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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25화 (125/186)

125화

라움디셀 공작 일가를 태운 마차는 아카데미에 멈춰 섰다.

“그럼 잘 가.”

라티아가 마차 계단에 서서 인사했다. 위험하니 안에서 인사하라는 클로드의 말에도 불구하고.

카르시안은 마차 밑에 서서 저를 내려다보며 살살 손을 흔드는 라티아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 물끄러미 바라보는 무덤덤한 표정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 있었다.

제아무리 눈치 없는 라티아라 할지라도 알아볼 정도로 말이다.

라티아가 키득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쉬워?”

“…….”

카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하자니 음흉한 고양이 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클로드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싫었고, 부정하자니 그건 라티아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니까.

‘하지만 내가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라티아는 또 오해하겠지.’

어쩌면 ‘아쉽지 않은데 내가 서운할까 봐 말을 망설이나 봐!’ 따위의 터무니 없는 착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카르시안은 속으로 한숨을 푹 삼키며 말했다.

“아쉬워.”

므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클로드의 입에서 괴상한 웃음소리가 샜다. 힐끔 보니 클로드의 눈이 재밌어 죽겠다는 양 휘어져 있었다.

‘짜증 나…….’

클로드는 카르시안의 마음을 훤히 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카르시안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았다.

“나도야.”

라티아가 곧장 이렇게 말해 줬으니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바로 헤어져야 한다니, 나도 되게 아쉬워.”

라티아가 구두 앞코로 계단을 통통 치며 몸을 꼬았다. 여름의 늦은 저녁이 드리운 시간이었지만 라티아의 얼굴이 조금 발그레해진 게 똑똑히 보였다.

심지어 그냥 아쉬워도 아니고 ‘되게’ 아쉬워였다. 늘 어른스러운 단어를 사용하는 라티아가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은 말투라니!

카르시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말했다.

“손 좀 줘 볼래?”

“손?”

라티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카르시안은 검을 잡아 노란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한 제 손바닥 위에 라티아의 손을 올려 뒀다. 그냥 봐도 작은 크기긴 하지만 손가락이 더 길고, 손바닥이 작아 주먹을 쥐면 더 작아지는 손이었다.

‘항상 바쁜 손이기도 하지.’

이 작은 손은 매일 펜을 쥐고 있었다. 주판을 튕기기도 하고, 손가락을 접어 가며 셈을 하기도 했다. 그뿐인가?

“사격술을 배웠다며.”

“응, 맞아.”

그 덕에 중지 말고 검지에도 살짝 말랑한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했다. 카르시안은 내내 라티아의 작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배울 줄은 몰랐지만…….’

무기술을 배운다고 했을 때, 카르시안은 제가 아카데미로 가면 라티아를 지켜 줄 수 없을 테니 배워 두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사격술일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총은 다른 무기에 비해 작은 편인데도 그 어느 무기보다 강력했다. 단 한 번의 발포로 근육을 뚫고 뼈를 부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원거리 무기여서 사용자가 보다 안전하게 싸울 수 있었고 쉽사리 상대가 다가갈 수도 없었다.

‘꼭 라티아처럼.’

라티아는 늘 그랬다. 카르시안보다 턱없이 작지만 태산처럼 강했다. 상대를 두 손 두 발 들게 하는 재주가 있어, 카르시안은 늘 라티아 앞에선 맥을 못 추렸다. 게다가 쉽사리 다가갈 수도 없는 점도 똑같았다.

‘눈치가 없는 건지, 다 알면서도 곁을 내어 주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내가 싫은 건지…….’

카르시안은 지금 라티아의 나이일 적부터 라티아를 좋아했다. 그러니 ‘어려서 좋아하는 감정을 모른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가설은 하나다.

‘날 그런 상대로 안 본다는 거겠지.’

생각만 해도 혀끝이 쓴 기분이었다.

‘라티아에게 난 그저 가족 같은 존재인가…….’

문득 카르시안은 저들의 관계가 참 애매하단 생각이 들었다.

가족 같지만 진짜 가족은 아닌,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 같은 유대감이 있는, 그러한 것들 때문에 결코 ‘다른 존재’로 보일 수는 없는…….

지난 3년간 카르시안과 라티아는 서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이였지만, 오히려 그게 독이 되었다.

‘아니, 이젠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카르시안이 있던 라티아의 옆자리. 그건 거저 얻은 자리였다.

라티아가 라움디셀로 와서, 라티아의 주변에 또래 남자들이 없어서, 라티아가 친구보단 본인의 일에 더 관심이 많아서…….

하지만 아무리 라티아가 세상을 둔감하게 보더라도 세상은 아니었다. 그녀가 수도로 나오자마자 몰린 이목만 봐도 그랬다.

‘봐, 지금도.’

산들거리는 초저녁의 바람에 드레스가 흔들리는 라티아를 보느라 걸음을 멈춘 꼬마도 있다.

이렇듯 아카데미에서부터 또래 남자아이들은 하나 같이 번들거리는 눈깔로 라티아를 바라봤다. 라티아가 웃으면 저를 향해 웃어 주는 줄 아는 것마냥 실실거렸고, 라티아가 뽀작거리며 걸어 다니면 올빼미마냥 목을 돌려 시선으로 끝까지 쫓았다.

마음 같아선 라티아를 담았던 눈알을 뽑고, 라티아의 목소리를 들었던 고막을 터트리고, 라티아를 보느라 돌아간 목을 꺾어 버리고 싶었다.

상대가 황태자라 해도 그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황태자가 라티아를 황태자비로 두겠다 했을 땐 하마터면 식탁을 엎을 뻔했다. 라티아가 식사를 다 마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걸 달리 말하자면 지금 카르시안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단 소리였다.

“카르시안?”

라티아가 놀란 얼굴로 카르시안을 불렀다.

“아.”

저도 모르게 라티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다. 카르시안이 황급히 손에 힘을 풀었다. 살갗이 약한 손에는 벌써 붉은 자국이 남았다. 카르시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진정해. 조급해하지 말자.’

아직 시간은 있다. 다행히 라티아는 아직도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비록 카르시안에게도 관심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차라리 잘됐다.

‘내가 라티아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남자가 되면 돼.’

그래, 라티아의 첫사랑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보다 행복한 일도 없다. 상상만으로 피식거리는 웃음이 샐 정도였다.

카르시안이 붉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라티아의 손등을 엄지로 문지르며 말했다.

“라티아.”

“응?”

“편지 말이야.”

“……?”

“많이, 서운했어?”

카르시안은 그렇게 물으며 올려다봤다. 라티아는 처음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양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통통한 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사랑스러웠다. 서운했다는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라티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르시안이 날……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내가 싫어져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

“그러니까 괜찮아.”

헤헤, 라티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배시시 웃었다. 때마침 마석으로 만든 가로등이 켜졌다. 창백한 노란빛의 가로등 때문일까?

라티아의 뽀얀 얼굴이 더욱 환하게 보였다. 저를 똑바로 보며, 보라색 눈에 저를 한가득 담고 웃는 라티아의 얼굴이.

이제 막 목젖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카르시안이 목울대를 울렸다.

“라티아는 내가…… 널 싫어하는 게 싫어?”

이건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카르시안은 말을 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싫어하는 게 싫냐니, 이 무슨 말도 안 되고 창피한 말인가!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워졌지만, 동시에 궁금했다.

‘내가 싫어해도 아무렇지 않은지. 아니면 싫은지…….’

카르시안의 눈동자가 조금 떨렸다. 그런데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가로등 때문에 라티아의 얼굴이 환하게 보이는 만큼 그의 얼굴도 잘 보인단 점이었다.

라티아는 제 대답을 기다리느라 긴장한 카르시안의 소년미 흐르는 얼굴을 보다 입을 열었다.

“응. 싫어.”

“…….”

“카르시안이 날 싫어하는 건 싫어.”

“…….”

“엄청 싫어.”

심지어 고개까지 도리질 친다.

몇 번이고 싫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카르시안은 문득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라티아가 진심으로 싫다고 한 건 처음이네…….’

라티아는 그간 카르시안이 뭘 하든, 어떻게 하든 결국엔 좋다며 따라줬다.

‘후작저에서 날 괴롭혔던 것 때문이겠지.’

그런 라티아에게 진심으로 싫다는 말을 듣다니.

‘기분 좋아.’

좋다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니고 싫다는 말을 들은 건데. 한두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이나 들은 건데 어떻게 이다지도 기분이 좋을 수 있는 건지!

씰룩거리며 올라간 입꼬리가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카르시안은 제 숨겨지지 않는 미소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는 카르시안의 새까만 겨울 바다 같은 검은 머리칼만 보였다.

“!”

그 순간 라티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고개를 숙인 카르시안이 그대로 라티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라티아는 물론이고, 내내 음흉한 듯 흐뭇한 표정으로 관전하고 있던 클로드 또한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카르시안은 마치 찜이라도 하듯 라티아의 손등에 입술을 진득하니 꾹 눌렀다가 뗐다. 그리고는 문신을 새기듯 입술을 내리눌렀던 곳을 엄지로 문지르며 말했다.

“자주 와. 보고 싶었으니까.”

“…….”

“엄청.”

라티아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할 말은 많았는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심장이 너무 세고 빨리 뛰어, 입을 열면 이대로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또 보자.”

카르시안은 그런 라티아에게 다정하게 웃어 준 후 몸을 돌려 아카데미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라티아는 컴컴해진 아카데미 안으로 사라지는 카르시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라티아?”

이제야 시간을 멈춘 마법이 풀린 듯, 내내 얼어붙어 있던 클로드가 그녀를 불렀지만 라티아는 여전히 카르시안이 사라진 쪽만 바라봤다. 이내 그녀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응, 또 봐.”

심장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목을 잠그기라도 한 건지, 꽉 막힌 목소리가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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