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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13화 (113/186)

113화

‘그래, 난 오로지 이 차만 우려 줬을 뿐이야.’

라티아는 다시 한번 바람개비꽃 뿌리차를 마셔 봤다. 생 뿌리를 깨끗이 씻어 팔팔 끓인 물의 맛은 거기서 거기다. 흙 맛, 생 뿌리의 맛, 아무튼 좋은 향과 맛은 아니란 거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선 이 차가, 정말 향기로운 꽃차라도 되는 것처럼 기쁘게 향을 맡고 음미하며 드셨어.’

레오나르도는 황제다. 괜히 왕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 표정을 읽는 건 무척이나 어려웠지만 빈말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라티아는 레오나르도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셔서 깨끗하게 비워진 찻잔을 내려다봤다.

클로드가 물었다.

“하면 이…… 차의 값으로 ‘헤바테인’을 받았단 말이냐?”

그의 말에 라티아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네. 맞아요. 정말…… 과분하죠?”

“흠…….”

클로드가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자신의 후계자에게나 주겠다던 검을 왜……. 이 차가 대체 뭐라고…….’

가만히 레오나르도에 대해 생각해 보던 클로드는 문득 애매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대상은 마주 앉아 인형처럼 앉아 저를 보고 있는 라티아였다.

‘그러고 보니…….’

깨끗하고 윤기가 도는 밀빛 머리칼은 밝은 햇살 밑에서 보면 백금발로 보일 정도로 가느다랗고 사랑스러웠다. 그 밑의 보라색 눈동자는 자수정이 떠오르지만, 어떨 때는 또 등나무 꽃처럼 연한 빛을 띠기도 했다. 동그랗고 발그레한 뺨, 조그마한 머리통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한 말만 하는 오밀조밀한 입술…….

‘루니아 황후 폐하의 어린 시절과 상당히 닮았군.’

클로드가 어릴 적엔 라움디셀 백작가는 꽤 부유했다. 해서, 그 또한 황제 레오나르도의 소꿉친구이자 황자비, 황태자비 시절을 거친 루니아의 어린 시절을 본 적 있었다.

지금껏 연결고리가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니 라티아는 어린 시절의 루니아와 상당 부분 닮은 구석이 있었다.

‘신기한 일이군.’

하지만 라티아의 친모는 후작가에서 몰래 구한 대리모라 했다. 그녀가 루니아일 확률은 갑자기 천지가 개벽할 확률보다 낮았다.

그렇기에 클로드는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 생각하고 넘겨 버렸다.

한편, 이제 막 라움디셀 공작령에서 텔레포트 마법으로 수도에 입성한 레오나르도의 표정은 냉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늘 어딘가 이지가 흐린 듯 보였던 눈동자는 무척이나 청명했다.

‘확실히…… 머리가 개운해.’

레오나르도가 머리를 쓸어넘기다 말고 습관처럼 엄지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문질렀다. 그가 가끔씩 금고아를 쓴 원숭이처럼 옥죄는 것 같은 편두통에 시달릴 때면 하던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편두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에메르나의 곁에서 이토록 오래 떨어져 있는 게 얼마 만이지.’

레오나르도는 에메르나의 곁에서 오래, 멀리 떨어질수록 두통이 심해졌다. 고통이 가장 심할 때엔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폭력적이고 난폭한 짓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혼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에메르나의 곁에 있을 때보다도 머릿속이 깨끗하다.’

조금 전, 수하가 슬슬 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할 때 보여 준 시간은 에메르나의 곁을 떠난 지 세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부터 눈알이 터질 것 같은 두통이 덮치고도 남아야 할 시간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레오나르도는 가만히 생각을 되짚어 봤다.

‘그래, ……그 차 때문이다.’

그 차가 주는 개운함이 너무도 기뻐, 레오나르도는 충동적으로 라티아에게 찻값이랍시고 ‘헤바테인’을 건넸다.

사실 레오나르도는 오늘 그루안 상단을 압박하러 찾아온 것이었다. 에메르나가 ‘앤니스 백작이 황비궁의 별채 증축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상심에 빠져 방 안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에메르나가 곁을 내어 주지 않아 레오나르도의 편두통이 극에 달했단 소리다.

레오나르도는 화가 났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그루안 상단 때문에 레오나르도만 피해를 입은 셈이 아닌가. 해서, 레오나르도는 그루안 상단의 본점과 라움디셀 공작령 지점에 직접 방문하여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기엔 라움디셀 공작의 명예 딸이라는 라티아 글라델리스, 아니. 라움디셀이 있었지.’

라티아는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그를 맞이했다.

‘무궁한 번영을 누릴 하이페디움 제국의 진실된 종, 라티아 라움디셀이 지고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 모습에 레오나르도는 숨이 멎을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고개를 숙이자 잘 빗어 넘긴 밀빛 머리칼이 앞으로 몇 가닥 흘러내리는 모습부터, 고개를 들자 크리스탈 샹들리에의 빛에 반짝이던 제비꽃물이 든 눈동자, 눈 밑까지 발그랗게 붉어 혈색 좋은 작은 얼굴과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던 자그마한 입술까지!

‘……루니아?’

그 모습은 레오나르도의 첫사랑이자 영원한 끝 사랑, 황후 루니아의 어린 시절과 꼭 닮아 있었다.

‘네?’

‘아니, 아닐세.’

레오나르도가 저도 모르게 루니아를 부르자, 라티아가 잘 듣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레오나르도는 황급히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수십 번 눈을 감았다 떠도 그의 앞엔 어린 루니아가 서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시간을 거슬러 온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레오나르도가 숨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라티아가 그런 레오나르도를 응접실 소파로 안내하며 말했다.

‘좋은 차가 있어요. 폐하께 직접 차를 대접하는 영광을 누릴 기회를 주신다면 무척이나 기쁠 거예요.’

그리고 그 차가 바로 바람개비 꽃 뿌리를 우린 차였다. 말린 잎이나 뿌리가 아닌 생 뿌리를 넣어 우리는 것에 처음엔 난색을 표했으나, 이내 향긋하게 퍼지는 향기에 구미가 확 당겼다.

‘이 차는 무엇이지?’

‘이번에 그루안 상단에서 새로 들여온 약초입니다. 제가 관심이 있어 대량 구매를 했는데, 최상등급의 뿌리를 차로 우려봤습니다.’

‘그래…….’

응접실에 퍼지는 향을 가만히 맡고 있자니, 안개가 낀 듯 몽롱했던 머리가 명쾌하고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잊은 듯이 한구석이 먹먹하던 가슴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시원해졌다.

‘이 차를 마시면 어떨까.’

레오나르도는 제 몸에 임상실험하는 기분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아련한 탄식을 뱉을 뻔했다.

잃었던 자아를 찾은 기분, 신대륙을 발견한 모험가의 심정, 미지의 세계가 기록된 고서를 펼친 학자의 감격. 레오나르도는 그 짧은 순간 오싹할 만큼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차를 마시면 마실수록 그 쾌감은 배가 되었고, 차를 절반가량 마셨을 때서야 레오나르도는 그것이 ‘고통 없는 삶의 기쁨’이란 걸 깨달았다.

저 멀리 황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를 전부 다 마시고 오길 잘했다. 아직까지도 그를 죽일 듯이 괴롭히던 두통은 자취조차 없었으니까. 레오나르도는 그 황성에서도 가장 안전한 곳에 있을 한 여인을 떠올렸다.

‘루니아…….’

내가 미쳤던 게 분명해. 어떻게 너를 두고 에메르나를, 어떻게 너와의 사이에서 난 아론을 두고 제네스를…….

분명 레오나르도가 선택한 일인데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살기 위해서 에메르나의 곁에 머물렀다 말해도, 결국엔 변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두통이 씻은 듯이 없어졌어.’

그것도 루니아를 쏙 빼닮은 어린 영애가 권한 차 한 잔으로 말이다. 레오나르도는 생각에 잠겼다.

‘아론의 여동생…….’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건 전적으로 레오나르도의 탓이었다. 그가 자신을 딱 죽지 않을 만큼만 괴롭히는 고통 때문에 에메르나의 곁을 맴도는 동안 루니아는 극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고 결국엔…….

‘그래,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이제는 떠올려 봐야 소용없는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맴도는 라티아를 지워 버릴 수 없었다.

그 일은 레오나르도에게도 아픈 상처로 남았지만, 열 달이나 아이를 품었지만 끝내 잃은 어미보단 못할 터였다. 레오나르도는 곧바로 루니아와 아론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 용서를 빌고 사죄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그 차가 무슨 차인지도 제대로 못 들었군.’

향기가 주는 개운함에 홀려 정신이 없었다. 오로지 그 상쾌함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을 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라움디셀 공작에게 편지를 보내 그 차의 정체를 알아내려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 사적인 연락도 모두 에메르나가 읽고 있으니까…….’

에메르나의 곁에 있으면 두통이 사라지는 것은 신의 안배가 아닌 악마의 사슬처럼 느껴졌다. 해서, 레오나르도는 저도 모르게 내심 에메르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중에 따로 은밀히 알아보는 게 좋겠군.’

레오나르도가 생각을 마무리했을 때쯤, 그가 탄 마차는 황후궁 앞에 멈춰섰다. 문득 바라본 황후궁이 무척이나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황후궁을 찾는 게 얼마 만이지.’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빈손으로 가기 민망했지만, 두통이 생기기 전에 얼른 루니아에게 가서 사정을 말하는 게 먼저였다. 레오나르도가 마차에서 막 내렸을 때였다.

“오셨습니까, 폐하.”

또각, 날 선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들린 목소리에 레오나르도는 다시 아찔한 두통을 느꼈다.

“큭…….”

“아아, 폐하.”

그가 비틀거리자 한 여인이 나붓한 걸음새로 다가와 레오나르도를 부축했다. 그 순간 레오나르도의 청명하기만 하던 머릿속이 다시 뿌옇게 흐려지고 말았다.

“폐하. 어서 황비궁으로 가시지요.”

썩은 장작이라도 때운 것처럼 매캐한 연기 틈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이토록 두렵고 공포스러울 수 있을까.

“이 에메르나가 편안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늘 그랬듯이요.”

마치 황제가 황후궁으로 올 것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황후궁 초입에서 레오나르도를 맞이한 이는 다름 아닌 에메르나였다.?

‘안 돼…….’

레오나르도는 이성이 뿌옇게 낀 안개 뒤로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총명하게 빛나던 녹색 눈동자는 다시 어둡게 탁해지고 말았다.

“아아…….”

“후훗.”

레오나르도가 기대자 에메르나는 야릇한 웃음소리를 흘리고는 그와 함께 황후궁을 벗어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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