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클로드는 어안이 벙벙했다.
황제와 독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주 보고 앉아 꺄르르 웃으며 차를 마시고 있는 라티아.
그런 라티아를 앞에 두고 마치 그리웠던 사람이라도 만난 듯 애틋한 시선으로 디저트 접시를 밀어 주고 있는 황제.
심지어는.
“와아, 황제 폐하께서 차고 계신 검이 바로 제국에서 가장 귀하다는 백수정 검, ‘헤바테인’이군요!”
“오, 곧바로 ‘헤바테인’을 알아보다니. 음, 그래. 이걸 네게 주마.”
“네, 에?”
본래 ‘헤바테인’은 레오나르도가 황태자 시절 떠났던 원정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검이었다. 백수정으로 만들어 아름답기는 하나 그저 예식용 검에 그칠 만한 것을, 레오나르도가 직접 마법으로 검날을 제련했다.
마검사인 레오나르도가 검을 잡기 시작할 무렵 가장 먼저 배운 게 바로 제련술이었다. 해서, 황제가 황태자 시절 승리로 이끈 전투의 전리품을 직접 제련했다는 점 덕분에 ‘헤바테인’의 가치는 결코 헤아릴 수 없다고들 입을 모았다.
실제로 ‘헤바테인’은 레오나르도가 황제로 즉위할 당시에도 그의 허리춤을 지켰다. 또 아론을 황태자로 책봉할 때도, 폐위시킬 때도, 제네스를 황태자로 책봉할 때도 함께한 명실상부한 진짜 황가의 보물이었다.?
‘훗날 자식이 황제가 되면 물려줄 거라 말했다던데…….’
그런데 그러한 명검을, 레오나르도는 왜 라티아에게 주고 있는 것일까?
클로드는 제가 들이닥쳤는데도 시선 한 줄기 보내지 않고 저들만의 세상에 빠진 레오나르도와 라티아에게 질투심을 느끼기도 전, 의혹에 빠지고 말았다.
“아, 제가…… 받아도 될까요? ‘헤반테인은’…….”
“그래. 내가 내 수족처럼 아끼는 보검이지. 그러니 네가 준 평온에 어울리는 값이라 생각하는데.”
“어울리는 값이라니요. 너무…….”
“설마 적나?”
“그럴 리가요!”
라티아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너무 많아요. 제가 해 드린 것에 비하면 너무도 과해요.”
“원래 어린아이에겐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크게 느껴지는 법이지. 네가 지금 태산처럼 크게 보는 것도 어른이 되고 보면 작게 보일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받아라.”
레오나르도는 허리춤에 찬 ‘헤반테인’을 풀어 라티아에게 직접 내밀기까지 했다. 라티아는 무척이나 당황한 듯 입까지 작게 벌렸다. 하지만 레오나르도가 한 번 더 받으라고 채근하자, 라티아는 곧바로 황실 사람 못지않게 우아한 자세로 인사를 올렸다.
“황송합니다, 폐하. 가문과 제 평생의 영광입니다.”
“하하하, 어린 것이 귀여운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레오나르도는 제 허리춤에도 오지 않을 만큼 작은 라티아가 귀여워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라티아가 묵직한 검을 두 손으로 받다 휘청거리자.
“어이쿠.”
깜짝 놀라며 다시 검을 빼앗고 라티아를 잡아 세워줬다. 클로드도 몸을 움찔거렸지만, 레오나르도가 한발 빨리 그가 나설 새는 없었다.
“조심하거라.”
“아, 감, 감사합니다. 보기보다 무겁네요…….”
“아무렴. 검신은 모두 백수정이고 검집은 백금으로 만들었으니 무거울 수밖에. 음, 네가 들고 가기엔 무리일 듯싶고…….”
레오나르도가 좋은 방도가 없나 고민하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때, 드디어 클로드가 발견되었다.
“오, 라움디셀 공작. 마침 잘 왔네.”
레오나르도는 라티아를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히고 클로드에게 다가가 검을 건넸다.
“자, 공작이 들고 가게. 라티아가 들기엔 무거우니 말일세.”
레오나르도가 호탕하게 웃자, 클로드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검을 받아들었다.
“황송합니다, 폐하.”
클로드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들었다. 레오나르도한테 온통 집중하느라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던 라티아도 그제야 그를 발견했다.
“공작님.”
라티아의 얼굴 만면에 환한 반가움이 들어찼다. 그건 꼭 마음 붙일 구석 하나 없이 불편한 자리에서 아빠를 발견한 어린 딸 같았다. 라티아의 표정을 본 레오나르도의 얼굴에 미미한 아쉬움이 어렸다.
‘음?’?
일순간 클로드의 시선이 레오나르도에게 향했다.
‘방금 폐하의 표정이…….’
분명 아쉬워한 것 같았는데, 그사이 레오나르도의 표정은 다시 여상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라티아가 도도도 클로드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레오나르도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명예 부녀라지.”
“아, 예. 쑥스럽게도 그렇습니다. 한데…… 벌써 수도에까지 소문이 퍼졌습니까?”
“그러려고 권세가의 영애들을 초청한 거 아닌가.”
피식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엔 어쩐지 짙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클로드는 한 손으로 검을 쥔 채 근처로 다람쥐처럼 달려온 라티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라티아도 익숙하게 클로드의 목을 감싸 안았는데, 그 모습을 본 레오나르도의 눈빛이 애수에 젖었다.
“딸이…… 애교가 많군.”
“아.”
“아.”
레오나르도의 말에 클로드와 라티아가 서로를 똑같이 돌아보다가 우스운지 웃음을 터뜨렸다. 애교가 많다니, 이런 소리는 또 처음 듣는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게 아주 보기 좋군. 질투가 날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폐하께서도 황녀 저하와 사이가 무척 좋지 않으십니까?”
레오나르도에게도 딸이 있었다. 에메르나 황비 사이에서 난, 이제 9살인 황녀가 말이다. 그런데 클로드와 라티아의 사이를 이토록 부러워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클로드가 의아해하며 물었으나, 레오나르도는 황녀의 존재를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짧은 탄성만 뱉을 뿐이었다.
그에 클로드는 레오나르도에게 새삼 질렸지만 라티아는 좀 달랐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정신이 든 듯 보이는 이후로 에메르나 황비와 관련된 모든 일을 잊은 것 같아.’
이 또한 무슨 이유가 있기 때문인 걸까? 라티아는 황제를 좀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였다.
“폐하, 슬슬 환궁하셔야만…….”
여태 문 쪽에 서서 지켜보고만 있던 수하가 레오나르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는 레오나르도에게 시계를 내보였는데, 그것을 본 레오나르도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래, 슬슬 돌아가야겠군. 음, 즐거운 시간이었다. 라티아.”
레오나르도는 클로드의 목을 꼭 끌어안고 있는 라티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티아는 클로드의 목을 감싸 안았던 팔을 풀러 레오나르도의 손을 잡았다.?
“네. 저도 아주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폐하.”
?
워낙 손이 작아 레오나르도의 손가락 세 개를 잡자 끝났다. 그걸 본 레오나르도의 얼굴에 그녀를 잔뜩 귀여워하는 미소가 걸렸다. 클로드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나의 무례를 용서하게, 라움디셀 공작.”
“무례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다만 연통을 주셨더라면 공작성에서 성심성의껏 모셨을 텐데, 그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음부터는 제발 좀 연락하고 오란 소리였다. 이를 알아들은 레오나르도는 빙긋 웃기만 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빠른 시일 내에 다시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군.”
“조만간 입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내 라움디셀 공작이라면 어전회의도 미루고 맞이할 테니.”
그리 말하는 레오나르도의 시선은 오로지 라티아에게 꽂혀 있었다. 아무래도 꼭 라티아와 함께 오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클로드는 라티아에게 집요하다시피 애정을 쏟는 레오나르도가 미심쩍었지만,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라움디셀 부녀는 레오나르도가 마차에 오르는 뒷모습까지 배웅을 해 줬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응접실로 향했다. 그루안 상단의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황제 영접에 다리가 풀려 상점 곳곳에 널브러진 채였다.
“제가 차를 준비할게요.”
그래서 라티아가 직접 차를 우렸는데, 조금 전 레오나르도가 마신 것과 같은 것이라 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클로드의 얼굴이 미묘하게 찡그려졌다. 라티아가 우린 차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모래, 진흙, 자갈의 맛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트라이던트 해적들과 함께 싸울 적, 백사장에 얼굴이 처박혔을 때 먹었던 그 모래 맛과 똑같았다.
“……흙 맛인데.”
클로드의 말에 라티아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죠? 그런데 황제 폐하께선 이 차를 아주 향긋한 꽃차를 마시듯 드셨어요.”
“뭐라고?”
아무리 그래도 이런 흙맛이 나는 차를 황제에게 진상했느냐고 물으려던 차였다. 클로드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허……. 폐하께 그런 괴식이 있는 줄은 몰랐군.”
?
클로드는 다시 입을 대기 두려울 정도로 맛이 없는 차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라티아가 직접 내려 준 차이니 더 마시긴 해야 할 텐데, 도무지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클로드는 찻잔을 내려 두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런데 황제 폐하와는 대체 무슨 대화를 한 거지? 꽤 화기애애해 보이던데.”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를 정도로 말이야, 하는 말은 간신히 삼켰다. 하지만 라티아는 일순간 클로드의 얼굴에 스친 서운한 빛을 읽었다.
“아, 그게……. 끙. 무서운 시간이었어요. 너무 긴장해서 주위도 안 보였던 거 있죠. 공작님께서 오셔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라티아가 슬슬 웃으며 달래 주자, 클로드가 피식 웃었다.?
‘이젠 아주 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다루는군.’
그런데 그게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져 기쁘다면 팔불출일까??
클로드가 아부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젓자, 실실 웃던 라티아가 곧장 웃음을 지우며 말했다.
“사실은요,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어요.”
“……음?”
“정말이에요. 전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오늘 막 들여온 이 약초, 바람개비꽃 뿌리를 달여 드렸을 뿐이에요.”
“이 차를?”
“네. 오로지 그뿐이었어요.”
라티아가 정말이라는 듯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클로드의 얼굴은 더욱 아리송해졌지만, 라티아의 눈빛은 생각에 잠겨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