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제네스의 말은 만찬장에 폭풍을 몰고 왔다.
“그게 무슨…….”
어찌나 큰 폭풍인지 레오나르도가 겨우 입을 열었으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폭풍을 불러일으킨 제네스는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 나름대로는 라티아를 눈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말이다.
클로드는 물론이고 에메르나와 당사자인 라티아조차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을 때였다.
“……안 돼.”
라티아의 옆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수만 년 얼어붙어 있던 빙하가 쩌적 하고 갈라지는 소리처럼 소름 끼치기도 했다. 묵직하면서도 작은 소리였지만 사람들의 귀를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만찬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을 꽉 주먹을 쥐고 있는 카르시안이었다.?
그는 모두의 시선이 저를 향한 것이 오히려 잘됐다는 양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카르시안의 표정은 너무도 엄숙해서, 꼭 신성한 선언문을 읽은 사람 같았다. 카르시안의 표정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흔들리고 있는 시선들은 카르시안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것뿐이었다.
“카, 르시안…….”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입술을 잘게 떤 라티아를 포함해서 말이다.
‘저게…….’
제네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를 담고 있던 보라색 눈동자가 돌아간 것도 싫은데, 곧장 카르시안을 부르다니. 다시 라티아의 주의를 뺏어와야 했다.
제네스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대체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설마 황태자인 내가 황태자비를 간택하겠단 말에 부정하는 건 아니겠지.”
제네스의 경험상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된다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황제 다음으로 권력이 높은 황태자였으니까. 하지만.
“네.”
카르시안은 당당히 황태자의 말을 부정하겠노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 제네스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뭐, 라고?”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네. 황태자 전하께서 라티아를 황태자비로 들이시는 건 안 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부정하니, 제네스는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 심지어 안 된다고 말하는 그 말투도 상당히 정중했다. 제네스를 똑바로 쏘아보는 붉은 눈동자가 아니었더라면, 충언이라도 하는 줄 알 정도였다.
“너…….”
“안 됩니다.”
“…….”
“절대로.”
몇 번이고 안 된다 말하는 카르시안의 표정은 정중한 말투와 달리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카르시안은 조용히 분노하고 있었다. 제네스가 감히 라티아를 제 배필로 맞이하겠다 선언한 것에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말이다. 제네스는 기가 찼다.
“왜?”
대체 그가 뭐라고 라티아를 황태자비로 들이겠단 저를 반대한단 말인가??
제네스가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남매 같은 사이라 들었는데, 그래서 반대하는 거라면―”
“그래서 반대하는 거 아닙니다.”
카르시안이 제네스의 말허리를 뚝 잘랐다.
“……뭐?”
제네스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하지만 카르시안이 제 말허리를 끊어 화가 나는 것보다 여태 뚫린 입이라고 잘만 떠들어 대던 카르시안이 입을 딱 다문 이유가 조금 더 궁금했다.
‘어디,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들어 보기나 하자고.’
시답잖은 이유라면 여기서 그의 의견을 묵살하고 라티아를 가지면 될 일이다.
‘그럼 뒷말도 없겠지.’
그래서 제네스는 드물게 참을성을 갖고 카르시안이 반대한 이유를 말하길 기다렸으나.
“……이렇게 말씀드릴 이유는 아닙니다.”
그 내용은 간신히 이어지고 있던 제네스의 인내심의 끈을 뚝 끊어 놓기 딱 좋았다.
“지금 그따위 말을 하려고 황태자인 내 말을 끊……!”
제네스가 이를 빠득 갈며 짓씹은 때였다.
“황태자.”
“진정하세요.”
여태 잠자코 있던 레오나르도와 에메르나가 그를 말렸다.?
‘……?’
제네스가 놀라 입을 다물었다. 왜냐면 그간 두 사람은 제네스가 뭘 하든 단 한 번도 반대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연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 사랑하는 아들, 황태자……. 레오나르도와 에메르나가 제네스의 손을 들어 줄 이유는 많았다.
그런데 지금 레오나르도와 에메르나는 동시에 제네스를 막아섰다.
“별것도 아닌 농담에 너무 과열된 것 같군.”
“호호호, 제 마음이 폐하의 마음이랍니다. 라움디셀의 아가씨라니, 누구든 원하는 일등 신붓감 아니겠어요?”
심지어는 제네스의 말을 ‘농담’이라 치부하고, 제네스가 라티아를 원한다는 마음을 ‘누구나 원하는’ 당연한 것이라며 아예 정리를 해 버렸다. 제네스는 당황스러웠다.
‘왜……? 왜 내 편을 들어 주시지 않는 거지?’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제네스를 둔 채, 어른들은 다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하지만 훗날 이 하이페디움 제국에서 제일가는 영애가 될 건 분명한 사실이지.”
“이 에메르나 또한 그렇게 생각해요.”
클로드가 웃으며 겸손을 떨자 레오나르도와 에메르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덕분에 잠시간 얼어붙었던 냉랭한 공기가 다시 화기애애하게 녹았다. 그 속에서 홀로 얼어붙어 있는 이는 제네스뿐이었다.
결국 제네스의 ‘황태자비 선언’ 사건은 이렇게, 소득은커녕 아무런 영향력 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만찬이 끝나고, 황제는 모두와 악수를 나눴다. 그건 라티아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클로드, 카르시안에 이어 마지막으로 그와 악수를 했다.
“다시 볼 수 있어서 기뻤다.”
“굉장히 영광된 자리였습니다, 폐하.”
레오나르도의 단단하고 큰 손을 제대로 잡지 못해, 손바닥끼리 마주하는 게 고작이었으나, 두 사람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손까지 흔들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래.”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클로드와 카르시안은 다시 한번 황실 일가를 향해 인사를 하고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그런 클로드를 에 젖은 얼굴로 보던 에메르나가 뒷짐을 지고 선 레오나르도에게 말했다.
“저희도 이만 일어나 볼까요, 폐하?”
“음. 먼저 가도록 해. 황태자와 나눌 대화가 있지 않나.”
레오나르도의 날 선 눈빛이 제네스에게 닿았다. 황제, 황비와 상의도 없이 공작가의 일원을 황태자비로 맞이하겠다 선언한 걸 말하는 터였다.
에메르나는 조금 전, 제네스의 독단 때문에 레오나르도가 단단히 화가 났단 걸 깨달았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것처럼 느껴졌을 거야.’
황태자비 간택은 황태자의 배필을 결정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차기 권세를 고르는 일이기도 했다. 황태자가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독단적으로 결정하다니! 레오나르도의 심기가 불편할 만했다.
“하면…….”
에메르나는 레오나르도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제네스와 함께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내 곁에서 떨어진 시간이 길수록 머리만 아플 테니, 늦지 않게 찾아오겠지.’
제네스를 향한 레오나르도의 노여움은 그때 풀어도 되리라. 에메르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가 뭘 잘못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따위의 소리나 하는 제네스와 함께 황비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날, 새벽이 다 되어 가도록 레오나르도는 에메르나의 황비궁을 찾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새벽을 틈타, 몰래 황후궁으로 향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아무도 몰랐다.
* * *
난 확신했다.
내가 혹시 몰라 챙겨 온 이 바람개비꽃 뿌리에 숨겨진 효능이 있단 것을.
사실 만찬을 갖는 내내, 저번에 레오나르도가 보여 준 모습과 오늘의 모습이 너무도 다른 게 의아했다.
대체 왜? 왜 저렇게 달라졌을까?
고심하던 내가 다다른 결론은 하나였다. 그루안 상단에서 만났을 때와 지금, 달라진 건 오로지 ‘바람개비꽃 뿌리 차의 유무’였다. 그래서 난 도박을 걸어 봤다.
“다시 볼 수 있어서 기뻤다.”
“굉장히 영광된 자리였습니다, 폐하.”
레오나르도와 악수를 하는 척, 그의 손바닥에 슬쩍 바람개비꽃 뿌리 하나를 얹어 준 것이다.
원작에서 허무하게 죽긴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결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허무하게 죽는 원작에서조차 레오나르도를 두고 ‘왕관을 머리에 얹고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남자’라 말했다. 왕관의 무게를 버티는 것으로도 모자라 받아들인 자에게 무척이나 어울리는 묘사였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선 내가 몰래 준 이 뿌리에 대해 알아볼 거야.
무모한 작전이긴 했지만, 나에겐 이상한 확신이 하나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절대로 날 해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 그리고 그루안 상단에서 봤던 모습이 ‘진짜 모습’일 거라는 기묘한 확신.
그것들은 어쩌면 제네스가 나를 황태자비로 들인다 했을 때, 레오나르도가 지었던 표정이 클로드와 똑같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슨…….’
그때 레오나르도가 지었던 표정은 황제와 상의도 없이 멋대로 중대사를 결정한 황태자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딸에게 수작질을 거는 불한당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카르시안이 ‘안 된다’며 반대했을 때, ‘호오, 저것 봐라.’ 하듯 이채가 도는 눈빛으로 카르시안을 봤다.
어떻게 보면 황태자에게 하극상을 일으킨 건데도!?
그럼에도 레오나르도는 카르시안을 흥미롭게 봤다. 그 또한 ‘내 딸의 옆에 서려면 저 정도 깡은 있어야지.’ 하는 것 같아, 나는 내 일인데도 주변인의 반응을 살피기 바빴다.
그래서 도박을 했던 거다. 레오나르도에게 바람개비꽃 뿌리를 직접 주는 도박을.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후회가 되진 않을 것 같다.
곁에 선 카르시안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래? 자유롭게 정원을 구경해도 된대.”
“아, 그럼 꼭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
내 말에 앞서 걷던 클로드가 시선을 보냈다. 난 그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황후궁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