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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18화 (118/186)

118화

하이페디움 황성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을 꼽으라 하면, 열이면 열 모두 이 궁을 꼽을 것이다.?

어느 때에 방문해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선명한 색의 태피스트리, 그 비싸다는 크리스탈 유리를 끼워 넣은 거대한 창문들, 대리석도 아니고 오로지 상아로만 건축된 기둥과 빈틈없이 그려진 천장화 등……. 황비궁은 사치와 호사의 절정을 내달리고 있었다.

하물며 황비궁의 카펫은 그 구하기 어렵다는 보라색 염료로 염색한 벨벳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모든 복도에 깔린 카펫에 먼지 한 톨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말이다.

그러한 황비궁에서 한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이 황비궁 안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방, 주인의 침실이었다.

똑똑, 시종이 문을 두드리며 보다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메르나 황비님. 편지가 왔습니다.”

안에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편지?”

상아와 백금으로 꾸며 만든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요사스러울 정도로 매혹적인 목소리는 결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나, 시종은 사람을 홀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익숙한 듯 빠르게 용건만 말할 뿐이었다.

“네. 아카데미에서 급한 편지로 온 것입니다.”

“아카데미에서면…….”

잠시 생각하던 요사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문을 열라 명령했다.

탐스럽고 윤기가 도는 긴 금발을 허리께까지 늘어뜨린 여인이 직접 걸음을 했다. 나른하게 떨어지는 실루엣을 가진 가운 형식의 드레스건만, 군데군데 눈이 휘둥그레 뜨일 만큼 커다란 보석이 장식되어 있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 황비궁의 주인, 에메르나가 우아한 손길로 시종이 황송하단 듯 들고 있는 편지를 받았다. 발신자의 이름을 본 에메르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후후, 귀여운 조카가 이 이모에겐 무슨 일일까.”

그 편지는 다름 아닌 그녀의 조카, 헨델 이플란트가 보낸 것이었다.?

에메르나는 시종을 물리고 곧장 책상에 가 앉았다. 그녀의 뒤를 소리 없이 따르던 시녀들이 금방 긴 머리칼을 정리해 줬다.

에메르나는 즐거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반가운 시선으로 첫 줄을 읽었을 때와 달리, 마지막 줄을 읽었을 때 그녀의 눈빛에 담긴 것은 오로지 짜증뿐이었다.

“아하……. ‘헤바테인’이 어디에 있나 했더니…….”

에메르나의 고운 입술을 타고 들린 목소리는 지옥에서 핀다는 석산처럼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왜냐하면 이 편지엔 최근 그녀의 골칫덩어리였던 ‘헤바테인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움디셀이 가지고 있을 줄이야.’

‘헤바테인’은 황제인 레오나르도의 검이다. 에메르나는 요 며칠 매번 그와 함께하던 검을 보지 못했다. 의아하여 레오나르도에게 검이 어디에 있냐 물어도, 그는 요즘 머리가 아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대답할 뿐이었다. 한데, 레오나르도가 기억나지 않는다던 검의 행방이 지금 밝혀졌다.

‘대체 언제…… 아, 그때로군.’

언제였더라, 최근 레오나르도가 에메르나에게 기별도 하지 않고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마법사와 함께 수도를 비웠는데, 에메르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없으면 사고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주제에.’

해서, 에메르나는 레오나르도가 돌아오자마자 바로 저를 찾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환궁한 그의 마차는 에메르나의 예상과 달리 황비궁이 아닌 황후궁으로 향했다.

‘그땐 황후궁에 찾아갔단 것에 놀라 미처 레오나르도의 주위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헤바테인’은 그때부터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레오나르도가 라움디셀 공작가에게 ‘헤바테인’을 준 건 그때일 것이다.

에메르나가 불편한 심정을 숨기지 않고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라움디셀 가문이지?”

레오나르도가 라움디셀 가문에게 ‘헤바테인’을 하사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나? 아니, 아니다. 레오나르도는 라움디셀 가문을 싫어한다. 애당초 라움디셀 가문이 백작이던 시절 그토록 가난했던 이유가 레오나르도의 보이지 않는 괴롭힘 때문이지 않나. 이는 에메르나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고.

‘해적들을 정리하는 공을 세울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다야.’

레오나르도는 해상 무역로가 열린 것을 크게 기뻐하며 특급 무공 훈장을 하사했지만, 라움디셀 공작인 클로드는 그 흔한 작위 수여 연회조차 열지 않았다. 그렇기에 레오나르도와 클로드가 마주한 건 그가 막 귀환했던 3년 전의 황성 경매 전야 파티 때가 전부였다.

‘글라델리스 후작의 재판 때도 한 공간에 있기는 했지만 그땐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으니까.’

아니면 레오나르도가 에메르나의 눈을 피해서 클로드와 친분을 쌓은 걸까? 잠깐 의심이 들었지만, 에메르나는 급히 생각을 정정했다.

‘그럴 리 없지. 내가 레오나르도의 생각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꿰차고 있는데.’

하면 레오나르도는 대체 왜 라움디셀 공작가에 자신이 후계자에게 물려주겠노라 말하고 다니던 ‘헤바테인’을 준 걸까?

그 의문의 해답도 헨델의 편지에 나와 있었다.

“황태자비라…….”

‘헤바테인’을 들고 설치고 있는 건 라움디셀 가문에서 거둔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장녀라고 한다. ‘라티아’라는 이름을 가진, 예쁘장한 얼굴로 가족을 고발한 그 발칙한 계집 말이다.

사실 에메르나는 라티아에 대해서 별생각이 없었다. 황제를 시켜 물어봤더니, 글라델리스 후작이 귀족들의 약점을 모아 둔 치부책도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라티아는 클로드의 명예 여식 이름을 거머쥐었다. 단순한 후견-피후견 관계가 아니라 명예 부녀가 된 셈이다. 만약 라티아가 결혼을 한다면 클로드는 그녀의 혼주석에 앉을 것이다.

‘그러면 안 되지.’

에메르나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라티아가 황태자비가 된다면 신랑은 그녀의 아들인 제네스가 될 것이다. 그런데 클로드가 라티아의 혼주석에 앉아 있는다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에메르나의 푸른 호수처럼 청량하기만 하던 눈동자에 시꺼먼 음심이 깃들었다.

‘클로드는 내 남편이 될 거야.’

에메르나는 맹세코 단 한 순간도 클로드를 갖고 싶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클로드의 사별한 부인인 아이샤와 각별한 친구 관계였을 때도 이건 마찬가지였다.

‘클로드는 내 거야.’

먹구름이라도 드리운 것마냥 순식간에 어두워진 푸른 눈동자는 클로드를 향한 집착과 소유욕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내가 왜 황비가 되었는데.’

이제 이 세상에서 에메르나를 막을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클로드 또한 무력하게, 속절없이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와야 했다. 하물며 그런 클로드와 혼인 관계가 아니고 사돈 관계를 맺는다니! 그건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하여, 에메르나는 사랑하고 귀애해 마지않는 조카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줘야만 했다.

[사랑하는 나의 조카, 헨델에게.]

여상한 인사로 운을 뗀 에메르나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헨델은 라티아가 꼭 황태자비가 되어 라움디셀의 성을 버리길 바랐으나 이건 너무도 아둔한 짓이었다.

[혹시 이런 말을 아니? 고루한 말이지만 지금 네게 꼭 필요한 말인 것 같기도 하구나. 헨델, 사랑은 쟁취하는 거란다.]

당장 에메르나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그녀는 오로지 클로드를 갖기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황제를 유혹하여 이 자리에 앉았다. 게다가 라티아가 라움디셀의 성을 버리기 위하여 에멜하르트가 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라티아 라움디셀이 싫으면 라티아 이플란트로 만들렴.]

클로드와 에메르나가 결혼을 하면 헨델과 라티아는 사촌이 되지만, 제국 법상 혈통 보존을 위해 사촌 간의 결혼은 문제없었다. 또 라티아가 실제로 클로드의 딸은 아니니 근친으로 인한 유전병도 걱정 없었고 말이다.

[명분 또한 명확하지 않니? 넌 그녀의 동생과 약혼을 했었단다. 이제라도 약혼녀의 가문이 저지른 죗값을 네 한 몸 바쳐 치르겠다고 하면 그 누구도 네 선택을 손가락질하지 않을 거란다.]

하지만 잡음을 막기 위해 클로드와 에메르나가 먼저 결혼을 하고, 라티아가 성인이 되어 후견 제도에서 독립을 한 후에 결혼하는 것이 좋으리라.

[그러니 네 꿈을 좀 더 키우도록 하렴, 너를 사랑하는 이모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줄 테니.]

편지를 마무리한 에메르나는 다시금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결국 ‘헤바테인’은 다시 황실로 돌아올 운명인 모양이었다.

‘제네스에게 헤바테인을 물려주는 건 조금 시간이 걸려도 괜찮아.’

어차피 루니아와 아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다. 그러면 레오나르도의 후계자는 제네스뿐이며, 설령 다른 황위 경쟁자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괜찮다.?

‘나와 클로드 사이에서 난 자식일 테니까.’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제네스는 레오나르도의 피를 이어받은 반쪽에 불과하니.

에메르나는 곧장 시종을 불러 방금 적은 답신을 급한 편지로 보내라 일렀다. 시종이 물러가고, 에메르나는 언제 그토록 불쾌해했냐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가 서니, 황제궁이 보였다. 에메르나는 크리스탈 유리 너머의 황제궁을 쓰다듬으며 속으로 비릿하게 웃었다.?

‘레오나르도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한 건 짜증 나지만…….’

그 덕에 조카의 풋풋한 첫사랑을 알게 되었으니 용서하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클로드와 결혼하게 되면…… 그 간악한 계집의 배에서 난 카르시안은 언제 죽이는 게 좋을까?’

클로드에게 남은 아이샤의 흔적은 카르시안이 유일했다. 그것마저 지운다니.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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