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16화 (116/186)

116화

카르시안을 보는 순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따위의 생각은 모조리 발화되고 말았다.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다시 만나서 기뻤고, 좋을 따름이었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사이 좀 더 자랐는지, 눈높이가 조금 더 높아진 느낌이다. 느슨하게 흐트러진 머리칼은 공작성에 있을 때보다 조금 짧았다. 그래서인지 조금 더 다부져진 턱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걸터앉아 있느라 창틀을 짚고 있는 손도 더 커지고, 손등뼈도 더 두꺼워 보였다.

내 부름을 들은 카르시안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눈꼬리가 올라간 반달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눈이 사르르 접히며 웃음을 지었다.

그에 나도 모르게 신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르시안!”

“라티아.”

카르시안은 마치 기다렸단 듯 내 이름을 부르며 화답해 줬다. 대체 그게 뭐라고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콩닥콩닥, 꼭 유원지에 간 아이처럼 가슴이 뛰어 댔다.?

카르시안이 걸터앉았던 창틀에서 몸을 일으키고 나를 향해 똑바로 섰다.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이제 보니 변성기가 오고 있는지,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지고 있다. 이 사소한 변화에도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난 잘 지냈어. 카르시안은?”

“나도 잘 지냈어.”

카르시안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입 안에 불만을 가득 담았다.

내가 오면서 본 게 있는데!

하지만 내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불편한 속을 꾹꾹 눌러 담았다.

“뭘 그렇게 어색하게 서 있어. 앉아.”

뒤따라 들어온 클로드가 면회실 소파를 턱짓했다. 자신의 집무실도 아닌데 익숙해 보였다. 클로드가 맞은 편에 앉고, 나와 카르시안은 나란히 앉았다.

카르시안이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내 아들 얼굴 보러 오는 데에 이유가 있어야 하나?”

“그건 아니지만…….”

“못 본 사이에 꽤나 야박해졌군. 그렇지 않으냐, 라티아?”

클로드가 또 카르시안을 놀리기 시작했다. 카르시안은 잠시 멈칫거렸지만, 이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길버트를 보내 주신 덕에 편안하게요.”

아무래도 카르시안은 예의상 어쩐 일이냐고 물은 거지, 실은 클로드가 왜 찾아왔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잘 지낸다’는 말을 하는데 내 눈치를 볼 리가 없지 않나.

카르시안이 끝까지 내게 숨기려는 듯보이자 클로드가 나섰다.

“그래? 그런데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문이 파다하더군.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서 어떤 검이 진짜 명검이냐고 내기한다던데.”

“아, 그건…….”

내내 태연하기만 하던 카르시안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클로드가 픽 웃으며 내게 시선을 던졌다.

“그렇지 않으냐, 라티아? 네가 얼마 전에 연 티파티에 참석한 영애들도 그리 말했지?”

티파티라는 단어를 들은 카르시안이 놀라 내 쪽으로 고개를 확 돌렸다.

‘다 알고 있었어?’ 하는 생각이 읽혔다.

와, 오랜만이네. 한동안 안 읽히더니!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영애들이 알려 줘서, 저도 아카데미의 재미있는 내기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요.”

“그런…….”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자잘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가 눈을 감았다 뜨자, 그 흔들림은 이내 사라졌다.

“그래서. 넌 어디에 걸었지?”

카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 하는 것이리라. 그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으니 걸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닐 테지. 하지만 클로드는 끈질기게 카르시안이 대답하길 기다렸다.?

결국 카르시안은 한숨을 토해 내듯 말했다.

“걸 수가 없었습니다.”

“어째서?”

클로드가 압박하듯 재빨리 되물었다. 난 그런 클로드를 힐끔거렸다.

어쩐지 공작님이 초조해 보이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카르시안이 눈동자를 굴리다 말했다.

“그건 절 비웃기 위해 붙은 내기니까요.”

“……엥?”

난 너무 당황해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화들짝 놀라 황급히 입을 가로막았으나, ‘엥?’ 하는 소리는 이미 면회실에 퍼진 후였다.

카르시안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라움디셀 가문을 저격하기 위해서 퍼진 내기입니다. 트라이던트 기사단이 있지만 그 역사가 짧아 이렇다 할 보검조차 없잖아요.”

“음…….”

“그리고 우리 가문은 백작저에서 살 시절 생계를 위해 온갖 집기를 내다 팔았으니까……. 지금은 제아무리 공작위를 받고 공작령이라는 대영지에,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는 가문이라 하더라도 최근까지 가난했단 걸 놀리는 겁니다. 그 내기는.”

난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맙소사. 그런 뒷이야기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모를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에 오기 전, 난 카르시안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러니 치사한 놈들이 이토록 지능적으로 카르시안을 괴롭히는 줄도 몰랐다.

“…….”

“…….”

카르시안의 말끝으로, 면회실에는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공작님은 알고 계셨던 걸까?

힐끔 본 클로드의 시선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조소로 조금 비틀려 있는 걸 보니, 어렴풋이 알고는 있던 모양이었다.

문득 조금 전, 면회실로 오면서 클로드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게 알리고 싶은 건 이뿐만이 아니다.’

아, 아무래도 클로드는 내게 카르시안이 처한 상황을 보다 확실하게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카르시안에게 받은 짤막한 편지로 인한 오해를 모조리 풀길 바란 모양이다.

‘신뢰는 서로에게 무엇 하나 숨기지 않는 깨끗한 관계에서 생긴다고들 말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이야기를 덮어둘 필요도 있다. 아무리 부슬부슬한 모래라 하더라도 물을 붓고 계속 힘을 주면 결국 단단해지거든.’

그 말은 비단 나에게만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걱정할까 봐 본인의 처지를 숨기고 있던 카르시안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까 그렇게 집요하게 왜 내기를 하지 못한 거냐고 되물었구나.

끙, 난 속으로 앓는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이때였다.

……어? 생각해 보니, 있잖아.

라움디셀에도 보검이!

“일단 알겠어.”

난 먼저 운을 뗐다. 카르시안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내게로 시선을 보냈다. 클로드의 입가엔 씩,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난 카르시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보검이 필요한 거지?”

“뭐?”

“진짜 명검이 무엇이냐는 내기가 유행하는 이유가 카르시안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기 위해서인 거잖아. 그럼 보검이 있으면 되는 거 아냐?”

“그건…….”

카르시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검을 돈으로 구입해선 안 돼. 졸부라는 인식만 강해질 뿐이니까.”

“그럼 하사받은 건?”

“하사, 라고?”

“응. 라움디셀에 하사받은 명검이 있다면? 그럼 해결되는 거지?”

카르시안이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난 픽 웃으며 내내 사악하게 웃고 있는 클로드를 돌아봤다.?

“가져오길 잘했지?”

“그러게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챙겨 오신 거군요?”

나와 클로드가 뜻 모를 소리를 하자, 카르시안의 표정은 더욱더 아리송해졌다. 클로드는 그런 카르시안의 의문을 “보면 안다.”라는 짧은 말로 일축시키곤 면회실 안의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클로드가 미리 말해 놓은 듯, 우리를 따라왔던 메리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엔 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는데, 그것을 본 카르시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저건…….”

카르시안은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당연했다. 지금 앤이 들고 있는 검은 하이페디움 제국의 명실상부한 명검, ‘헤반테인’이기 때문이었다.

“저게 어떻게…….”

“음, 뭐. 좀 일이 있어서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 공작령에 행차하셨을 때 라티아에게 친히 하사하셨지.”

“라티아, 에게요?”

계속 ‘헤반테인’에 못 박혀 있던 카르시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난 멋쩍게 웃었다.

“나도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사실은 이번에 검을 챙기라는 클로드의 말을 듣고 황제에게 돌려주려 하는 줄 알았다. 아까운 일이었지만 클로드는 원작에서 황실과 엮여 목숨을 잃는다. 그렇기에 나도 황실과 엮일 만한 일은 최대한 만들지 말자고 생각해서 검을 챙겼더랬다.

“아무튼 이 ‘헤반테인’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라티아 라움디셀인 내게 하사하신 거야. 그러니까 라움디셀의 것이지.”

“어…….”

“돈으로 주고 산 것도 아니고, 황제 폐하께서 후계자에게 물려주겠노라 말씀하셨다는 그 검이야.”

“…….”

?

“이 정도면 과연 어느 검이 명검인지 겨루는 내기에서 압승할 수 있겠지?”

내가 씩 웃으며 말하자, 카르시안은 멍하니 나만 보다가 픽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 정말.”

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쩍 자란 손으로 검은 앞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러다 한 손으로 눈가를 짚은 채 손 틈 사이로 나를 바라봤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있어 웃고 있단 건 알고 있지만, 손 틈새로 마주친 눈이 활짝 휘어 있는 걸 보니 가슴 깊은 곳이 간질거렸다.

그가 말했다.

“넌 항상 날 구해 주는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