이유로 기부금에 웃도는 금액을 하반기 사재로 새로이 책정해 주긴 했지만.

신전에 가는 건 회귀 전, 후를 통틀어 처음이라 기분이 조금 들떴다.

음,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아.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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