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19화 (119/186)

119화

* * *

“쇼핑?”

카르시안이 난데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리 근처에 있던 교수가 얼른 대답했다.

“외출증 끊어 놓겠습니다.”

카르시안은 얼떨떨해 보였지만 가지 않겠다고 토를 달지는 않았다.

내가 갑자기 쇼핑을 가자고 제안한 이유는 단순했다.

‘라움디셀이 가난하다고 누가 그래?’

‘누구겠어요. 잘나신 아카데미의 학생님들이지.’

조금 전, 난 면회실에서 오랜만에 삼촌 길버트와 재회했다. 길버트는 뒤늦게 카르시안의 시중을 들러 아카데미로 향했기에 내내 여기에 있었다. 덕분에 우리에게 그간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전달해 줄 수 있었다.?

아, 근데 길버트가 아카데미에 늦게 간 이유가 좀 웃겼다. 이는 에메르나 황비가 만든 규칙 때문이었다.

[사용인이 100명 이상인 대부호의 자녀는 시종을 부릴 수 있다.]

귀족 세력 내에서도 빈부 격차를 나누려는 행동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에 교수진들은 난색을 표했다. 아카데미엔 학생의 시종까지 들일 자리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메르나는 그런 교수진들에게 터무니없는 해결방안을 내놓았다.

[후계자의 형제, 자매, 남매 입학을 거부하시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원래는 각 가문당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인원수의 제한이 없었다. 자녀가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열 명이든, 나이가 차고 돈이 있으면 몇 명이고 아카데미에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에메르나는 ‘각 가문당 딱 한 명만 입학 가능’하도록 교칙을 바꿨다.?

‘후계자’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이번엔 교수들이 들고 일어섰다. 학생이 준다는 건 그만큼 운영비가 준다는 소리니까.

뭐, 교수진들이 들고 일어섰다고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말이 에메르나의 뜻이지, 국립 아카데미에 내려온 칙령은 곧 황제의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이 제도가 시행된 것은 공교롭게도 카르시안에게 막 입학 허가가 떨어질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흠…… 섣불리 확언하고 싶진 않은데, 어쩌면 에메르나는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걸 막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막혔으니까.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되어, 사용인이 100명은커녕 300명은 훌쩍 넘는 공작성에선 부랴부랴 사용인인 길버트를 수도로 보냈다. 그는 과거 후작가의 영식이자 카르시안의 예법 선생이었으니.?

아카데미의 시종으로서는 제격이지.

다시 현재 이야기로 돌아와서, 길버트는 카르시안이 가난한 라움디셀 백작의 아들‘이었다는’ 이유로 따돌림당하고 있다고 내게 전했다.

정말 웃기지도 않아.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카르시안이 가난한 백작 영식이었던 건 3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과거를 갖고 있는 게 뭐 어쨌단 말인가??

지금 잘 살면 되는 거 아냐?

현재 항간에선 과장 조금 보태서 중앙 귀족 중 가장 부유하고 명예로운 가문은 라움디셀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아마 이건 사실일 것이다. 왜냐면 라움디셀의 재산에는 나의 차명계좌, 티아나 아메시스트 계좌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숨만 쉬고 있는 지금도, 내 통장엔 돈이 쌓이고 있다고.

그런 라움디셀의 후계자인 카르시안을 무시하다니! 그것도 돈으로! 이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럼 바로 나갈까? 외출증만 있으면 바로 나갈 수 있는 거지?”

“음, 음. 그렇긴 한데…….”

드물게 말꼬리를 늘린 카르시안이 힐끔, 내 뒤에 서 있는 메리를 바라봤다.

“‘헤바테인’은 계속 들고 다닐 생각이야?”

메리는 지금 ‘헤바테인’을 받치고 있었는데, 내가 저걸 들고 상점가로 나갈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난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잘 보관해 둬야지!”

아카데미에 라움디셀의 대단함을 널리 알려, 다시는 카르시안을 건들지 말라 으름장을 놨다. 그러니 ‘헤바테인’의 역할은 이제 다한 것이다.

우리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클로드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래, 슬슬 집어넣어라. 그러다 덜컥 네가 황태자비가 된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쩌려고.”

“네?”

클로드의 말에 난 놀라서 되물었고, 카르시안은 조용히 눈가를 찌푸렸다.

황태자비?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순간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황제가 ‘헤바테인’은 후계자에게 물려주겠노라 공언했지!?

내가 차기 황제가 될 일은 없으니, 생각할 수 있는 남은 길은 하나다.?

황제가 날 황태자비로 점찍었다.

……어라? 미처 여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잠깐. 그렇다면 공작님과 카르시안은 다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헤바테인’을 들고 설치고 다니도록 놔뒀단 건가? 그렇다면 왜?

의문이 퐁퐁 솟아날 무렵, 카르시안이 인상을 쓰며 메리에게 말했다.

“이제 치워.”

어찌나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렸는지, 깎아지른 절벽처럼 얄쌍하기만 하던 콧잔등에 주름이 생겼다. 메리는 그렇지 않아도 치우려고 했다는 양 얼른 마차 쪽으로 향했다.

그런 카르시안을 보며 클로드는 혼자 쿡쿡 웃고 있었지만 난 좀 얼이 빠졌다.

‘헤바테인’을 치우라고 말하다니.

게다가 주위엔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이걸 지적해야 하나 싶었는데, 이미 퍼진 이야기를 굳이 다시 꺼내 지적할 바엔 그냥 못 들은 척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을 때, 클로드가 너무 길어 꼬아도 바닥에 닿던 다리를 반대로 꼬며 말했다.

“왜, 이제 와서 자신 없어졌나?”

“뭐라고요?”

“하기야, 네가 황태자 전하보다 나은 게 뭐가 있겠느냐. 기껏해야 라티아와 함께 지냈단 것밖에 없지.”

우리 카르시안이 황태자보다 뭐가 부족하다고!

난 반박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부자끼리 대화 중. 눈치 있게 입을 꾹 다물었다.

근데 내가 황태자비가 될지도 모른단 이야기에, 왜 카르시안이 자신이 있어야 하는 거지? 이상한 일이었다.

신랄한 클로드의 말에 카르시안이 불퉁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싫은 이야기엔 대꾸조차 하지 않겠다는 어린 아들의 치기가 엿보였다. 클로드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라티아가 아무것도 모르고 ‘헤바테인’을 끼고 다녔으리라 생각하진 않겠지.”

순간 클로드만 노려보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너도 알고서 한 거야?’ 하는 시선이었다.

어, 어? 아, 아니 몰랐는데? 나도 생각조차 못 했어!

난 변명하려고 했지만, 카르시안 너머에 있는 클로드가 내게 조용히 하라는 듯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클로드의 ‘아들 놀리기’가 또 시작된 모양이다.?

난 어쩔까 고민하다가 클로드가 말한 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긴 싫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카르시안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그는 이내 내게서 눈길을 돌리며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역시 공주가 되고 싶은 거구나…….”

영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클로드가 찻잔 받침을 매만지던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 두며 말했다.

“언제까지 도움만 받게.”

“…….”

“라티아가 기지를 발휘해서 도와줄 땐, 그 책임은 오롯이 네가 져야 한다는 걸 알 때도 됐지 않으냐.”

요컨대 내가 들고 다닌 ‘헤바테인’ 덕분에 아카데미에서 입지를 다졌으니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전부 카르시안이 감내하란 뜻이었다.?

아니, 카르시안도 알면서 ‘헤바테인’을 이용하도록 둔 거 아냐?

“네가 예상할 정도의 이야기는 당연히 일어날 파란이다. ‘그래도 어쩌면’은 없는 이야기지. 정말 그렇게 믿었다면 넌 자만심에 빠졌었단 소리가 되겠군.”

아, 그러니까 카르시안은 내가 ‘헤바테인’을 들고 다녀도 내가 황태자비로 찜당했단 소문이 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아닙니다.”

이를 악문 건지, 발음이 뭉개졌다. 카르시안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넌 라티아가 아카데미에서의 일을 걱정할까 봐 감춘 모양이지만, 그 해결은 누가 했지? 라티아가 네 편지를 보고 서운해할 거란 생각은 했나?”

“라티아가 서운해했습니까?”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르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어딘가 떨리는 눈빛으로 날 돌아봤는데, 클로드가 카르시안의 머리통을 잡아 제게로 고정했다. 그가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그게 문젠가?”

“…….”

카르시안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클로드는 카르시안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무책임한 행동은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란다.”

공작님이 하고 싶으신 말은 이거겠지.

아무리 제 상황을 타파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내가 최적의 대안을 내놨다 하더라도, 그 뒤까지 전부 감당할 수 있을 때 결정하라는 가르침. 차기 공작인 카르시안에겐 꼭 필요한 가르침이기도 했다.

내가 이용당한 건 당황스럽지만…….

난 무거워진 분위기에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렸다. 잠시 마른 침만 삼키고 있는데, 때마침 마차로 갔던 메리가 돌아왔다. 그녀는 내가 아니라 클로드의 뒤로 다가갔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지 그에게만 속삭였다. 메리의 말을 들은 클로드의 눈이 나른한 이채로 빛났다.

“카르시안, 라티아. 쇼핑을 가려면 빨리 다녀오는 편이 좋을 거다.”

“네?”

내가 되묻자 클로드가 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황제 폐하께서 만찬에 초대하셨다는군.”

“네?!”

“정말입니까?”

이번엔 카르시안도 놀라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클로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래. 라티아는 알겠지만 폐하께서 공작령에 행차하셨을 때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나면 좋겠다고 하셨잖나.”

“아…… 네. 기억나요.”

“해서, 이번에 아들을 보러 아카데미에 가노라고 연통을 보냈는데, 바로 확인하신 모양이야. 못 만나도 괜찮다 생각했거늘…….”

제 턱을 매만지며 말하는 클로드의 목소리엔 ‘진짜로 만나야 하다니’ 하고 싫어하는 것 같아 난 귀를 의심했다.

“아무튼 만찬 시간은 일곱 시이니 다섯 시 전까지만 돌아오거라.”

“아, 네. 알겠어요.”

클로드의 뒤에 서 있던 메리가 회중시계를 보여 줬다. 이제 2시였다. 아카데미 학생들을 기함하게 할 만한 ‘뭔가’를 사려면 서둘러야 했다.

카르시안과 내가 막 분주히 일어나고 있는데, 클로드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둘이 함께 황성에 가는 건 경매 전야 파티 이후로 처음이군.”

그러며 날 보고 눈을 찡긋거렸다.

무슨 뜻인가 생각하던 내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역시 클로드는 천재였다. 괜히 남주의 아빠가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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