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14화 (114/186)

114화

“야, 저기에 있다.”

“너무 대놓고 보지 마.”

“맞아. 아버지가 무려 제국 최초로 해상 무역로를 개척한 그 영웅이잖아.”

키득키득, 복도 벽을 따라 걷는 학생 세 명이 목소리를 낮춘 척 떠들어 댔다. 그들은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한 소년을 보며 비웃음을 흘린 것이었다.

흑단같이 검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요요한 빛깔이 도는 머리칼은 느슨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세상에 무관심해 보이는 눈동자는 분명 정열적인 붉은색인데도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또래에 비해 날렵한 얼굴 선이 유독 성숙한 느낌을 줬는데, 키도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어딜 가도 눈에 띄었다.

그러한 소년과 막상 거리가 좁혀지자 학생들은 언제, 무슨 말이라도 했냐는 듯 입을 싹 씻었다.

“그러고 보니 에돌란 교수님의 과제 범위가 어디까지였지?”

“아마 44챕터였을걸? 무역로의 변혁과정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무역’이란 단어가 나오자 또 저들끼리 재밌어 죽겠단 표정으로 키들키들 웃어 댔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년과의 거리는 부쩍부쩍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간 무감정한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은 것 같기도 했다.

“커흠.”

“으흠.”

학생들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찔끔거리며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젠장, 들었나 본데.’

‘흥, 이쪽으로 오겠군.’

‘으아, 나중에 문제 생기는 거 아냐?’

학생들은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며 같은 대상을 바라봤다. 그러나 앞에서 걸어오는 소년은 그런 그들의 옆을 무심하게 지날 뿐이었다.

“……?”

“아니…….”

학생들은 소년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옆을 휙 지나간 후에야, 저들이 완벽히 무시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게……!”

“지, 지금 다 들어 놓고도, 일부러, 일부러 우리를!”

학생들은 분통을 터뜨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뿐이었다. 소년의 뒤를 쫓아가 “야, 너!” 하고 붙잡는 이는 세 명 중 단 한 명도 없었다.

소년, 카르시안은 이러한 상황이 너무도 익숙했다.

기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런 따돌림 아닌 따돌림을 당했냐 묻는다면 카르시안은 단박에 “처음부터.”라고 대답할 터였다.

입학 초기엔 아카데미의 텃세인 줄 알았다.

카르시안의 아카데미 입학은 다른 이들보다 한참 늦었을 뿐 아니라 신학기도 아닌 중간 학기부터였다. 아무리 한 번 밀렸던 순번이 끝을 모르고 밀리다가 입학한 거라지만, 이제 막 십대인 치기 어린아이들에게는 그저 특혜처럼 보일 뿐이었다.

해서, 처음부터 카르시안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또 이미 친한 무리가 형성되어 있을 시기에 입학했기에, 카르시안도 자신이 겉돌 거란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동안의 일일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순진했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카르시안은 줄곧 혼자였다.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횟수가 늘어나고, 강의실과 복도에서 얼굴을 자주 마주쳐도 좀처럼 그의 곁엔 친구가 생기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 글라델리스 후작저에 의탁되었잖아.”

“얼마나 돈이 없고, 인망이 허접하면…….”

“그런데 라움디셀 백작 가문은 원래 어떤 것으로 유명했지?”

“글쎄, 가난함?”

카르시안이 따돌림 아닌 따돌림을 받는 이유, 그건 라움디셀 가문이 ‘백작가’이던 시절 때문이었다.

카르시안이 입학한 이 아카데미는 오로지 귀족 자제들만이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애초에 아카데미 이름조차 ‘하이페디움 국립 아카데미’였다. 그러니 이 하이페디움 제국에서 한 가닥 한다는 이들의 자제들이 모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유서 깊은 개국 공신 가문, 몇 대째 황성에서 한 자리씩 하고 있는 명문 가문 등, 내로라하는 권세가의 자제들이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가난함으로 유명했다니. 말이 좀 심한 거 아냐?”

“심하긴, 사실인데.”

“그렇게 가난했다고? 그래도 옷은 좋은 거 입고 있는데?”

“지금이야 공작이니까 그렇지. 벼락부자, 졸부. 뭐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런 이들의 눈에 백작가의 영식에서 공작가의 후계자가 된 카르시안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라움디셀이 갑자기 중앙 귀족으로 급부상했단 건 정적이 늘어났단 소리나 다름없으니까.

“그루안 상단은 대체 뭘 보고 라움디셀 공작령에만 지점을 낸 건지…….”

심지어 지금 하이페디움 제국에서 가장 상승세인 대상단 그루안 상단의 지점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초장부터 기를 확 죽여 놔야 해.’

‘그래야 나중에 어른이 돼서도 편하겠지.’

‘애초에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배알도 작을 거야.’

학생들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카르시안을 배척하기 바빴다. 물론 그들의 부모는 이러한 행태를 보면 거품을 물고 까무러칠 게 분명했다.

“라움디셀을 적으로 돌리려 하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귀족가의 자제라고는 해도 그들은 어렸다. 또 가문의 작은 후계자로 떠받들어지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철이 없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이들인 것이다. 정작 영애들은 가문과의 친목을 위해 카르시안과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도.

하여, 이 모든 정황을 알게 된 카르시안은 더 이상 아카데미에 정을 붙이려 하지 않았다.

‘조기 졸업을 하려면 학점을 더 채워야 해.’

라티아의 곁으로 얼른 돌아가야 하는 이유만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카르시안이 아카데미에 와서 가장 힘든 점은 저를 따돌리는 아이들도, 함께 방을 쓰고 싶어 하는 이가 없어 배정된 독방도, 라움디셀의 위상에 눈치를 살살 보며 뇌물을 바치는 교수들도 아니었다.

벌써 몇 달째 얼굴을 보긴커녕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 라티아가 너무도 보고 싶단 점이었다.

‘편지도 못 쓰고…….’

카르시안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따돌림은 카르시안을 외롭게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무려 라티아가 보낸 편지를 가로채 버리고, 카르시안이 라티아에게 쓴 편지를 저들끼리 몰래 돌려보는 치졸한 짓마저 했다. 그렇기에 카르시안은 라티아에게 짤막한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창피한 게 아니고, 라티아의 정보를 그들에게 내어 주기 싫었을 뿐이다.

내내 가만히 당해 주기만 하던 카르시안이 처음으로 검을 빼든 것도 그맘때쯤이었다. 카르시안은 라티아의 편지를 훔쳐본 이들을 모조리 끌고 나와 공식적인 결투를 벌였다.

촌뜨기, 가난한 귀족, 벼락부자, 졸부라고 놀렸던 이들은 카르시안을 우습게 보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세 합을 넘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이후 카르시안은 한동안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다른 적이 나타났다.

카르시안이 모퉁이를 지날 때였다.

“그 이야기 들었어?”

“응? 무슨 이야기?”

“라움디셀 백작가는 옛날에 너무 가난한 나머지, 죽은 백작 부인의 브로치도 팔아넘겼대.”

“뭐?”

“아, 나도 알아. 그걸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장녀가 되찾아 주고 피후견인 자리를 얻었다면서?”

카르시안은 모퉁이 너머에서 들린 말소리에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여태 사람들이 저를 두고 뭐라 떠들든 상관없었던 건, 무시하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언급된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장녀’는 라티아를 모욕적으로 부르는 말이었다. 그녀는 엄연히 공작성의 아가씨이며 최근엔 클로드의 명예 따님이 되었는데!

카르시안이 모퉁이를 돌며 물었다.

“누가 그런 말을 떠들어 댔지?”

“누구긴 누구겠어. 이플란트 영식이지!”

한창 뒷담화에 열을 올리던 학생들은 물음을 던진 이가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순간, 제 무리의 목소리가 아니란 걸 깨닫고는 떨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헉…….”

그리고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학생들을 내려다보는 카르시안을 보고는 쩡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어…….”

“끅…….”

어찌나 놀랐는지, 한 학생은 다 죽어 가는 소리까지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르시안은 학생들을 지나치며 이를 뿌득 갈았다.

‘개자식이 감히.’

헨델 이플란트. 황제의 총애받는 황비를 이모로 둔 명실상부한 차기 실세였다. 그 이플란트 백작가의 후계자가 바로 새로이 등장한 카르시안의 또 다른 적이었다.

‘한동안 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날 자극하려고 안달이 났었는데 기어이…….’

라움디셀 공작가는 한때 죽은 백작 부인의 브로치마저 전당포에 맡길 정도로 가난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유서 깊은 가문의 보물이랄 게 없단 소리다. 기사단을 갖고 있는 가문이라면 으레 전시하는 ‘보검’은 당연히 없었고, 이는 귀족으로서 아주 큰 수치였다.

게다가 카르시안은 검으로 아카데미를 평정했는데, 정작 가문엔 아무것도 없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헨델은 이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영식들 사이에서 ‘어느 검이 진짜 명검이냐’는 시비를 붙였다. 한창 검에 관심이 많을 십대 소년들은 이 시비에 열을 올렸고, 자연스레 깨달았다.

라움디셀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헨델은 라움디셀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결국엔 졸부 나부랭이에 그친다는 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각인시킨 셈이었다.

‘그것까지도 괜찮았어.’

하지만 지금은 라티아를 건드렸다. 상황이 달라졌다. 카르시안은 분노를 참지 않고 헨델이 있을 곳으로 향하려 했다.

“오, 라움디셀 공자님. 여기 계셨군요!”

때마침 찾아온 행정실 직원이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무슨 일입니까?”

“아, 다른 게 아니고 라움디셀 공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요?”

“예, 그리고 소문의 라움디셀의 아가씨도 함께요.”

“!”

카르시안은 분노가 사그라들다 못해 물에 던져진 솜사탕처럼 녹아 버리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 그가 검은 불꽃으로 활활 태우던 분노는 ‘라티아’라는 이름 석 자에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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