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17화 (117/186)

117화

* * *

라움디셀 공작가가 황제, 레오나르도가 황태자 시절 때부터 곁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는 명검 ‘헤바테인’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 건 삽시간이었다. 아니, 소문의 첫 등장과 동시에 사실로 확인되었다.

왜냐하면 황제에게 직접 검을 하사받았다는 공작성의 아가씨, 라티아가 직접 쥐고 면회실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무거워서 그 끝은 시녀가 받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까 복도를 지날 때 슬쩍 보긴 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그러니까. 시녀가 들고 있을 땐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헤바테인’이네.”

심지어 라티아는 이미 ‘헤바테인’을 대동한 채 아카데미를 휘젓고 있었다.

“와, 저기 봐 봐!”

“책에 나온 거랑 똑같아. 진짜 ‘헤바테인’이야!”

이유야 명확했다. ‘소문이 과장된 거더라.’, ‘진짜 헤바테인은 아니더라.’ 하는 허튼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쐐기를 박는 중이었으니.

물론 구실은 있었다.?

“와아, 여기가 카르시안이 공부하는 강의실이구나!”

‘카르시안이 공부하는 아카데미를 구경하고 싶다.’ 외부인이 아카데미를 견학하는데, 이보다 더 확실한 구실이 있을까??

“마법학은 여기서 배워. 그 외에 경제학과 법학은…….”

이를 아는 카르시안도 오랜만에 찾아온 가족에게 제가 지내는 곳을 소개하는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모습을 본 학생들은 조금 놀랐다.

‘라움디셀 공자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단 말이야?’

‘목소리 톤이 완전 다른데? 신기하네…….’

라티아의 옆에서 쉴 새 없이 설명을 이어 나가는 카르시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아무리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늘 무심하고 만사가 귀찮아 보이던 나날들과는 확연히 다른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들 중에도 갑자기 두각을 나타낸 카르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누가 보면 이곳이 국립 아카데미가 아니고 하층민들이나 있는 상업지구인 줄 알겠군.”

“누가 아니래. 배움에 정진해야 하는 신성한 아카데미에서 이런 소란이라니. 이래서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겠지.”

갑자기 ‘헤바테인’이 나타날 줄 모르고 내기에 열을 올렸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개선장군이라도 된마냥 소란스럽게 강의실을 지나가는 라움디셀 일가에게 다 들릴 정도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들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라움디셀 공자가 공작에게 말했을까?”

“그간 외롭게 지냈다고 말이야?”

“외롭게 지냈다고만 말했으면 다행이게?”

공작은 물론 황제까지 등에 업은 카르시안에게 잘못을 저질렀던 과거를 후회하기 바쁠 뿐. 황제가 친히 ‘헤바테인’을 하사한 라움디셀 공자를 따돌렸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제아무리 중앙귀족이라 하더라도 멀쩡하진 못할 터였다. 하물며 저들은 신성한 배움터에서 학우를 따돌린 죄인이지 않은가.

“야, 야. 길을 비켜 드려. 라움디셀 공작님 지나가시잖아.”

“맞아. 아가씨와 라, 라움디셀 공자께 방해가 되면 안 되지.”

이제라도 눈치를 봐야 마땅했다.

또한 ‘헤바테인’을 쥐고 있는 라움디셀의 아가씨가 견학을 하고 싶다 하니, 아카데미의 교수진들로서는 막을 방도도 없었다.

“후계자에게 물려주겠다는 ‘헤바테인’을 제국 영웅의 명예 여식이라 불리는 아가씨가 갖고 있단 게 무슨 뜻이겠어요?”

“역시, 그런 거겠죠? 황태자비 말이에요.”

이는 황제가 라티아를 점찍어 놨단 소리나 다름없었다. 황태자비일지, 황자비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수진들은 오히려 라티아에게 아카데미를 더 잘 보여 주려고 안달이 났다.

‘미래의 황태자비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지.’

‘운영자금을 더 받아 낼 수 있을지도 몰라!’

‘라움디셀의 원조를 기대해도 좋겠지.’

카르시안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단 사실조차 몰랐으면서 꿈은 참으로 큰 그들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라움디셀 공작가를 짓밟기 위해 ‘명검 내기’에 불을 붙인 이의 귀에도 화기애애한 라움디셀 일가의 소리가 닿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젠장…….”

카르시안을 짓밟지 못해 가장 안달이 났던 이, 헨델 이플란트가 분에 찬 욕설을 내뱉었다. 고귀하게 자란 이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투박한 발음이었다. 헨델의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무리들’조차 어깨를 흠칫 굳힐 만큼 말이다.

‘혼자 고귀한 척은 다 하더니…….’

‘저잣거리에나 나돌 법한 욕을 입에 담는 건 제 신분이 비천하단 방증이라며?’

헨델과의 우정이 아닌 오로지 ‘이플란트 백작가’에 목적이 있는 하이에나들이 속으로 헨델을 비웃어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헨델은 온통 짜증이 나 있을 뿐이었다.

‘카르시안, 카르시안, 카르시안!’

그리고 그 짜증의 대상은 당연하게도 카르시안이었고 말이다.

사실 헨델은 카르시안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떻게 잊겠어. 황성 경매 전야 파티 때의 그 치욕을.’

그날의 기억은 헨델에게 아주 특별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겪은 날이니까. 하물며 그 상대는 가난해서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은 적 없다는 그 라움디셀 백작 영식이었다. 그뿐이랴? 헨델은 패배의 쓴맛을 잊기도 전, 모두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 사죄해야만 했다.

‘젠장할…….’

헨델은 이마를 짚은 채 활짝 열린 강의실 문가를 바라봤다.?

‘라티아 글라델리스…….’

거기엔 헨델의 지긋지긋한 첫사랑이 지나가고 있었다. 꺄르르, 은방울꽃에 이슬이 맺혔다 떨어지는 것보다 더 상큼한 웃음을 터트리며.

아까 카르시안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했던가. 라티아는 단 1초도 그의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영특하다 하더라도 헨델 또한 어린아이이기에 사랑이나 운명같이 어려운 이야기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사랑’ 어쩌고 하는 건 그의 약혼녀였던 엘레네가 만날 때마다 떠들어 대던 동화 속 이야기 같아, 조금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이제는 안다.

헨델은 3년 전, 황성 경매 전야 파티 때 라티아에게 반했고, 그 이후로도 내내 그녀를 그리고 있었단 사실을. 그가 엘레네가 떠드는 사랑을 유치하다 생각했던 건 엘레네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헨델은 제 자존심 위에 세워진 마음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아직도 라티아를 라움디셀이 아닌 글라델리스로 부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헨델은 사무치게 깨달았다. 라티아의 이름 뒤에 붙이고 싶은 성은 라움디셀이 아닌 이플란트라는 걸.

“후우…….”

“마음에 안 드네, 그렇지?”

“그, 그러게 말이야.”

헨델의 기분이 상한 듯 보이자, 그의 ‘무리’들이 재빨리 비위를 맞췄다. 이러나저러나 헨델은 명실상부한 에메르나의 조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이에나들이 뭐라고 떠들든, 헨델의 귀엔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도 사이가 퍽 좋은 모양이지.’

헨델의 머릿속엔 오로지 이죽거림만이 가득했다.?

헨델이 카르시안을 못살게 괴롭힌 이유도 명백히 라티아 때문이었다. 헨델은 글라델리스 일가가 처형되었을 때, 그녀를 제 가문에 들이려고 했다.

‘글라델리스 후작가가 불법 격투장을 운영했단 사실은 모르는 일이잖아요. 하지만 약혼자의 가문으로서 죗값을 치르겠다고 하면서 홀로 남은 장녀를 들이는 건 어때요?’

때마침 그의 어머니도 이플란트 백작에게 그렇게 첨언했다. 헨델은 아닌 듯 슬쩍 들떴으나, 그가 기다리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라티아가 향한 곳은 이플란트 백작저가 아닌 라움디셀 공작성이기 때문이었다.

라티아가 라움디셀로 향했단 이야기를 듣고 한 번 뒤집어진 복장을 되돌리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한데, 아카데미에서 카르시안을 만났다. 한 번 악연은 영원한 악연이라 했던가.

‘그 화관은 내가 직접 옮길게. 이건 라티아가 준 거니까.’

하필이면 카르시안이 막 짐을 내리는 순간, 헨델이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라티아’라는 이름과 그녀가 직접 만들어 줬다는 화관을 봤다. 그 순간, 겨우 제 자리로 돌아온 헨델의 복장이 다시금 뒤집혀 버렸다.

하여, 헨델은 격렬한 질투에 휩싸였고 카르시안을 집요하게 괴롭히기에 이르렀다. 오로지 ‘라티아를 데려갔다’는 질투심 때문에 말이다.

“와아, 나 카르시안이 지내는 기숙사도 보고 싶어!”

“뭐? 거긴…….”

헨델이 치열하게 내면의 질투심과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라티아와 카르시안은 화기애애하게 멀어져 갔다. 헨델은 책상 밑에 숨긴 주먹을 움켜쥐었다. 3년 전, 황성 경매 전야 파티 때 느꼈던 처절한 패배감이 다시 그를 덮쳤다.

‘내가…… 주동자라는 걸 모르는 건가.’

만약 알았더라면 라티아는 저를 찾아왔을까? 이렇게 존재하는지도, 헨델이란 자가 있는지도 모른단 얼굴로 지나가는 게 아니라?

헨델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나다 못해, 움켜쥔 주먹에서 우뚜둑 소리가 날 정도로 힘을 줬다. 어느 쪽이든 최악이었다.

‘내가 카르시안을 따돌린 주동자란 걸 라티아가 알게 되는 것도, 알지 못해서 내가 이곳에 있단 걸 인식조차 못 하는 것도…….’

모두 다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와장창!?

“헉.”

“헤, 헨델!”

결국 헨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제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책걸상을 발로 차 버리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다른 영식들이 그를 쳐다봤으나, 헨델의 눈엔 오로지 기어이 그의 이성을 이겨 먹은 질투만이 담겼을 뿐이었다.

‘헤바테인을 갖고 있다고 그랬지…….’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황제가 라티아를 황태자비나 황자비로 점찍었단 소리다. 그 말은 즉, 결국 라티아의 짝은 카르시안이 아니란 거다.

‘카르시안. 카르시안만 아니면 돼…….’

질투에 눈이 먼 헨델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그날, 헨델은 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수신인은 제 이모인 에메르나 황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