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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21화 (121/186)

121화

“그간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라움디셀 공작령의 성장세는 두려울 정도…….”

“과찬입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라티아는 클로드가 에임브시아 백작과 대화하는 소리를 들으며 크로스백을 슬쩍 매만졌다.

“삐릭…….”

마법으로 용량을 늘린 가방에 숨어 있는 삐로리가 작게 꽁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참아. 금방 도착한대.”

마법이 걸려 있어 답답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가방 속보단 밖이 나으리라. 라티아가 달래 주자 삐로리도 하는 수 없다는 듯 투덜거림을 멈췄다.

기실 황성에 들어갈 땐 가방을 벗는 게 예의지만, 그건 시종을 대동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황제의 영접은 예정에 있었지만, 오늘 만찬에 초대된 건 좀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황성에 출입 가능한’ 시종을 미처 데려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이 가방을 챙겨올 수 있었지.’

라티아는 가방에 삐로리를 담았다. 삐로리를 데려올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째선지 삐로리가 저도 가고 싶다고 떼를 썼다.

‘삐로리가 떼를 쓰다니, 이상한 일이야.’

라티아는 하는 수 없이 클로드의 허락을 받고 삐로리와 함께 온 것이었다.

‘사실 난 공작님이 아무리 삐로리라 하더라도 안 된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제아무리 친한 반려 동물이라지만 삐로리는 결국 새다. 새를 멋대로 황성에 숨겨 데려간다니, 들키면 큰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클로드는 “삐로리가?” 하고 한 번 되묻기만 할 뿐, 라티아에게 흔쾌히 허락해 줬다. 라티아는 의아했지만 삐로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클로드로서는 오히려 반대할 이유가 없던 것뿐이었다.

‘어련히 뜻이 있겠지.’

다른 건 몰라도 삐로리는 절대로 라티아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거면 됐기에, 클로드는 뒤에서 라티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크로스백을 매만져도 나른히 웃어넘기기만 했다.

* * *

만찬의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이 좋은 분위기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은 위화감에 눈살을 찡그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라티아였다.

‘뭔가 이상해. 저번에 뵈었던 폐하가 아닌 것 같아.’

지난번 만남에서, 레오나르도는 라티아에게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그녀가 귀여워 죽겠단 표정으로 바라보는 둥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라움디셀 공작령에서 추수하는 밀은 품질이 굉장히 뛰어나서…….”

“지난번, 공작이 진상했던 총과 마법탄을 만든 대장장이를 직접 만나고 싶은…….”

“해군으로 편성한 트라이던트 해적단들의 위상이 대단하여…….”

레오나르도의 관심사는 오로지 클로드와 나누는 정치적인 이야기뿐이었다.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한데…….’

이 자리는 제국의 황제와 제국의 영웅이 모인 자리다. 그러니 정치적인 이야기가 주가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렇지만 나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으시다니.’

심지어 라티아는 오늘 ‘헤바테인’을 들고 아카데미를 활보했다.?

‘황제 폐하껜 아직 이 소문이 닿지 않은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헤바테인’은 황제가 하사한 물건인 만큼, 황제에게 수도에 가노라고 연락을 취한 수도행에 빠트려선 안 되는 물건이다. 그러니 당연히 라티아가 ‘헤바테인’을 들고 왔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터.

‘하다못해 안부 인사라도 한 번 건넬 줄 알았는데…….’

레오나르도는 라티아를 처음 본다는 듯이, 또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는 듯 굴고 있었다.

이 의문에, 음식을 먹는 라티아의 손길은 천천히 느려지고 있었다. 그런 라티아를 본 카르시안이 빵을 찢으며 물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응? 아, 아니. 아니야. 아주 맛있어.”

“그런데 왜 죽상이야.”

카르시안이 힐긋 라티아 쪽에 시선을 줬다. 라티아는 아직도 새 모이만큼 쪼아먹은 상태 그대로였다. 평소 같았으면 조금 더 먹었거나, 하다못해 빵을 찢어 가방 속에서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삐로리에게 먹여 줬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나?’

카르시안이 그녀 대신 삐로리에게 빵을 먹여 줬다. 삐로리는 딱따구리라도 된 것처럼 빵을 열심히 쪼아 먹었다. 그 모습을 본 라티아가 내내 굳혔던 뺨을 풀며 이제야 흐릿하게 웃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냥, 긴장해서 그런 것 같아.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긴장하지 마. 뭐라고 긴장해.”

카르시안이 픽 웃으며 손에 묻은 빵가루를 털었다. 그는 황제와의 만찬 자리보다 라티아가 저녁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게 더 큰 일이라는 양 굴었다.

‘황제 폐하와의 만찬은 진짜 엄청 긴장할 일인데.’

라티아는 속으로 입을 비쭉거리면서도, 카르시안이 저를 더 우선시해주는 게 좋아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문제는 두 사람의 이러한 모습을 마주 앉은 이들이 고스란히 보고 있단 거였다. 테이블이 넓어 대화 내용이 들리진 않았겠지만, 카르시안과 라티아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기류는 읽을 수 있을 터.

‘이것들 좀 봐.’

에메르나는 속으로 픽 새어 나가는 웃음을 참았다. 황제가 라티아에게 ‘헤바테인’을 하사한 이유는 그녀를 황태자비로 간택하기 위함이란 소문을 불식시키려는 듯, 라티아와 카르시안은 보란 듯이 옷을 맞춰 입고 왔다.

그것까지는 좋았다. 어차피 에메르나는 라티아를 황태자비가, 제네스의 배필이 되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조카인 헨델에게 바람도 불어넣지 않았나.

그렇지만 카르시안이 라티아를 대하는 모습이나, 그런 카르시안의 행동에 때때로 볼을 붉히는 라티아의 모습은 좀 심상치 않았다.

‘둘이 뭔가 있는 게 분명하네.’

그건 단순히 유사남매간의 정이나, 같은 공간에서 자란 이를 향한 유대감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이라 하기엔…….’

에메르나는 심드렁한 눈길로 카르시안과 라티아를 번갈아 봤다. 카르시안은 곧 2차 성징이 돋보일 정도로 잘 자랐지만 그에 비해 라티아는 볼품없었다.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가녀린 어깨, 땅딸막한 키, 어딘가 주눅 들고 눈치를 보는 것같이 비굴한 태도.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래, 황후랑 똑같네.’

황후도 어린 시절 유독 체구가 작아서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물론 몸이 작은 것과 건강은 별개라서 튼튼한 아들인 아론을 낳았다지만.?

‘결국 둘째 아이는 잃고 말았잖아.’

이후 루니아의 몸은 더욱더, 급격히 나빠져서 지금은 침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일엔 에메르나가 엮여 있었지만 말이다.

에메르나는 지금 라티아에게서 그런 루니아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유독 작은 체구 탓만이 아니었다. 간간이 은사가 섞인 듯 반짝거리는 밀빛 머리칼과 동굴 속에서 홀로 빛나는 자수정을 쏙 빼닮은 눈동자도 한몫했다. 루니아도 백금발처럼 흐린 밀빛 머리칼에 라일락 꽃 같은 연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으니.

그래서일까?

에메르나는 라티아를 보는 내내 어딘가 껄끄러웠다. 그래서 에메르나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옆에 앉은 제네스는 아니었다.

‘와…….’

이제 12살인 제네스의 눈엔 오로지 라티아만 담겨 있었다. 제네스는 원래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건 아니다.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라티아와 동갑인 헨델도 어린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걸 좋아하지 않나. 제네스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 여자랑 노는 것보다 검과 활을 잡는 게 더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제네스는 또래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게 낯선 일이란 뜻이다. 해서, 시간이 지나 적응이 되면 관심도 사그라들어야 하건만, 제네스는 시간이 갈수록 라티아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제네스는 뜬금없이 물었다.

“황태자비 후보라면서?”

그것도 아주 갑작스러운 주제로 말이다. 그에 라티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에메르나가 제네스를 확 돌아봤으며, 한창 클로드와의 대화로 열을 올리던 레오나르도도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그 무슨…….”

에메르나가 더듬거리며 물었으나, 제네스는 그녀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에겐 그저 라티아가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토끼처럼 더 동그랗게 뜬 게 마냥 귀여울 뿐이었다. 어쩌면 좀 짜릿하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카르시안을 담고 있던 보라색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 차는 감각은 새롭고 마음에 들었으며 독차지하고 싶단 독점욕을 불러일으켰다. 놀랐는지 보드라워 보이는 뺨이 조금 굳는 것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와, 토끼 같아.”

사람들은 제네스를 두고 어린 사자라고 비유했다. 약간 곱슬기가 있어 쉽게 정리되지 않는 금색 머리칼을 사자의 삐죽거리는 갈기라 칭한 것이다. 제네스는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난 사자고, 넌 토끼.”

키득키득 웃는 통에 에메르나의 얼굴에 드물게 당혹감이 어렸다. 라움디셀의 아가씨를 피식자인 토끼로, 자신을 포식자인 사자로 두다니.

‘선전…… 포고인가?’

듣는 이에 따라 위험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말이었다. 해서, 에메르나는 그만 제네스의 입을 다물게 하려 했지만, 오히려 제네스는 이 기세를 몰아 아예 라티아 쪽으로 상체까지 숙였다. 레오나르도를 쏙 빼닮은 녹색 눈동자가 라티아의 얼굴을 진득하게 훑었다. 라티아는 저도 모르게 ‘탐색당한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제네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음, 마음에 들어.”

그리고는 얼어붙은 에메르나와 입을 굳게 다문 레오나르도에게 말했다.

“저, 라움디셀 영애를 황태자비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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