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나와 카르시안을 태운 마차가 수도의 최고 번화가, ‘킹스베리’에 도착했다.
“조심히 내려와.”
먼저 마차에서 내린 카르시안이 내게 익숙한 듯 낯선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사이 훌쩍 커진 손이었다. 그래서 난 또 카르시안의 세 손가락만 잡아야 했다. 그걸 본 카르시안이 오늘 보여 준 미소 중 가장 평화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직도 다 못 잡네.”
“곧 다 잡을 거거든.”
“퍽이나.”
카르시안은 내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얼굴로, 내가 마차에서 내리는 동안 안전하도록 손에 힘을 주고 버텨 줬다. 아까 마차에 올라탈 때도 느낀 건데, 가까이 서서 보니 카르시안의 키는 훌쩍 커져 있었다.
원래도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던 것 같은데…….
이젠 내가 고개를 뒤로 힘껏 젖혀야 볼 수 있다. 가까이 서서 보면 그렇단 거고, 떨어지면 아니지만. 그래서 난 카르시안의 얼굴을 보다 편하게 보려고 뒤로 한 발자국 멀어졌는데, 이때였다.
“왜? 어디 가?”
아직 손을 놓지 않은 카르시안이 다급히, 그래. 조급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나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난 저항도 못 하고 그의 쪽으로 딸려갔다. 하마터면 가슴팍에 얼굴을 박을 뻔했다.
“으앗.”
“괜찮아?”
내가 휘청거리자 카르시안이 황급히 내 어깨를 잡아 줬다.
“으, 괜찮아. 아니, 가까이 붙으면 목이 아파서.”
“목?”
“응. 올려다보기가…….”
나와 카르시안은 발이 맞물릴 정도로 가까이 서 있었는데, 여기서 올려다보자니 목을 제대로 꺾어야 했다. 카르시안은 그제야 내가 그의 곁에서 한 발자국 떨어지려고 한 이유를 알았다는 듯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뱉었다. 하지만 이유를 깨달은 것과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별개인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그냥 옆에서 걸어.”
“아니, 그러니까 옆에서 걸으려면…….”
어깨가 스치도록 딱 달라붙는 것보단 좀 떨어지는 게 편하지 않냐 말하려고 했는데, 뚱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말문이 막혔다. 어이가 없거나 기가 차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귀여워서. 난 손을 쭉 뻗어 여름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카르시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
“너 많이 외로웠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한 시도 안 떨어지려고 하잖아.”
꼭 주인의 온기를 찾는 아기 고양이처럼, 이라는 말은 꿀꺽 삼켰다.?
아기 고양이란 말을 싫어하더라고.
카르시안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큼,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조금 숙여, 내가 그의 머리를 편하게 쓰다듬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그런데 그 바람에 카르시안의 얼굴이 내 쪽으로 더 가까워졌다.?
여전히 불퉁하고 뚱한 표정인데, 왜 지금은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카르시안이 손가락 한 마디가 간신히 지나다닐 만큼 좁은 거리를 유지한 채 말했다.
“꼭 외로워서 그런 건 아니야.”
“응?”
“난 원래 이랬다고.”
난 카르시안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어딘가 수줍어 보이는 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원래 이랬다니, 뭐가? 아. 쓰다듬 받는 거, 원래도 좋아했단 소린가?
생각해 보니 카르시안은 내가 학대받았을 기억 때문에 눈치를 보고 손을 거뒀을 때도, 내 손바닥 밑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지. 더 쓰다듬어 달라고.
그때의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넌 원래 이랬지.”
내가 웃으며 말하자 꼭 홀린 사람처럼 풀어진 눈으로 내 얼굴을 보던 카르시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내게 머리를 맡긴 채 붉은 눈동자를 도로록 굴려 지척에서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떨어지려고 하지 마.”
“하지만 계속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걸을 순 없는걸?”
아쉽게도 내가 아직은 키가 조금 작다.?
나중에 카르시안만큼 커지면 그땐 내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걸어야지!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카르시안이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었단 듯 반문했다.
“뭐?”
“응? 원래도 이랬다는 거, 쓰다듬 받는 거 좋아했단 거 아냐?”
이거 아냐?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르시안을 바라봤는데, 그의 표정에 들어찬 건 허탈함과 낭패감이었다.
어라, 왜 저런 표정이지?
생각은 읽히지 않아도 푹 절은 실망감은 똑똑히 보였다. 한참이나 날 멍하니 바라보던 카르시안이 천천히 몸을 세워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허탈하게 몇 번 헛웃음을 터뜨리다 부쩍 커진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카르시안이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진짜 어이가 없다.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냐…….”
안 변했다고? 아닌데. 나 키 엄청 많이 컸는데. 겉모습을 말하는 게 아니라면…… 안 변한 거면 좋은 거 아닌가?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내 우리를 지켜보던 앤과 메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기시는 게 어떠실까요?”
“맞아요. 쇼핑할 시간이 많지 않잖아요.”
마차를 타고 오느라 벌써 20분을 썼다. 카르시안은 큰 상실에 빠진 사람처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다 여전히 맞잡고 있는 손을 한 번 보고는 “그래, 이거면 됐지. 이거면…….” 하고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내게 물었다.
“그래. 일단 가지. 근데 뭘 사려고?”
“응? 아, 커플룩!”
난 카르시안의 손을 잡고 활기찬 표정으로 분주하게 다니는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며 대답했다.
카르시안은 나와 떨어질세라 재빨리 내 옆으로 다가서며 한 “아, 커플룩.” 하고 말하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날 확 돌아봤다.
“커플룩?!”
“응! 물론 우리한텐 ‘시밀러룩’이겠지만 말이야.”
클로드가 날 보며 눈을 찡긋거린 이유는 바로 이거다.
황성에 들어갈 때 우리가 옷을 맞춰 입고 가는 것.
이렇게 하면 이미 황도에 퍼졌을 ‘황태자비는 라움디셀의 아가씨다’라는 소문을 조금 잠재울 수 있겠지.
그뿐만 아니라 설령 황제는 날 황태자비로 점찍었다 하더라도 괜찮다.?
나의 후견 가문인 라움디셀에선 ‘라티아를 약혼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하고 선을 긋고 있단 뜻이니까.?
“자, 어서 가자! 옷 맞춰 입어야지!”
“어? 어, 으응.”
조금 전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카르시안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난 키득키득 웃으며 곧장 오몽 살롱으로 향했다.
번화가 중에도 명품 거리는 있기 마련이다. 오몽 살롱은 그 명품 거리 중에서도 가장 비싼 분수 광장에 위치해 있었다.
오몽 살롱의 안으로 들어가자, 몇 번 만난 마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나, 카르시안 도련님. 그리고 라티아 아가씨!”
마담은 우리를 무척이나 반겨 줬다. 수도엔 어쩐 일이냐부터 시작해서 위험하게 찾아오지 말고 기별을 줬으면 제가 찾아갔을 거라며 쉴 틈 없이 말을 건넸다. 난 대강대강 대답을 해 주며, 라움디셀 룸으로 향했다.
오몽 살롱은 고위 귀족만을 고객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아예 그 가문 사람들만 이용하는 프리이빗 룸이 있을 정도였다. 내가 엘레네의 옷과 장신구를 물려받아 썼단 걸 알게 된 이후, 클로드는 곧장 오몽 살롱에 라움디셀 룸을 만들었다. 말이 룸이지 들어가면 또 다른 매장이 나온다. 그리고 거기엔 ‘라티아 전용 착의실’이 있었다.
난 아직 어려서 수도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늘 마담이 출장을 오는데도.
“그렇지 않아도 도련님과 아가씨의 옷은 항상 준비해 두고 있었어요. 성장기이기도 하고, 언제 필요로 하실지 모르니까요.”
오몽 살롱을 이용하는 고객쯤 되면 그때, 그때 옷을 지어 입는 게 아니고 주인에게 맞춰 만들어진 옷을 한 번에 구매할 정도의 재력이 있는 법.
“어떤 의상이 필요하세요?”
마담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벌써 옷이 걸린 행거를 끌고 오고 있었다. 행거엔 짝을 지은 것 같은 남녀의 옷이 세 벌씩 걸려 있었다.?
소문이 참 무섭다. 아무래도 조금 전,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작은 소동이 벌써 퍼진 모양이다.
하긴, 그 정도 정보력은 갖춰야 고위 귀족들을 상대로 장사를 할 수 있는 거겠지?
마담의 물음 아닌 물음에 난 씩 웃으며 딱 한 마디 했다.
“저와 카르시안이 아주, 아주 사이좋아 보일 의상이요.”
* * *
클로드를 필두로 그의 뒤엔 옷을 맞춰 입은 카르시안과 라티아가 따르고 있었다. 카르시안은 평범한 정복의 모습이었지만, 라티아는 더운 여름 날씨를 고려해 무릎까지 오는 짧은 슈미즈 드레스를 입었다. 흰 바탕에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준 옷은 아주 잘 어울렸고, 두 사람의 가슴팍엔 옅은 자청색의 리시안셔스 꽃이 꽂혀 있었다.
세 사람이 그랜드 홀 쪽으로 걸어가자, 레오나르도의 최측근인 에임브시아 백작이 다가왔다.
그가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다.
“황제 폐하, 황비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찬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음.”
클로드가 묵직한 침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때였다. 에임브시아 백작의 시선이 카르시안과 라티아의 비슷해 보이는 옷차림과 나란히 꽂은 리시안셔스 꽃송이에 닿았다.
‘으음?’
에임브시아 백작이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헤바테인을 하사받았을 터인데, 공자와 옷을 맞춰 입고 오다니…….’
아무래도 소문과 달리 라움디셀의 아가씨는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 으스대는 이가 아닌 모양이었다. 라움디셀 쪽에서도 아직 라티아를 내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니, 어쩌면 ‘황태자비 간택’이란 소문은 헤프닝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에임브시아 백작의 생각을 읽은 라티아는 속으로 나직이 비음을 흘렸다.
‘소문이 그렇게 부풀었구나. 내가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
하지만 카르시안과 옷을 맞춰 입었으니, 에임브시아 백작이 생각하듯 소문은 금방 불식될 것이다. 라티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