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23화 (123/186)

123화

삐로리가 들어 있는 이 가방엔 사실 최고급 바람개비꽃 뿌리가 담겨 있다.

원래는 나중에 공작님이 황성으로 향할 때 따로 부탁드리려고 구해 둔 거지만, 우연찮게 내가 황성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잖아. 그럼 내가 들고 와야지.

황후에게 한시라도 빨리 해독약을 주고 싶었다.

내 말에 클로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가늠해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미심쩍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내 요청을 허락해 줬다.

“그래, 황후궁의 정원이 가장 아름답다지. 카르시안과 함께 다녀오거라.”

“공작님은요?”

“글쎄.”

클로드가 별생각 없다는 양 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번에 같이 가서, 미리 황후와 안면을 트게 할까 싶었는데!

내가 얼른 말하려는 때였다.

“사람들 시선이나 돌려 둘까.”

클로드가 픽 웃었다. 순간 난 아차 싶었다. 우린 방금 레오나르도와 식사를 했지만 그의 곁을 지킨 이는 황후가 아니나 황비다. 또 내가 황태자비가 될 수도 있단 소문이 돌고 있으니, 우릴 친황비파로 보고 있을 터.?

그런 와중에 내가 황후궁을 찾는단 소문이 퍼지면…….?

그럴 경우 예상되는 갈래는 두 가지다.?

하나는 라움디셀 공작가는 정말 끝내주는 중립을 서고 있다.

남은 하나는…….

“아직 황후 폐하의 세력이 다한 건 아니니 말이다.”

라움디셀은 황비를 버리고 황후로 돌아섰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황후를 찾는단 게 클로드에게 어떻게 비쳤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까 공작님이 왜 나를 가늠하듯 보았는지 이제 알겠다.

과거 에메르나의 구애를 받았던 클로드는 그녀와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만찬 때에도 클로드는 에메르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에메르나는 그런 클로드의 시선을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레오나르도가 주의를 주자 입을 다물었다.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 보아 클로드는 이미 반황비파란 소리가 된다. 이런 와중에 내가 모든 것을 알고 황후궁으로 가겠다고 말한 건지 확인하려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클로드가 말한 이 말.

‘아직 황후 폐하의 세력이 다한 건 아니니 말이다.’

이건 객관적인 사실이나 바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클로드의 뜻은 조금 다를 것이다.

공작님은…… 친황후파구나.

내게 자신은 이미 황후파이니, 껄끄러워하지 말고 마음껏 구경하다 오란 소리였다!

흐아!

속으로 가쁜 숨을 뱉었다. 황성에 들어와서 그런지, 정치가 엮여서 그런지 클로드의 생각을 알아차리는 게 더 어려워졌다. 독심술 능력이 통하지 않는 게 이토록 불편한 일이던가! 그나마 원작 덕분에 클로드와 에메르나의 과거를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시치미를 뚝 떼고 웃었다.

“네, 알겠어요! 그럼 카르시안이랑 다녀올게요!”

그리고는 카르시안의 손가락을 꼭 잡았다. 물론 그렇게만 말하고 등을 돌린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루안 상단주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흰뿔 산이 폐하를 지켜 드릴 거다.’라고.”

클로드가 내게 자신은 친황후파란 패를 까 보였으니, 나도 그에게 내 생각을 조금 알려 줘야 했다. 클로드는 내 말을 듣고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내 씩 웃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비록 짧은 말이었지만 남주의 아버지인 그라면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와 친한 그루안 상단이 황후의 뒤에 섰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바람개비꽃 뿌리를 대량으로 구매했단 소식도 이미 클로드의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궁금하셨겠지, 내가 왜 갑자기 잡초나 다름없는 바람개비꽃 뿌리를 왕창 구매했는지.

그리고 조금 전, 내가 한 말로 인해 모든 퍼즐이 맞춰졌을 것이다.

‘그루안 상단이 갑자기 흰뿔 산을 위해 움직인 건 그곳에서만 자라는 바람개비꽃 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시한 사람이 그 뿌리를 대량으로 구매한 ‘나’라는 것을.

카르시안과 함께 황후궁으로 향하는 내 등 뒤에서, 클로드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투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군.”

아주 만족스러운 목소리였다.

* * *

“피이이익…….”

높고 푸른 여름 하늘에선 거대한 새가 활공하고 있었다. 그 새는 사냥을 하려는 것처럼 같은 자리를 느릿하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는데, 새의 주인은 알고 있다.

‘친구가 왔나?’

저건 그저 반가운 이를 맞이하기 직전의 암시라는 것을.

새의 주인은 하늘을 높게 올려다보다,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 끝이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황후궁이었다.

“황후 폐하께 내가 왔다 일러라.”

“예, 황자 저하.”

새의 주인이자 익숙한 걸음으로 황후궁에 도달한 소년, 그는 바로 폐태자 아론이었다.

아론이 방문했단 소리에, 황후인 루니아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고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오셨습니까, 황자.”

“황후 폐하. 오늘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꾸벅 인사한 아론이 자연스럽게 루니아의 곁에 있는 의자로 향했다. 아이리스의 손에 책이 들린 것으로 보아, 책을 읽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주 좋아요. 황자를 보는 데 나쁠 수가 있나요.”

“매일 오늘 같았으면 좋겠네요.”

루니아가 다정하게 웃으며 아론에게 손을 뻗자, 아론은 그녀의 손을 맞잡고 손바닥에 제 뺨을 기댔다. 루니아는 애교를 부리는 아들을 귀여워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까아아악!”

밖에서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앗.”

깜짝 놀란 루니아의 어깨가 크게 요동쳤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폐하!”

아론과 아이리스가 얼른 루니아를 살폈다. 놀란 탓에 심장에 무리가 갈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루니아는 금방 진정했다.

“난 괜찮습니다.”

루니아가 가슴을 짚으며 숨을 토해 냈다. 어느새 그녀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황후궁에서 저렇게 큰 소리를 내다니!’

아론은 자신의 새에게 화가 났다. 몇 번이나 주의를 줬고, 새도 알아들은 건지 그간 잠잠했기 때문이었다. 아론이 화난 얼굴로 창밖을 쏘아보자, 루니아가 아론의 손을 잡았다.

“아론. 루카오에게 너무 화내지 마세요.”

루카오, 그것은 아론이 아직 황태자가 되기 전 그가 주워 온 새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루카오 때문에 폐하께서 놀라서…….”

“그렇지만 저는 괜찮잖아요. 전 오히려 루카오가 걱정이 됩니다. 다른 흰머리수리와 다르게 참 다정하고 착한 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소리를 지른 건지.”

“제가 보고 오겠습니다.”

“그래요. 너무 나무라지 말고요.”

루니아의 다정한 말에도 루카오를 향한 아론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론이 루카오를 혼냈단 소식이 루니아의 귀에 들어가면 슬플 테니, 화를 내진 않을 것이다.

아론은 곧장 루카오가 소리를 빽 질렀던 정원 쪽으로 향했다.

‘친구랑 싸웠나?’

그렇다면 나가서 싸울 것이지,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루카오, 루카오!”

아론이 정원수를 헤치며 평소 아론이 황후궁으로 향할 때마다 루카오가 지내던 공터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엔 이미 선객이 있었다.

“……라움디셀 공자?”

그들은 다름 아닌 카르시안과 라티아였다. 아론은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여길…….”

왜냐면 이 공터는 황후궁에 있었고, 또 우거진 정원수들 사이에 있기에 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아론과 루카오만의 비밀 장소라고 할 법도 한데, 이곳에 왜 저들이 있는 걸까?

“끄르륵.”

아론을 본 루카오가 반가운 표정으로 커다란 검은색 날개를 퍼덕거리며 뛰어왔다. 실내에서 키워서 이런 버릇이 남은 것이다. 하지만 아론이 손을 내밀자, 루카오는 기다렸단 듯 그의 팔뚝에 올라섰다.

“끅, 끄르륵.”

정원에서 고양이와 지내더니 골골거리는 방식을 배운 루카오가 아론에게 애교를 부렸다. 루카오는 제 무게가 아론에게 무리가 되지 않도록 여전히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는데, 그런 루카오의 부리에 뭔가가 있었다.

“뭘 먹고 있었어?”

아론이 손을 내밀자, 루카오는 기다렸단 듯이 그의 손에 물고 있던 걸 놓았다.

“……뿌리?”

아론이 의아하단 듯 눈가를 찌푸리자, 루카오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고는 가만히 서 있는 카르시안과 라티아 쪽을 돌아봤다. 아론도 루카오를 따라 두 사람을 바라봤는데, 카르시안과 라티아가 공손히 인사했다.

“아론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아론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삐르륵.”

라티아의 어깨에 앉아 있던 흰 새도 인사를 하듯 한쪽 날개를 펼치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론은 그들의 인사를 받고, 저도 인사를 해야 한다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 니?’

아론의 시선은 온통 저를 보며 잔잔하게 웃고 있는 라티아에게 못 박혀 있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여름 햇살에 부서지는 것 같은 밀빛 머리칼, 그 햇빛 때문에 색이 조금 옅어진 보라색 눈동자, 동그란 뺨과 자애로운 미소.

‘초상화로 봤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과 똑같아…….’

라티아가 황후, 루니아의 어린 시절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아론은 저도 모르게 입까지 헤 벌리고 라티아를 봤다. 하지만 그것도 옆에서 눈썹 끝을 꿈틀거리다, 라티아의 앞으로 나선 카르시안 때문에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보아하니 이곳은 황자 저하의 사적인 공간인 모양입니다. 허락 없이 들어온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카르시안이 다시 공손하게 인사했다. 아론은 카르시안 덕분에 라티아가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아니. 괜찮다. 여긴 황후궁 정원의 일부이니까. 그런데 왜 그대들이 여기에…….”

거기까지 말한 아론은 오늘 레오나르도와 에메르나가 라움디셀 공작 일가와 함께 만찬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황후인 루니아가 아닌, 황비인 에메르나와 함께. 아론은 입을 다물고 이를 까득 갈았다.

‘망할 남자…….’?

제 어머니를 방치하는 레오나르도를 아버지라 부르기도 싫었다. 아론의 볼 근육이 불거졌을 때였다.

[아론, 아론! 기쁜 소식이야. 이 약초만 있으면 황후 폐하를 낫게 할 수 있대!]

허공에 글자가 떴다. 출처는 루카오의 목에 묶인 펜던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