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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11화 (111/186)

111화

“어서 오십시오!”

그루안 상단의 직원이 아주 씩씩한 얼굴로 날 맞이해 줬다.

“편지 보고 왔어요. 드디어 구했다면서요?”

“네. 첫 번째 공수 물품 마차가 어제 도착했습니다.”

“어제요? 하지만 편지는 오늘자던데요?”

“아, 예. 물건이 확실한지 제가 한 번 확인을 하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오는 동안 상했으면 새로 구하려고요.”

“아하,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다니. 고마워요.”

내가 빙긋 웃자 상단 직원이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상단주님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루안 상단이 그…… 파벌…….”

황후와 황비의 이야기를 말하나 보다. 그가 목소리를 확 낮추고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에 끼지 않게 또 따로 해결책도 마련해 주셨다고요.”

“아, 파도물망초요?”

“네.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나중에 예리엘 만물 상단주께서 그러시는데 황비 전하께서 파도물망초를 사용하는 건 꽤 극비라고 하더군요.”

“어? 그래요?”

아닌데? 나 이거 원작에서 읽은 건 물론이고 회귀 전에 아버지한테도 들었는데?

글라델리스 후작가는 아주 명망 높은 가문이지만 수도의 일과는 살짝 동떨어져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이런 극비를 알 리가 없었다.

“네, 황제 폐하 앞에서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모습’이라 주장한다 하더라고요.”

“아…….”

오, 그런 이유…… 넵…….

그래, 클로드에게 차인 후 오로지 미모만으로 연애결혼을 했던 레오나르도를 꼬셨으니 대단한 수완이긴 했다.

그러니 ‘난 자연미인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 하나쯤은 할 법도 하지. 근데 이상하게도 남자들은 그런 걸 좋아하고 또 속아 넘어가더라.

그건 그렇고 물건 검수가 끝나 편지를 보냈다 했으니, 물건을 봐야겠지?

“바람개비꽃은 어디에 있어요? 뿌리까지 잘 살아 있나요?”

“네, 그럼요. 근채류라도 되는 것처럼 뿌리도 실한 놈들만 골라 놨습니다.”

난 직원을 따라 상단 뒤쪽의 짐마차장으로 향했다. 메리와 앤도 내 뒤를 따라오며 궁금해했다.

“근데 왜 뿌리가 필요하신 거지?”

“음, 글쎄…….”

난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직원이 산삼을 감싸듯 이끼로 감싼 바람개비꽃 상자를 꺼내는 걸 지켜봤다.

“이겁니다. 일단 최상등급이 이렇게 네 개씩 다섯 상자고요. 상등급이 다섯 개씩 열 상자. 중급 이하는 따로 포장 없이 종이로만 감싸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건 서른 상자고요.”

“와, 그사이 엄청 많이 캤네요?”

“바람개비꽃은 뭐, 흰뿔 산에서만 자생하는 만큼 거기엔 널렸으니까요. 딱히 찾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최상등급도 더 구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와, 정말요? 그럼 상등급 이상으로 더 구할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중급 이하는 필요 없으십니까?”

“음, 아뇨. 있으면 좋죠.”

약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어?

물론 내가 지켜 낼 생각이긴 하지만, 만에 하나 클로드가 에메르나의 독을 먹었을 때를 대비해서 공작성에도 몇 뿌리 남겨 놓으면 좋으리라.

원작에선 그러니까…… 이 뿌리를 사용했지?

말려서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생약으로 쓰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원작에 나와 있었다. 그래서 이미 엄청나게 중독되어 있을지도 모를 루니아 황후에겐 꼭 살아 있는 뿌리를 주고 싶었다.

내가 바람개비 꽃을 한참 살피고 있을 때였다.

“으, 우아아앗! 지점장님!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쉿! 지금 라움디셀 아가씨와 함께 있는 거 안 보여?”

상점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깜짝 놀라 뛰쳐나왔다. 나에게 바람개비꽃을 보여 주고 있던 직원이 얼른 조용히 하라고 입에 검지를 댔지만, 직원은 방방 뛰기만 했다.

“아이, 이럴 때가 아니라고요! 빨리요! 아니다, 아가씨도 와 주세요!”

급기야 그는 나와 직원을 끌고 상단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메리와 앤이 당황해서 어찌할 새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광경은…….

* * *

“공작님, 공작님! 큰일 났습니다. 공작님!”

“음?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인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버틀러 때문에 창가에 서서 과녁이 박살이 난 사격장을 보고 있던 클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지금…… 지금 공작령에 그, 그……!”

“자네가 이렇게나 놀라는 일이라니, 심각한 일인가?”

마침 라티아가 상업지구로 놀러 가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괜히 나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라티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클로드는 얼른 버틀러 쪽으로 몸을 돌리며 컥컥 막히는 숨을 고르고 있는 집사를 달랬다.

“무슨 일이기에 그래. 천천히 말해 봐.”

하지만 그의 목소리도 라티아를 향한 걱정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클로드는 지금 찻잔을 든 채였는데, 그 찻잔은 버틀러의 이어진 말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공작령에, 황제 폐하께서 오셨다고 합니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조그맣게 벌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야! 황제 왔다며!”

헥터까지 문을 박차고 들어와 외쳐 댔다. 헥터는 너무 놀라 길길이 날뛰려고 했는데, 깨진 찻잔 위에 서 있는 클로드를 보고 멈칫 굳었다.

“어? 야, 너…….”

클로드는 여전히 입을 조그맣게 벌린 채 헥터 쪽으로 끼긱끼긱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클로드가 이렇게나 얼어붙은 모습은 헥터도 처음이라, 놀라 난리가 났던 마음이 되레 진정이 됐다.

헥터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버틀러와 얼어붙은 클로드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야, 일단 정신 차리고 빨리 그루안 상단으로 가 봐.”

“……그루안 상단? 거긴 왜.”

클로드는 그렇게 되물으면서도 머릿속에 바쁘게 울리고 있는 경보음에 정신이 사나웠다. 하지만 그 사나운 정신 사이에서도 또렷한 이름이 하나 있었으니.

“왜긴 왜야! 라티아가 그루안 상단에 갔는데, 황제가 거기로 바로 갔으니까 그렇지!”

라티아, 클로드가 가장 우려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예상하고 있던 이름.?

하필이면 오늘 라티아가 상업지구에 나갔다. 하필이면 오늘 황제가 그루안 상단에 왔다. 그리고 라티아는 그루안 상단과 무척이나 친하다.?

‘최근 대충 파악한 바로는 라티아가 그루안 상단과 무슨 일을 하는 것 같았어.’

그건 아마 그루안 상단에서 갑자기 흰뿔 나무를 독점하여 에메르나 황비의 별채를 증축하지 못하게 한 일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클로드는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젠장!”

클로드는 곧바로 외투를 챙기지도 않고 곧장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구두 굽에 깨진 찻잔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울렸다.

“야, 야! 클로드!”

“공작님!”

뒤에서 헥터와 버틀러가 그를 불렀지만 지금 클로드의 머릿속은 온통 라티아의 안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루안 상단은 수도의 본점 하나와 라티아와의 인연 때문에 만든 라움디셀 지점 하나, 총 두 개다. 라움디셀 지점까지 찾아왔단 말은 본점에선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뜻. 본점과 라움디셀 지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라티아의 존재 유무였다.

‘황제가 황비의 치마폭에 쌓여 천지 분간을 못 할 정도로 타락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황제가 직접 그루안 상단을 찾아오다니!’

대체 얼마나 바닥까지 타락한 건지! 문제는 황제가 이토록 찾는 이는 분명 라티아일 거란 소리다.

‘총애하는 황비의 마음을 상하게 했단 이유로 라티아에게 분노하고 있을 테지.’

그러니 황제와 라티아가 마주친다면, 황제는 분명 라티아에게 벌을 하려고 들 게 분명하다.?

3년 전 라티아가 공작령으로 오기 전, 황제는 그녀를 찾았다. 그 이유는 라티아가 글라델리스 후작이 귀족들의 약점을 모은 치부책을 읽었을까 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라티아는 읽지 않았다고 했지만, 토드엘 남작이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던 일을 알고 있던 것도 그렇고 확실하진 않아.’

라티아가 치부책을 읽었는데 그간 저를 믿지 못해서 읽지 못했다 말한 건 상관이 없다.

‘문제는 그걸 황제에게 들켰을 경우지.’

클로드는 곧장 마구간으로 향했다.

“고, 공작님!”

“당장 말을 꺼내라.”

“예, 예?”

마부가 깜짝 놀라 되물은 때, 헥터가 얼른 달려왔다. 버틀러도 헉헉거리며 뒤따랐다.

“아니, 야! 클로드! 너 어쩌려고 그래?”

“공작님, 갑자기 말은 왜…… 허억.”

하지만 클로드는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마부가 눈치껏 꺼내 온 말에 훌쩍 올라탈 뿐이었다.

“야, 너 설마……!”

“이랴!”

기겁한 헥터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클로드는 말을 몰고 마구간을 빠져나가 버렸다. 헥터와 버틀러, 마부는 벙쪄 그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클로드는 곧장 공작성을 빠져나가 상업지구로 향했다.

“아앗, 공작님!”

“공작님!”

상업지구까지 군마를 끌고 간 바람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 길을 터 줬다. 클로드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그루안 상단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루안 상단 앞에는 황실의 마차가 있었다.

이미 사람들이 한껏 모여 그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니, 들어가자마자 라움디셀 아가씨와 만났다지요?”

“황제 폐하께서 행차하신단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우리 이제부터라도 뭘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오?”

“누가 아니랍니까.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황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영지민들은 극도로 불안해했다. 클로드는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들 틈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 일단 흩어져.”

“아이고, 공작님…….”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영지민들은 공작이 직접 나선 걸 보고 한시름 던 얼굴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그들을 헤치고 나아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고 있는 상단원의 앞으로 섰다.

“아, 공작님!”

“라티아는 안에 있나?”

“예, 그런데 그것이…….”

“상황은 대강 알고 있다. 비켜.”

“아, 넵!”

상단원이 바짝 군기 든 얼굴로 문을 열어 줬고, 클로드는 라티아가 걱정되어 얼른 상단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클로드의 머릿속에는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라티아 또는 이미 포박되어 엉망으로 매질을 당한 라티아 등 불길한 상황이 재생되고 있었다.

‘황비에 미쳐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대신들도 죽인다는 황제라면 그러고도 남아!’

하지만 상단의 응접실까지 뛰어간 클로드가 마주한 것은…….

“와아! 정말요?”

“음, 그래. 만성 두통이 싹 가셨다.”

꺄르르 박수까지 짤깍짤깍 치며 웃는 라티아와 그런 라티아를 어딘가 그리움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푸근하게 바라보며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황제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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