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 *
사격장에 왔으나 집중이 되지 않았다. 모든 총알이 과녁에 맞긴커녕, 그 근처도 가지 못했다.
“하아…….”
총기의 반동으로 손바닥과 팔뚝이 얼얼했다. 찌르르하게 피로감을 호소하는 팔근육을 부여잡고 있으니, 내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메리가 다가왔다.
“아가씨, 이대로 가다간 안 하느니만 못해요. 괜히 근육통이나 얻어 내일 일정에 차질이 생기죠.”
“읏…….”
날카로운 말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생각을 집중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건 물론 좋죠. 하지만 결국 생각에 휘둘릴 거라면 어디에 앉아 있든, 몸을 움직이든 똑같다고 생각해요.”
나를 일깨우는 듯한 따끔한 일침에 정신이 다 얼얼했다. 난 괜히 총을 내려다봤다.
유리드가 말하길 이 리볼버는 내 손이 자람에 따라 크기를 키우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정말이었는지, 처음 받아 왔을 때보다 아주 조금 커졌다. 그래서 한 번 손에 익은 총을 갈지 않고 계속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 이 총은 그냥 총이 아니야. 유리드가 마음을 담아 만들어 줬고, 메리가 직접 가르쳐 주고 있는 총이야. 이 총을 잡고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실수를 하는 건 두 사람의 마음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메리는 총 덕분에 살아남았고, 거친 바다 위에서 목숨을 연명했고, 나의 하녀로 발탁됐다. 그러니 메리에게 있어 ‘총’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가 가르치는 모든 내용은 본인의 목숨을 걸고 경험한 결과물이었다. 그러한 메리의 가르침을 받겠다 말한 시점에서 난 메리의 기상을 계승받는 거나 다름없다. 내가 메리의 첫 번째 제자인 것도 사실이니까.
내가 사격장부터 가겠다 말했으니 사격장에 온 지금만큼은 여기에 온 집중을 다 해야 해.?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만 돌아가시겠어요? 그리고 편지를 확인하시겠어요?”
결국 메리에게 따끔하게 혼난 후에야 난 정신을 차리고 과녁을 노려볼 수 있었다.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라는 말이 있어. 총을 잡았으니 화약 냄새 한 번은 맡아 봐야지.”
자고로 여자는 배짱이라고 그랬다. 난 탄창을 열어 실탄을 밀어 넣었다.
“후우…….”
내가 숨을 고르며 탄환이 꽉 찬 탄창을 바라보자, 메리가 뒤로 조금 물러났다. 난 곧장 자세를 잡았고, 총구 끝에 과녁을 뒀다.
탕, 탕, ……탕!
한 차례 혼난 게 효력이 있나 보다.?
“……!”
난 과녁의 정중앙에만 세 발을 맞춰, 기어이 강철판으로 만든 과녁을 뚫어 버렸다.
“미친…….”
따라와 긴장하고 있던 앤이 저도 모르게 욕설로 감탄하다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앤에게 눈을 흘길 수 없었다.
최근 실력이 일취월장한 건 사실이나 10점을 맞추는 건 세 발에 한 번꼴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과녁에 구멍을 뚫어 버렸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
잠시 벙쪄 있던 메리가 박수를 쳤다. 난 여전히 과녁을 겨눈 채 몸의 긴장을 풀지 않았다가, 역으로 부는 바람에 섞인 화약 냄새를 맡고 나서야 총을 내렸다.
가까이 다가온 메리가 내가 선 자리에서 과녁을 보며 말했다.
“공작님께서 쉽게 뚫리지 않을 과녁이라 자신하셨는데, 하루 만에 꿰뚫어 버리셨네요. 그것도 정중앙을요.”
날 내려다보며 웃는 얼굴이 다정다감했다. 난 메리를 보며 하고자 하면 제아무리 내 마음을 뒤흔드는 일이라도 정리하고 해야 할 일을 똑바로 볼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다 메리의 도움 덕분이야. 헤헤…….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편지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을 마치자마자 파도처럼 밀려오듯 다시 떠오르는 카르시안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순 없었지만 말이다.
“다행이네요. 도련님의 편지를 읽을 때도 도련님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아, 응.”
난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내가 집중이 잘되지 않는단 핑계로 방으로 돌아갔더라면. 아니, 애초에 사격장도 오지 않았더라면 난 카르시안의 편지도 오롯하게 보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그 편지에 담긴 이야기가 내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더더욱.
하지만 이렇게 만족스럽게 총을 쏴서 그런가? 설령 카르시안의 편지 속 이야기가 또 내 마음을 슬프게 한다 하더라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카르시안이 보낸 편지는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뭐라고 쓰여 있어?]
내가 카르시안의 편지를 읽는다고 하자 [이제 와서 수습하려는 모양인데, 소용없어!] 하고 분개하던 삐로리가 관심을 보였다.
“궁금해? 아까는 읽지도 말라며?”
[크, 큼! 흠! 그래도 기껏 보내 왔는데 읽어 보자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이면 다 찢어 버릴 거지만.]
난 그런 삐로리에게 키득거리며 올라오라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삐쪼.”
삐로리가 끙차, 하고 힘을 주듯 날아올라 내 어깨에 걸터앉았다. 난 삐로리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자. 직접 읽어 봐.”
삐로리의 검은 깨 같은 눈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난 그런 삐로리를 보며 킥킥 웃었다.
세상에 주인의 편지를 직접 읽는 새가 어디에 있어?
내가 아니었다면 삐로리는 진작에 정체를 들켰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조금 뒤, 삐로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다야?]
“응. 이게 다야.”
이번에도 편지는 달랑 한 장뿐이었다. 하지만 저번처럼 날 슬프게 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축하한다니…… 미친놈인가?]
“아하하하!”
난 삐로리의 난데없는 욕에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사실 삐로리라면 편지를 읽자마자 욕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진심이래?]
“응. 진심인 것 같아. 내가 공작님의 명예 딸이 되어 티파티를 주최한 걸 아주 축하해 주는 거 말이야.”
카르시안이 보낸 편지엔 온통 축하하는 내용밖에 없었다. 사실 난 카르시안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르시안은 내가 입양되는 것에 학을 뗐었으니까.
하지만 웬걸, 명예 따님으로 인정받은 걸 아주 축하하고 티파티를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을 텐데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단 이야기뿐이었다.
[흥……. 저번에 보낸 편지하곤 영 딴판이네?]
“그러게 말이야.”
그땐 정말 사춘기가 도졌던 걸까? 사춘기가 도질 수 있나??
아니, 어쩌면 갓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예민해져 있던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환경이 바뀌어 몸이 피곤하면 날카로워지지 않나.?
약간 아기 고양이다운 면모가 있는 카르시안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또 나와 떨어지기를 무척이나 아쉬워했던 이가 바로 카르시안이다.?
한 번 이야기가 시작되면 구구절절 늘어지고 그리운 마음만 커질 테니 일부러 짧게 썼을 수도 있다.
[라티아. 너는 되게 괜찮아 보이네? 저번 편지랑 비교해서 더 서운해지진 않았어? 막 웃기나 하고 말이야.]
삐로리의 물음에 난 내가 연신 싱글싱글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 내 뺨을 더듬다가 멋쩍게 말했다.
“모르겠어. 마음이 여유로워진 것 같기도 해.”
마냥 투정을 부리기보단 카르시안의 입장을 뒤늦게나마 생각해 보게 됐다.
[그사이 자랐나?]
“응? 공작님이 집무실 벽에 줄 그어서 재 준 키는 별반 차이 없던데…….”
[키 이야기가 아니야. 마음이 말이야. 아니, 정신적으로.]
삐로리가 날개로 내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난 삐로리의 깃털 때문에 정전기가 인 머리칼을 정리하며 우물우물 말했다.
“그런가……? 근데 그런 거면 좋겠다.”
그렇다면 그사이 자란 건 나뿐만이 아니란 소리가 된다.?
카르시안도 자라서 이제 아카데미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이런 여유가 생긴 거겠지.?
내심 걱정하던 카르시안의 반응이 좋은 걸 확인하고 나니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간 것마냥 속이 다 시원해졌다.
“역시 사격장에 다녀오길 잘했어. 그러지 않았더라면 사격장에 가지 않을 걸 후회했을 거야.”
[에이, 뭘 후회하고 그래. 홀가분하게 사격장에 가면 될 일을.]
“아니, 그러진 못했을걸.”
[응? 왜?]
삐로리가 궁금하다는 듯 내 어깨에서 책상 위로 폴짝 뛰어내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난 그런 삐로리에게 그루안 상단에서 온 편지를 가리켜 봤다.
“안 봐도 뻔해.”
[응?]
“내가 그루안 상단에 급한 편지를 보내라고 한 일은 오로지 하나뿐이거든.”
삐로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연신 양옆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그런 삐로리에게 보이게 그루안 상단의 편지 봉투를 뜯어 보여 줬다.
[바람개비꽃…… 공수 완료? 응?]
“흐흥. 너는 그동안 밖으로만 싸돌아다녀서 모르겠지만, 사실 그루안 상단에 바람개비 꽃을 뿌리째 구해 달라고 부탁해 놨거든.”
[그건 왜? 그건 잡초잖아.]
“잡초라니. 엄연히 다 쓰임새가 있다고.”
한때 글라델리스 후작가에서 잡초 취급을 받았으므로, 전직 잡초인 나는 발끈했다. 하지만 삐로리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날개만 퍼덕거릴 뿐이었다.
“내가 뭐에 쓰려는지는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일단 난 그루안 상단에 갈 건데…… 같이 갈래?”
[아니. 난 또 해야 할 일이 생겼어.]
“응? 생겼다니?”
내가 되물었지만 삐로리는 카르시안이 보낸 편지만 한 번 힐끔거렸다. ‘다시 착해졌으니 찾아 줘야지.’ 하는 생각이 읽혔다.
찾다니, 뭘??
그러고 보니 삐로리는 저번에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흠, 수호천사의 일인가?
뭐,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싶어서 알겠다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메리, 앤 가자.”
“네, 아가씨.”
“좋아요!”
난 두 사람과 함께 그루안 상단이 있는 공작령 내의 상업지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