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 *
수도에 온 이튿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네? 황도 출입 금지령이요?”
“그래.”
이야기를 듣자마자 급히 달려온 건지, 클로드의 머리칼이 젖어 있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 아니. 어떻게 된 일이에요? 1, 2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10년이나 황도에 출입이 금지당하다니요! 제가, 제가 뭔가를 잘못한 건가요?”
심지어 이 결정은 에메르나가 낸 거라고 했다. 그 순간 한 가지 짚이는 구석이 떠올랐다.
“혹시…… 어제 제가 황후궁에 다녀간 것 때문일까요?”
난 어제 아론을 만나, 루니아의 몸에 쌓인 독소를 해독할 수 있는 바람개비꽃 뿌리를 전해 줬다. 그것만 전해 준 게 아니라 돈도 좀 쥐여줬고, 공터에서 잠깐 대화도 나눴다.
혹시 그 이야기가 에메르나의 귀에 들어간 거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에메르나가 ‘나만’ 황도에 들어오지 말라고 일종의 금족령을 내린 것도 이해가 된다.
“글쎄, 확실한 건 무엇 하나 없다. 만약 네가 친황후파 같아서 너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거라면, 나도 같은 명령을 받았을 테니까.”
라움디셀의 가주는 클로드다. 내가 친황후파라면 가주인 클로드도 친황후파일 확률이 높다. 그러니 나만 영지에 묶어 두는 게 아니고 클로드도 허튼짓 못 하게 묶어 둬야 옳았다.
아니, 그렇지만 에메르나 황비는 공작님에게 금족령을 내리지 않을 거야.
왜냐면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클로드와 만날 수 없게 되니까. 그리고 클로드는 아직까지 친황후파라고 생각할 만한 일로 두각을 보이지 않았다.
에메르나 황비는 공작님에게 이상할 만큼 집착하며 모든 행동을 저 좋을 대로 해석하는 버릇이 있어.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멋대로 굴고 있는 거고 공작님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눈 가리고 아웅이라지만 사랑에 미친 여자에게 정상적인 생각을 바라서는 안 되는 법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지난밤, 아카데미에 도둑이 들었다.”
“네? 도둑이요?”
“그래. 안전상의 이유로 외부인 면회도 일절 금한다더군.”
“언제까지요?”
“안전해질 때까지겠지.”
이럴 수가, 기약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야. 아카데미 학생들은 외출 시에도 경비원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던데.”
“그건 감시잖아요!”
내가 외치자 클로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난 입을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가 발아래를 쏘아보며 말했다.
“분명 간밤에 들었다는 도둑도 에메르나 황비님이 하신 일일 거예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흥, 클로드가 고개를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한여름 수도의 하늘은 쨍할 정도로 푸르렀다. 그러나 그 화창한 풍경을 바라보는 클로드의 얼굴엔 어두컴컴한 조소가 어려 있었다. 표정관리가 안 될 정도로 화가 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렇게 화를 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카르시안이 걱정돼요.”
아카데미에 도둑이 들었고, 그로 인해 에메르나 황비의 뜻대로 경비를 강화하게 됐단 말은 이미 아카데미가 에메르나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단 말이나 진배없었다.
아카데미도 손에 올려 두고 문을 닫아 놨는데, 그 안에 있는 카르시안이 안전할 리가 없었다.
원작에서 에메르나는 클로드를 갖기 위해 친자식인 제네스도 죽이겠다 말하는 매정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가 과연 클로드의 아들이라고 마음이 약해져 건들지 못할까? 절대 아니다.
최악의 경우 공작님과 전 부인의 아들이란 이유로 카르시안을 해치려고 할지도 몰라.
그러면, 그러면…….
어제 내게 웃어 주던 카르시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내게서 멀어져,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어젠 그저 애틋하기만 했던 그 장면이 지금은 입을 쩍 벌린 아귀에게로 걸어가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무서운 생각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내가 어깨를 감싸 안자, 클로드가 내 옆에 선 메리에게 눈짓을 했다.
“아가씨. 숄을 좀 걸치세요.”
메리가 내게 숄을 건넸고,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마도구의 바람 세기를 조금 낮췄다. 그러나 내 어깨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만약 카르시안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정말로 내가 어제 황후궁에 다녀갔다는 게 에메르나의 귀에 들어가서 이렇게 나온 거라면, 이 모든 건 다…….
그래, 나 때문이야.
내가 어제 황후궁에 찾아가서, 내가 어제 아론 황자와 만나서.
황후 폐하와 아론 황자에게 너무 섣불리 접근한 걸지도 몰라.
좀 더 조심해야 했는데. 아니, 차라리 나 혼자 다녀올걸. 카르시안은 데려가지 말걸.
그랬더라면 카르시안은 안전했을지도 모르는데…….
난 밤새 손등을 매만지다 잠들었다. 바보처럼.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카르시안이 위험해질 거란 걸 예상해야 했는데……!
쏘아보고 있는 바닥이 돌멩이가 빠진 호수처럼 일렁거렸다. 내 눈에 들어찬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흑…….”
나도 모르게 악다문 잇새로 울음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빨리 생각해야 해.
울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나를 다그쳤지만 그럴수록 눈물만 더 고였다.
쯧, 클로드가 혀를 한 번 차고 입을 열었다.
“편지가 금지된 건 아니니 내가 조심하라 일러두마.”
“하지만…….”
고작 편지로 언질해 주는 것 정도로 될까?
내가 떨리는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자 커다란 손이 내게로 다가왔다. 미지근하고 건조한 손바닥이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네가 굉장히 똑똑한 아이인 것도 알고 그래서 카르시안을 더욱 걱정한다는 것도 알지만, 라티아. 카르시안도 아주 멍청한 놈은 아니다.”
“…….”
“너에 비하면 아직 모자랄 테지만 그래도 녀석은 내 아들이야. 어디 가서 당하기만 할 놈은 아니란 거지. 그러니 걱정 말거라.”
“흑…….”
“게다가 카르시안은 일단 너보다 세 살이 많지 않으냐.”
아카데미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와중에도 제 밥그릇은 제대로 챙겼으니 앞으로도 알아서 잘할 거라며 나를 달래 줬다.
“녀석이 정 미더우면 날 믿거라.”
“흑, 공작……님을요?”
“그래. 내가 누구지?”
“라움, 디셀……의 가주요. 그리고 또 제국의 영웅이고…….”
난 훌쩍거리면서도 열심히 대답했다. 트라이던트 기사단의 주인이기도 하다고 덧붙인 때, 클로드가 낯부끄러운 칭찬은 그만하라며 웃었다.
“그래. 그런 내가 설마 이대로 물러나 잠자코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
씩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그래, 공작님은 라움디셀의 주인이야.
에메르나 황비보다 돈이 부족해, 명예가 부족해, 권력이 부족해, 뭐가 부족해!
에메르나가 아카데미를 장악했다 하더라도 빈틈은 있을 거다. 그리고 클로드는 헥터의 빈틈도 찾아 교화시킨 인물. 바늘구멍 같은 틈만 있어도 승산은 확실히 있다.
난 허겁지겁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마구 쓸려 따끔거려 눈을 찡그리니, 클로드가 또 혀를 차며 내 눈가를 살살 문질러줬다.
“똑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애가 제 눈물은 왜 이렇게 무식하게 닦아.”
그러며 나를 나무라듯 말했는데, 이 말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어쩌면 안심이 된 덕분일지도.
“헤헤…….”
내가 멍청한 웃음소리를 흘리자 클로드가 픽 웃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아니, 걱정하더라도 적당히 해.”
“네, 아니. 아니에요. 걱정 안 해요. 공작님을 믿으니까요.”
“카르시안은 못 믿고?”
“카르시안도 믿고요! 당연히요!”
“그래. 난 네가 알아서 척척 잘 하는 모습을 높이 사고 있긴 하지만 모든 일을 혼자 떠안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길 바라지도 않아.”
“네. 알겠어요.”
난 기운을 차린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에 클로드가 정말인지 살펴보려는 듯 내 얼굴을 뜯어보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거라. 아쉽지만 작별 인사는 어제가 마지막이었으니.”
클로드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제 그게 마지막이었다니. 막 닦았던 눈물이 다시 흐를 것 같아 나는 숨을 골랐다.
“네, 알겠어요. 하지만 편지는 전달된다고 하셨으니까…….”
난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 끝에 앉아 있는 삐로리를 돌아봤다.
“삐릭, 삐로로!”
나와 클로드의 시선을 느낀 삐로리가 저만 믿으라는 듯 높게 지저귀었다. 그 울음소리는 어제, 삐로리가 우리를 데리고 루카오가 있는 공터로 갔을 때와 같아서 더욱 안심이 되었다. ‘나만 믿고 따라와!’ 하는 삐로리를 따라갔더니 정말 원작에 언급되었던 아론의 반려조가 있고, 아론도 만났으니.
클로드가 나가고 나는 곧장 메리에게 편지지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혹시 몰라서 가져와 봤죠.”
앤이 이미 편지지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앤이야!?
어떤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섬세하다. 메리가 얼른 펜을 준비해 줬고, 난 카르시안에게 편지를 썼다. 아쉬운 마음에 편지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한참 뒤, 편지를 봉해서 삐로리에게 건넸는데 불쑥.
앤이 편지지를 몇 장 더 건넸다.
“어? 이건 세이렌의 편지지잖아?”
이제 보니 앤이 건넨 건 그냥 편지지가 아니고 세이렌의 편지지였다. 내가 놀라자 앤이 짧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3년 전에 공작님과 도련님이 주고받던 그 편지지인데, 여분이 남았다기에 제가 받아 놨거든요. 도련님의 편지를 누가 훔쳐보고, 또 이렇게 전서구를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세이렌의 편지지가 더 유용하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세이렌 중에는 삐로리처럼 작은 개체도 있다고 했지?”
지금이야 삐로리 덕분에 바로 편지를 전달해 줄 수 있다지만 우리가 공작령으로 돌아가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삐로리더러 매번 왔다 갔다 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바다가 아니라서 세이렌이 제대로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이렌이 정 힘들다면 다른 새에게 대신 부탁을 해줄지도 모른다.
세이렌도 절반은 새니까 나보단 말이 잘 통하겠지.
“좋아. 일단 같이 보내 놓지, 뭐.”
난 아예 종이봉투를 구해 삐로리의 등에 단단히 묶어 줬다. 삐로리가 몇 번 날개를 퍼덕거려 보더니 안정감이 있는지 날아올랐다.
“그럼 잘 부탁해.”
“삐릭!”
삐로리가 거수경례를 하듯 한쪽 날개를 접었다 펴고는 창문을 통해 아카데미 쪽으로 날아갔다.
여름 하늘이 참 청명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