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27화 (127/186)

127화

수도에서 카르시안을 보고 온 후로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달리 말하면 내가 황도 출입 금지령을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단 소리다.

황도 출입 금지령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고 웃기다. 하지만 나를 장장 10년이나 황도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아 둔 이 황명은 대외적으로 나의 잘못 때문이라 퍼져 있다.

제아무리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이라곤 해도 헤바테인을 개인적으로 들고 다니고 아카데미에서 과시한 게 모독적이라며.

억울한 부분이 없진 않지만 황명이라는데 어쩌겠어. 알겠다고 해야지.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황도 출입 금지령은 나만 받았단 것이다. 요컨대 클로드는 황도에 출입할 수 있단 소리다.

하기야, 에메르나 황비는 공작님을 사랑하니 그까지 출입금지 명령을 내릴 순 없었겠지.

덕분에 공작님은 혹여나 뻗어 올지도 모르는 에메르나 황비의 마수로부터 카르시안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다.?

뭐, 그래도 카르시안을 만나기 어려워졌다니 우울한 기분은 떨치기 힘들었지만.

“휴우, 멀리 떨어져 있는 건 같지만 보고자 하면 볼 수 있는 것과 어떻게 해도 못 보는 건 다르구나…….”

소리 내서 말한 탓일까? 여차하면 10년간 카르시안을 못 볼지도 모른단 생각에 울적함이 배가 됐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다일 줄 알았던 과거의 내게 “턱도 없으니까 볼 수 있을 때 떼를 써서라도 보고 와라”고 조언해 주고 싶을 정도다.

내가 한숨만 연달아 네 번을 쉬었을 때였다.

“똑똑.”

아까 앤이 환기한다고 열어 둔 문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빈 책상을 뚫어져라 보던 고개를 반짝 드니, 그곳엔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걸친 클로드가 있었다.

“공작님?”

“그래, 똑똑.”

클로드가 허공에 노크하며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신종 장난인가 싶었지만 푸스스 웃음이 났다. 그런데 그런 클로드의 옆에 있던 앤은 썰렁 개그를 친 부장님을 보듯 질색하다가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라, 안 웃긴가? 난 무력하게 웃음을 터뜨릴 정도로 웃겼는데.

아무래도 클로드의 유머 감각이 옮은 것 같다. 어쩌면 전생의 내가 어른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고.

그나저나 공작님이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걸까?

의문을 담은 표정으로 바라보니, 클로드가 여전히 특유의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네? 이러고 있다뇨?”

“한동안 카르시안과 정말로 못 만날 거라며 한숨만 쉬고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와 봤다고.”

“아…….”

세상에. 내 마음을 알고 계셨잖아?

별것도 아니고 누구든 예측할 수 있는 일이라지만 괜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빨개진 뺨을 감싸며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양 입술만 오물거리자 클로드가 픽 웃었다.

“기분 전환할 겸 잠시 나들이를 다녀오는 건 어때.”

“나들이요?”

“그래. 이따가 한차례 소나기가 온다더군. 좀 시원해지면 야외라도 다니기 수월해지겠지.”

“어…….”

“왜, 싫으냐?”

클로드가 의외라는 듯 문가에 기대어 서며 숱 많은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난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싫지 않아요.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나가고 싶은 기분도 아니에요. 더운 건 둘째 치고 그냥…….”

괜히 마음이 심란하고 우울해서 다른 걸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책을 읽고 싶지도, 사격장에 가고 싶지도,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방에 틀어박혀 있고 싶을 뿐.

마음 같아선 내내 침대에 늘어져 있을 테지만, 그건 앤이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가만히 나를 살펴보던 클로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라티아.”

책상 바로 앞, 내 머리 위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올려다보니 클로드는 나의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이었다.

“오늘이면 되나?”

“네?”

“내일이면, 그 울적한 기분이 풀어질 것 같나?”

“어…….”

“모레는. 일주일 후는?”

다그치는 듯 묻는 것 같은 목소리에 아리송해졌다. 그래도 무섭거나 두렵지는 않아, 나는 클로드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한참이나 나와 시선을 맞추던 클로드가 허리를 숙였다.

“기분이 나아지고 싶은 의지는 있고?”

“…….”

난 말문이 턱 막혔다. 정곡을 찔려 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없다. 그런 의지.?

카르시안과 강제로 멀어져 10년간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 기분을 다스릴 생각일랑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난 우울감으로 출렁거리는 바다에 나를 던져 버렸다.?

그렇게 표류하는 해파리처럼 떠다닌 지 벌써 일주일.

솔직히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이런 기분이 가실지 모르겠다. 아직도 현실감이 없으니까.

문득 내 손을 잡고 그 위로 입술을 누르던 카르시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중하게 내리감은 눈꺼풀이 가늘게 떨려 긴 속눈썹이 흔들렸고, 높고 곧은 콧대는 나의 또래라기보단 훌쩍 자란 청소년의 것처럼 보였다.

세 살 차이가 이렇게 크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 앞에 클로드를 두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 아니, 나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전부터, 그러니까 카르시안이 내 손등에 입을 맞췄던 그 순간부터 시간 속에 사로잡힌 듯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간신히 정신이 들었을 땐 마구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숨 쉬기가 가빠진 후였고.

지금도 봐. 그거 잠깐 생각했다고 심장이 또 제멋대로 날뛰고 있잖아.?

끙, 우울감과 알 수 없는 병증 때문에 일주일간 마음 편히 쉰 적이 없을 정도다.

내가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자니, 날 가만히 보던 클로드가 책상을 짚으며 말했다.

“흠, 그렇다면 이건 필요 없겠군.”

“네?”

무슨 소린가 싶어서 고개를 드니, 클로드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의 긴 검지와 중지 사이에 꽂혀 있는 건 다름 아닌.

“편지!”

“그래. 카르시안에게 답신이 왔다.”

내가 삐로리를 전서구로 이용해 보냈던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클로드가 요령도 좋게 긴 손가락 두 개를 번갈아 교차하며 편지를 흔들었다. 마치 궐련이 탄 재를 떠는 것 같은 불량한 행동이었지만 편지에 정신이 팔린 난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편지를 보면 네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서 가져왔지만, 뭐. 기분이 나아질 생각이 없다니 이것도 필요 없겠지.”

클로드는 다시 편지를 품에 넣는 척하며 책상을 짚었던 몸을 폈다. 난 황급히 클로드의 팔에 매달렸다.

“자, 장난이었어요!”

“흠?”

“기분 나아질 생각 있어요, 완전 있어요!”

난 혹여나 클로드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봐 정말이라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큭.”

그러자 클로드가 터진 웃음을 이를 악 다물어 참더니, 편지를 쥔 손으로 내 머리를 슬슬 쓰다듬어 줬다.

“그러냐?”

“네!”

“정말로 기분이 나아질 생각이 있는 거겠지?”

“네!”

“흠, 하지만 네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아이가 아니란 걸 난 알고 있는데.”

으악, 성실한 이미지를 너무 높게 쌓았나?

난 어쩔 줄을 몰라 입술만 오물거리며 클로드를 올려다봤다. 힝, 괜히 울상이 지어졌다.

아닌데, 나 진짜 기분 나아질 생각 있는데. 카르시안 편지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기분이 나아질 텐데!

“저, 저도 가끔은 한 입으로 두말 하고 그래요…….”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런 바보 같은 말뿐이었다. 이에 클로드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듯 드물게 눈을 크게 떴다가 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윽, 창피해!

하지만 나는 여전히 클로드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편지는 정말 받고 싶었으니까.

내가 볼을 부풀리면서도 떨어지지 않자, 클로드가 편지의 평평한 면으로 내 정수리를 톡 때렸다.

“……?”

“받아라. 설마 내가 너에게 정말로 이 편지를 주지 않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의심은 했단 말이군?”

클로드가 한쪽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난 다급히 고개를 가로젓고는 얼른 편지를 받아들었다.

고지가 눈앞인데 뺏기면 안 돼!

아까 클로드가 그랬듯 나도 얼른 드레스의 옆 주머니에 편지를 숨겼다. 내가 이것저것 들고 다니는 게 많자 수잔이 바지 주머니처럼 수선해 준 주머니다.

내가 주머니에 쏙 들어간 편지를 톡톡 두드리고 있자, 클로드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좀 서운하군.”

“앗, 공작님. 으으.”

“내 말 백 마디보다 카르시안 녀석의 글 한 줄이 더 너를 빨리 회복시킨다니 말이야.”

“아니에요. 공작님이 장난쳐 준 덕분에……!”

“농담이다.”

내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려고 하자 클로드가 웃으며 내 뺨을 툭 건드렸다. 그 표정이 아주 개구쟁이 같았다.

또 장난이었어?

“으! 오늘따라 장난이 심하세요……!”

“그러게 누가 장난칠 때마다 재미있는 반응을 보이랬나.”

“제, 제 탓이에요?”

난 당혹스러워 말까지 더듬었다. 순간 어이가 없었는데,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씩 웃는 클로드를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평소보다 날 조금 더 많이 골린 이유는 내 주의를 카르시안으로부터, 울적한 기분으로부터 돌려주기 위함이겠지.

그 다정함을 깨닫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찡긋 올라가 버렸다. 내 기분이 풀어진 걸 안 걸까? 날 찬찬히 살펴보던 클로드가 내 머리를 슬슬 쓰다듬고 말했다.

“그럼 가 보마. 즐거운 시간 되거라.”

“전해 주셔서 고마워요!”

“뭐 그 정도 가지고.”

클로드가 방을 빠져나다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바라봤다.

“?”

막 편지를 꺼내다 시선이 느껴져 바라보니, 클로드가 빙긋 웃었다.

“아니, 역시 너는 카르시안을 참 좋아한다 싶어서.”

“……!!!”

순간 얼굴로 열기가 확 몰렸다.?

“조, 조, 좋아……한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람! 난 편지를 꺼내는 것도 잊고 심장이 옮겨 온 듯 둥둥 맥박이 느껴지는 볼을 감쌌다. 손바닥이 화끈할 정도로 뜨거웠다.

“맞잖아. 친구로서 말이야.”

“친.”

……친구?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홧홧하게 올라왔던 열기도 급속도로 식어버렸다.

그렇지, 나랑 카르시안은 친구지.

친구니까 서로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지. 우정이니까.

근데 난 왜, 왜 이렇게 당황했던 거지?

난 클로드가 어딘가 꿍꿍이가 있는 사람처럼 음흉하게 웃는 것도 모른 채 생각에 잠겨 버렸다. 아니, 클로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둥, 둥, 둥, 이상할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으니까.

그 세기는 내 손등에 입을 맞추던 카르시안을 떠올렸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