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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24화 (124/186)

124화

허공에 아무런 연고 없이 뜬 글자 때문에 아론은 깜짝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이게 대체…….”

아론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다 제 목덜미에 머리를 부비는 루카오의 목덜미를 긁어 줬다. 펜던트가 잘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르시안의 뒤에 숨겨졌던 라티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앗, 놀라지 마세요. 이건 동물어 번역 펜던트라는, 예리엘 만물 상단에서 취급하는 메인 상품입니다. 예리엘 만물 상단주가 보증을 한 제품이고요.”

“동물어 번역기?”

“네. 동물과 간략한 대화를 하게 해 주는 마도구예요. 제 반려조도 3년 넘게 사용하는 제품이니 안전 문제는 걱정 없어요.”

이제 보니 라티아의 어깨에 앉아 있는 은백색 몸통에 꽁지깃만 붉은 새의 목에도 같은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루카오에겐 좀 작은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라티아의 반려조에겐 딱 맞았다.

‘이게 바로 예리엘 만물 상단의 물건이란 말이지…….’

아론은 상업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루니아가 몸져눕고 폐태자가 되어 반쯤 방치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해서, 아직 어리고 힘없는 그가 예리엘 만물 상단과 접촉할 기회는 전무했다.

‘신기하다. 과연 예리엘 만물 상단이야. 마도구를 메인 상품으로 판매하다니…….’

아론은 속으로 연신 감탄하며 루카오의 목에 매달린 유리구슬 같은 펜던트를 요리조리 돌려봤다. 그러다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황급히 제 손을 내려다봤다.

거기엔 아까 루카오가 뱉은 생뿌리가 있었다.

“잠깐, 동물어를 번역한 펜던트라는 말은…… 방금 루카오가 말한 게 사실이란 뜻인가?”

루카오는 분명 이 뿌리만 있으면 황후 폐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게 정말이란 말인가?

아론의 얼굴에 의심과 기대감이 교차했다. 그에 라티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물론 확실하진 않아요.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으실 거예요.”

확실하진 않다니. 아론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른거렸다. 게다가 ‘시도해 볼 가치’라니, 상대가 누군 줄 알고 검증되지도 않은 실험을 한단 말인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아론의 눈가에 약간의 노기가 어렸을 때, 라티아가 아론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 순간 하늘하늘한 여름날의 저녁 특유의 바람이 불어오며 라티아의 머리칼을 가볍게 흩트려 놨다.?

“핫……!”

그 모습은 꼭 어린 모습의 루니아가 초상화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 같아, 아론은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티아는 그의 지척에 서서 소곤거렸다.

“제 친부였던 글라델리스 후작이 치부책을 보면서 중얼거린 소리를 들었어요.”

“……!”

비록 아론이 끈 떨어진 인형 신세라고는 해도 귀가 막힌 건 아니었다. 악명 높은 글라델리스 후작 일가에 대한 이야기는 그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글라델리스 후작이 귀족들의 약점을 모아 놨다는 치부책에 대한 소문 또한.

“거기에, 거기에 정말 이 뿌리를 쓰면 어머니, 아니. 황후 폐하께서 낫는다고 적혀 있었단 말인가?”

“제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요.”

하마터면 적혀 있었다고 대답할 뻔했다. 치부책에 이런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고, 라티아는 황제에게 치부책에 대해 모른다고 증언한 상태니 조심해야 했다.

라티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 산수 능력을 인정받아 제2 관리자로 글라델리스 후작과 함께 일했어요.”

그러니 똑똑히 들었다고 덧붙였다.

글라델리스 후작의 이름이 나오자 라티아를 의심했던 아론의 눈빛이 색달라졌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네. 약 효과가 잘 들 경우를 대비해서 넉넉히 드릴게요.”

어디 뿌리를 숨겨 둘 곳이 없냐는 라티아의 말에 아론이 나서기도 전에, 그의 팔뚝에 앉아 있던 루카오가 퍼드득 날았다. 따라오라는 듯 작게 우는 소리에 라티아를 비롯한 세 사람은 루카오의 뒤를 따랐다.

숲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끼가 덮인 작은 샘가를 발견했다.

“여기라면 뿌리를 싱싱하게 보관할 수 있겠어요.”

라티아는 곧장 가방에 손을 집어넣고 최상급 바람개비꽃 뿌리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론은 기껏해야 한두 뿌리일 줄 알았건만, 라티아의 손은 쉬지 않았다.

“휴우. 다 꺼냈다.”

자그마한 가방에서 나온 바람개비꽃 뿌리의 양은 상당했다. 근처의 이끼를 거둬 바람개비 꽃 뿌리를 잘 숨긴 라티아가 헤헤 웃으며 아론을 돌아봤다.

“아, 이 가방에도 마법이 걸려 있거든요.”

“그……렇군.”

“참, 그리고 이거요.”

라티아는 샘물에 작은 손을 찰방찰방 닦고 다시 아론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그리고는 한계가 없는 건지, 가방에서 또 뭘 꺼내 아론에게 건넸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돈이 있으면 꽤 많은 것들이 해결되더라고요.”

라티아가 건넨 것은 금화가 두둑이 든 주머니였다.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돈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그걸 해결할 만큼의 돈이 없었던 거라는 말이요.”

라티아는 재치 있는 말을 하듯 씩 웃었지만 아론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야 재미있는 말이기는 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열 살짜리 소녀가 아니라면 말이지.’

아론은 어쩐지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 번 짚었다.

“지금 네가 누구에게, 뭘 줬는지에 대한 자각은 있는가?”

“그럼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의 장자에게 용돈을 드렸죠.”

“그럼 이게 황족 모독죄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겠지?”

아론의 물음에 라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빤한 시선만 보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실 거잖아요.’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읽히는 시선이었다. 루니아를 닮은 탓일까? 아니면 저 보라색 눈동자에 어떠한 마력이 있기 때문인 걸까?

아론은 입을 꾹 다물고 라티아가 건넨 돈을 받았다. 사실 거절하고 싶어도 라티아가 건넨 금화의 무게는 자존심도 숙이게 만들 정도긴 했다.

‘이 돈만 있으면 지금 겪고 있는 생활고나 대외 활동비 자금 부족 현상도 타파할 수 있을 테지.’

황후와 그녀의 아들이 생활고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같겠지만 사실이었다. 에메르나가 황후궁의 예산을 대폭 삭감해 버렸으니까.

정치적인 이유로 시녀들도 그만두거나 에메르나 쪽으로 돌아섰다. 돈이 없으니 주인이 주는 콩고물을 중요하게 여기는 하녀나 시종들이 불손해지는 건 당연했다.

‘언제까지 외가에 기댈 수도 없어.’

아론의 외가 또한 에메르나 때문에 이런저런 부분에서 고초을 겪고 있었다. 또 아론이 예리엘 만물 상단의 대표 상품을 몰랐던 이유도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상인들 사이에선 돈이 곧 권력인 법이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입이 다물린 건 아니다.

“만약 내게 영애 같은 동생이 있었다면 꽤 골치 아팠을 거야.”

아론의 말에 라티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애’라니! 이 호칭은 라티아를 라움디셀의 객식구가 아닌 한 명의 귀족으로 인정한다는 뜻임과 동시에 라티아에게 황족 모독죄를 묻지 않겠단 소리였다.

“헤헤, 그랬을까요?”

이 모든 걸 알아들은 라티아가 헤실헤실 웃자, 아론이 픽 웃었다.

“동생에게 금전 도움을 받는 오빠라니. 자존심은 좀 상하겠지만…….”

아론이 천천히 라티아의 얼굴을 살펴봤다. 천진난만하면서도 계산속이 치밀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친동생도 아닌데 괜히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이 어린 소녀가 저렇게까지 어른스러워질 때까지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어서.

표정도, 생각도, 하다못해 사용하는 단어마저도 보통의 10살과는 너무 달라 위화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라티아는 이렇게 되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라티아는 3년 전 엘레네와 함께…….

‘우습군. 내 코가 석 자인데 남을 동정하다니.’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아론이라고 해서 14살, 제 나잇대를 누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아론은 생각을 정리하고 질질 끌고 있던 말이나 마저 잇기로 했다.

“그래도 무척 좋았을 거야. 매일이 즐거웠겠지.”

어쩌면 우리 둘 다 지금보단 덜 어른스러웠어도 될지도 모르고.

아론은 생각했지만 굳이 소리 내서 말하진 않았다.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니까.

세 사람은 다시 공터로 나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저 뿌리와 돈을 준비한 걸 보니, 우연히 이 황후궁을 찾은 건 아닌 모양인데.”

처음부터 제가 목적이었냐 묻는 아론의 말에 카르시안과 손을 잡고 걷던 라티아가 헤헤 웃었다.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어요.”

라티아가 그 뒤로 황후 폐하께서 꼭 쾌차하셨으면 좋겠다, 황자 저하도 항상 건강하셔야 한다 등 황후 세력을 자처하는 말을 종알거렸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은 아론의 귀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왜냐면 조금 전부터 아론의 시선은 카르시안의 손가락 몇 개를 꼭 잡고 있는 라티아의 작은 손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저렇게 손을 꼭 잡고 있는 거지? 라움디셀 가문은 후원자일 뿐이라고 들었는데?’

마뜩찮은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카르시안이 질투가 나진 않았다.

‘라움디셀 공자가 부럽다기보단 좀 더 묘한…….’

아, 그래. 카르시안이 괘씸했다.

라티아는 오늘 처음 만난 소녀인데도 불구하고 언감생심 감히 라티아와 친근하게 손을 잡고 그런 그녀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보는 표정이 아니꼬웠다.

‘어머니의 어릴 적 모습과 많이 닮아서 그런가…….’

꼭 가족을 빼앗기는 것 같았다.

아론과 라티아는 가족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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