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 *
아카데미에 들어온 순간, 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우릴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학생들은 공작가의 마차가 들어왔는데도 길을 비키지 않거나, 공작가의 마부에게 자신의 시종이 다칠 뻔했다며 괜한 시비를 거는 둥의 치졸하게 방해했다. 저러다 누가 다치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그게 바로 학생들의 바람이었을 거다.
공작가의 마차 때문에 제 시종이 다치는 것. 그걸 말미암아 문제를 일으켜 공작가의 위신을 깎는 것.
마차에서 내렸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둘째 치고 공작인 클로드가 내렸는데도 인사 한마디조차 없었다.
아니, 차라리 무시가 낫지.
나와 클로드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쑥덕거리는 소리, 어딘가 이죽거리는 것 같은 눈빛……. 이 불손하기 짝이 없는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라움디셀 공작가를 대놓고 비웃고 있었다.
아니, 대체 왜?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라움디셀이 뭘 어쨌다고 이렇게 비웃음을 사야 하는지. 하지만 그 의문은 금세 풀렸다.
‘꼴에 마차는 가장 좋은…….’, ‘그래, 원래 가난했던 것들이 돈이 생기면 더 으스대는…….’ 고 생각하는 학생들의 속마음이 읽혔기 때문이다.
아하, 저들은 라움디셀 가문이 백작가이던 시절을 비웃고 있는 거구나.
하, 이보다 어리석고 멍청한 생각이 또 있을까! 솔직히 조금 전까지 억울하고 짜증이 났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 없어졌다.
힐끔 올려다본 클로드 또한 나와 마찬가지인 듯 발끈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래, 아카데미 학생들의 저 수군거림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내가 만들어 준 화관을 얹은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한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르시안…….
지금 학생들은 저들이 권세가의 후계자라는 것과 아카데미는 무슨 일이 생겨도 학생을 우선으로 보호한다는 점 때문에 이렇게 오만하게 굴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공자인 카르시안한테는 살갑게 대했을까? 아니, 그럴 리가.
난 클로드의 곁에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공작님께서 왜 저를 데리고 오셨는지 알 것 같아요.”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클로드의 입꼬리가 피식 말려 올라갔다.
“네게 알리고 싶은 건 이뿐만이 아니다.”
“네? 또 있어요?”
카르시안이 아카데미에서 따돌림 비슷한 걸 당하며 고립되어 있단 것 외에 더?
난 놀라서 클로드를 올려다봤다. 클로드의 입가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내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난 복도를 걷는 내내 따가운 가시처럼 느껴지는 학생들의 시선에 움츠러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어쩐지 우리 속의 동물이 된 기분이야.?
모두들 나를 호기심이나 비웃음 따위가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헤에, 글라델리스의 장녀라고?’
‘혼자만 살아남았다지?’
‘그럼 결국 제 손으로 가족들을 죽인 거 아냐?’
‘라움디셀 공작을 어떻게 꾀어낸 거지?’
‘저런 꼬마에게 휘둘리다니, 라움디셀 공자가 얼마나 허술한지 다 알겠군.’
정말 읽고 싶지 않았는데, 이 독심술 능력을 끄는 방법을 모르겠다. 악의 가득한 생각들이 속속들이 읽혀 속이 울렁거렸다. 그렇다고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니, 그건 또 싫었다.
내가 지고 들어가는 것 같잖아.
그렇지 않아도 라움디셀을 깔보고 있는 이들에게 주눅 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해서, 난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뭐야, 난 또 구구절절한 편지를 보내기에 얼마나 대단한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인가 했더니.’
‘꼬마한테 보내는 거였잖아? 뭐, 좀 예쁘장하다만.’
‘누이가 전해 줬던 이야기보다 더 예쁘네…….’
‘뭐, 저 정도로 귀엽다면 영지에 두고 온 게 아쉽다고 할만하긴 하겠네.’
‘공작에게로 보내는 편지도 읽어 볼걸.’
쉴 틈 없이 읽히는 학생들의 생각 사이로, 충격적인 내용이 섞여 있었다.
카르시안이 누구에게 편지를 보내는지 알고 있다고? 그 내용도?
남학생들이 끈적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훑는 건 이제 상관없어졌다.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미쳤나 봐.
독심술로 읽은 생각에 의하면 저들은 카르시안을 아주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카르시안의 사생활은 물론이고 그가 쓴 편지조차 중간에 갈취해서 몽땅 읽어 본 것이다!
왜 카르시안한테 답장이 안 오고, 그토록 짧은 내용의 편지가 왔는지 이제 알겠다.
나쁜 자식들……!
난 너무도 놀라운 사실에 정신이 다 얼얼했다. 꽉 쥔 주먹이 하얗게 질려 자잘하게 떨렸다. 저들의 괘씸하고 졸렬하기 짝이 없는 작태에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달려가 머리통을 세게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게 속상했다.
“후우…….”
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숨을 가다듬었다.
두고 보자.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진짜 무서운 사람은 없다지만, 난 아니거든. 난 진짜 두고두고 볼 거거든.
어찌나 세게 주먹을 쥐고 있던 건지, 손이 제대로 펴지지도 않았다. 난 화가 나서 몸이 덜덜 떨리는 걸 클로드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러는 동안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얼마 전 카르시안이 내게 급히 보낸 편지 속에 담긴 마음 말이다. 카르시안은 이 시선들에 매일같이 난자당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카르시안은 나에게 다정한 편지를 보내 줬어.
카르시안은 저 학생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나를 정말로 칭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티파티를 연 것만큼은 꼭.
난 카르시안에게 사춘기가 도졌느니, 어쨌느니 했던 게 무척 창피해졌다.
카르시안은 항상 내게, 이토록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난 대체 뭐가 무서워서 오늘 카르시안을 만나러 오는 걸 망설였던 걸까?
사실 3일 전, 클로드가 갑자기 나에게 수도에 함께 가자고 했을 땐 깜짝 놀랐다.
‘수도에요? 제가요?’
‘그래. 왜, 싫으냐?’
‘싫다기보단…….’
순간 내가 망설인 이유는 하나였다. 수도엔 아카데미가 있고, 아카데미엔 카르시안이 있다. 수도로 향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카르시안과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럼 바쁜가?’
‘아뇨. 제가 바쁠 게 뭐가 있겠어요.’
클로드의 말에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면.’
‘…….’
‘수도로 향하기 싫은 것도 아니고, 바쁜 것도 아니라면. 왜 망설이는 거지?’
난 불퉁한 얼굴로 클로드를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에 섞인 장난기와 짓궂음을 읽어 냈기 때문이다. 클로드는 나를 놀리고 있었다.
내가 카르시안 때문에 망설이고 있단 걸 알면서도!
하지만 클로드는 결국 물러서지 않았고, 난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애매해서 그냥 함께 수도로 가겠다고 말했다.
‘카르시안이랑 서먹해서 가기 싫어요.’라고 하기엔 카르시안에게 다정한 편지를 받은 직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조금 마지못해 아카데미에 왔는데, 휴.
“오길 잘했네…….”
그 덕분에 카르시안에게 쌓였던 일말의 오해를 흔적도 없이 녹여 버렸으니 말이다.
“그렇지?”
내가 어떤 의미로 중얼거렸는지 모를 텐데도, 클로드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양 맞장구를 쳤다. 올려다보니,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뭘 보냐는 표정인데.”
“제, 제가 어떻게 공작님께 그러겠어요!”
“후후, 농담이다. 자, 마음의 준비는 다 됐나?”
“네?”
정신 차리고 보니 우린 벌써 카르시안과 만날 수 있는 학생 면회실 앞에 서 있었다. 문 너머에 카르시안이 먼저 와서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 수도로 오기 전엔 마음의 준비 할 시간도 안 주셨으면서.”
“사흘 줬잖아.”
“사흘 전, 아. 그날엔 통보하신 거잖아요. 마음의 준비를 어떻게 해요?”
“그것도 그런가. 그래서 지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지 않나.”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던 클로드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난 어이가 없어서 클로드를 보며 입을 헤 벌렸다가 이내 조개처럼 꽉 다물었다.
“이런, 토라졌나?”
난 고개를 붕붕 저었다. 클로드와 입씨름을 할 바엔 카르시안을 만나 나눌 대화를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을 뿐이다.?
세상에선 그걸 토라진 거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뭐…….
클로드가 기분 풀라는 듯 오늘따라 수잔이 공들여 만져 준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줬다. 난 그 손길 한 번에 또다시 뾰족해졌던 마음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쭉거리며 말했다.
“카르시안을 만나면 잠깐이나마 서운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음…….”
사실 답이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카르시안을 오랜만에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한탄처럼 물은 내 말에, 클로드는 잠깐 침음하다 입을 열었다.
“우선은 반가워해 주는 게 어떠냐.”
“그건 당연하죠! 엄청 반가울 거예요. 근데, 그 이후엔 어떻게 해야…….”
“기뻐하면 되겠지.”
“기뻐, 하라고요?”
“그래. 만나서 반갑고, 다시 볼 수 있어서 기쁘고…….”
요컨대 카르시안을 만나도 그 전의 이야기는 굳이 하지 말란 소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클로드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신뢰는 서로에게 무엇 하나 숨기지 않는 깨끗한 관계에서 생긴다고들 말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이야기를 덮어 둘 필요도 있다. 아무리 부슬부슬한 모래라 하더라도 물을 붓고 계속 힘을 주면 결국 단단해지거든.”
내가 대답하지 않자, 클로드가 팔짱을 꼈던 손을 풀어 문고리를 돌리며 씩 웃었다.
“혼자 생각하고 반성해도 돼. 앞으로는 카르시안을 조금 더 믿어 보자고 말이야. 그게 이해심 아니겠나.”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 문이 열렸고, 클로드는 나 먼저 들어가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난 입 안에 가득 고인 ‘이해심’이란 단어를 마른 침과 함께 꿀꺽 삼키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에 누군가가 기대어 있는 게 보였다.
노란 햇빛을 받아 검은 머리카락이 다갈색 빛을 띠었다. 창밖을 보느라 돌아간 뺨엔 자잘한 솜털이 빛나고 있었는데, 그것조차 사랑스러운 소년이었다.
“카르시안.”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아주 많이 그리워했던 남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