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티파티라니?
난데없는 소리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로드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양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갑자기…… 티파티는 왜요? 그리고 그걸…… 정말 저한테요?”
난 믿기지 않아 말까지 끌며 물어봤다. 왜냐면 가문에서 여는 모든 ‘티파티’ 종류는 안주인 또는 딸이 도맡는 역할이니까! 그렇기에 안주인도, 딸도 없는 라움디셀 공작성은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티파티를 열지 않았다.
그런데 그 티파티를 지금, 내가 주최해 줬으면 좋겠다는 그 말은……!
“공작님, 제가…… 정말요?”
목소리 끝이 떨렸다.?
말도 안 돼.
난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내가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자, 쿡쿡 웃던 클로드가 내게 다가왔다.
“뭐어. 음. 이편이 더 확실할 것 같아서.”
“……?”
“나는 분명히 너를 내 딸처럼 생각하고, 너도 나를 아빠처럼 따른다고는 하더라도 결국엔 공작성 안에서의 이야기지 않으냐.”
“그건…….”
“그러니 네가 지난번, 토드엘 남작가에 초청받아 그런 일을 겪는 거겠지.”
당시 내가 겪은 일을 상기한 건지, 나른하게 퍼지는 햇살처럼 온화하던 클로드의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를 악문 건지 볼 근육도 딱딱하게 굳은 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날 앞에 둔 탓일까? 클로드의 표정이 슬슬 풀렸다.
“모두에게 제대로 알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다.”
클로드가 내 머리통을 가볍게 짚고 부드럽게 슬슬 쓰다듬었다. 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가만히 클로드를 올려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클로드의 ‘명예 따님’이라는 것을 세상에 공표하겠단 소리였다. 또한 나에게 안주인이나 친딸이 열 수 있는 티파티를 주최하게끔 한다는 건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한 번만 더 라티아 건들면, 알아서들 해라. 난 라티아를 진짜 친딸처럼 생각하고 있으니.’라고……!
“아…….”
난 멍청한 소리를 냈다. 클로드는 내가 이 엄청난 상황을 받아들일 때까치 인내심 좋게 기다려 줬다. 따듯하고 다정한 시선을 보내며, 내내.
난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어쩐지 입안이 달큰해졌다. 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울컥 하고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울음이 차올랐다. 난 그걸 삼키기 위해 주먹도 꼭 쥐고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시야가 자꾸만 흔들렸다. 차오른 눈물이 자기 맘대로 일렁거리고 있는 모양이다.
“뭘 또 울고 그래.”
클로드가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눈가를 살살 쓸어 줬다. 조금 건조한 느낌이던 손가락에 내 눈물이 묻어나왔다.
“사실은 일찌감치 네게 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네 마음이 어떤지 몰라 지켜보기만 했지.”
“…….”
“그런데 이제 좋은 때가 온 것 같아서. 내 생각은 이러한데 너는 어때.”
큼, 클로드가 목을 가다듬고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 볼래?”
클로드는 아직 내가 준비되지 않았을까 봐 아주 조심스러워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내가 라움디셀 공작성의 아가씨가 되고 클로드와 마음이 맞는 부녀 사이가 되는 건 원작에서도, 이전 생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내가 클로드의 양딸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공표되었을 때, 세상에 불러일으킬 바람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겠어…….
그래서 더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다. 난 가만히 클로드를 바라봤다. 클로드는 나와 대화를 할 때마다 매번 기다려 줬다. 이 작은 머리로 어려운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내가 충분히 생각하도록 항상.
이윽고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해 볼게요.”
“……정말?”
이번엔 클로드가 놀랐다. 그가 늘 나른하게 반쯤 감겨 있던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리며 카르시안과 똑같은 붉은색 눈동자를 전부 보여 줬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 붉은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난 그게 좋아 헤실헤실 웃으며 여전히 내 볼을 살짝 건들고 있는 클로드의 손등을 잡고 그 위로 기댔다.
“처음이라서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내가 손바닥에 뺨을 기대자, 잠시 굳은 클로드가 이내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굳이 잘하려고 할 필요는 없어. 부담 없이, 네가 즐길 수 있는 만큼만 해. 하지만 넌 내가 이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결국엔 열심히 하겠지. 잘하려고.”
이미 나를 다 파악하고 있는 클로드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한번 네 마음껏 해 봐. 세상에 나의 명예 따님으로서 던지는 출사표가 되는 자리인데, 한 번쯤은 무리를 해도 좋겠지.”
클로드는 결코 나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법이 없다.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맡겨 준다. 안 되는 건 끝까지 안 되고, 해야 할 것만 명확했던 나의 친아버지와는 굉장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고개를 끄덕여 보일 수 있었다.
“네. 맡겨 주세요!”
라움디셀 공작가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 라움디셀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클로드의 신임을 받는 나를 제대로 보여 줄 것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이야기를 카르시안이 들으면 그 아이는 뭐라고 할까?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카르시안이 생각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지만 카르시안은 아니겠지. 그러니까 내 안부조차 궁금해하지 않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묵직하게 아파 왔지만, 어쩌겠어. 난 차오르는 한숨을 애써 기쁜 생각으로 억눌렀다.
* * *
“제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부디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라요.”
난 오랑제리에 마련한 티파티장에 모인 영애들을 보며 인사했다.
“어머나, 아니에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공작성에 들어왔다니, 꿈만 같아요!”
“영광이에요. 라움디셀 아가씨.”
“아니, 이젠 공녀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티파티장에 모인 영애들이 꺄르륵 웃으며 이야기했다. 난 그들에게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그런, 그렇게 과분한 호칭을 들을 수는 없어요. 그러니 부디 원래 부르던 대로 불러 주세요.”
“어머나, 겸손도 하셔라.”
“하지만 공작님께선 분명 아가씨가 공녀님이라고 불리는 모습을 보고 싶으실 거예요.”
“맞아요, 맞아요. 이렇게나 성대한 티파티를 열면서까지 자랑하고 싶은 ‘딸’이잖아요.”
영애들이 부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다시 한번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 사이에서 영 수줍다는 듯 웃기만 했다.
“정말 귀여우신 아가씨예요.”
“그간 뵐 수 없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요.”
“저도 황성 경매 전야 파티 때 잠깐 뵌 게 다였거든요.”
“이렇게 티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무척이나 영광이에요.”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영애들 말마따나, 나는 오늘 일전에 클로드가 맡긴 티파티를 열었다.
“그런데 정말, 공작성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 공작성에 처음으로 들어올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영애들이 분에 넘치는 기쁨을 누린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녀들의 얼굴엔 이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는 오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뭐, 당연히 그렇겠지.
사실 이 자리는 클로드가 공작위를 받고 처음으로 공작성에서 연 파티이다. 그는 성이 어수선하단 핑계로 귀족이 작위를 받았을 때 으레 여는 축하 연회조차 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내가 티파티를 연다고 했을 때, 클로드가 나를 딸이라고 인정한 것과는 별개로 ‘과연 누가 초대받을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컸다.
실제로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진짜’ 권세가들뿐이다. 내가 연 티파티라서 어린 영애들뿐이지, 황태자인 제네스도 관심을 가졌다고 들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저렇게 ‘나니까 여기에 온 거지.’, ‘나를 초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하고 오만해하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공작령의 다른 귀족 영애분들도 뵐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아쉽게 됐어요.”
외무 대신의 손녀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아, 그건…….”
내가 가슴 아픈 척 옅은 숨을 뱉자, 다른 영애들이 코웃음을 쳤다.
“라움디셀 아가씨의 상냥함조차 알아보지 못한 분들이에요.”
“네에. 그런 분들과 친하게 지냈다간 영애의 친조부께서 경을 치실 거예요.”
애초에 급도 맞지 않는데 뭐하러 궁금해하냐는 뜻이었다.
사실 토드엘 남작가에서 로레나를 따라 나를 무시했던 이들이 염치도 없이 초대장을 달라는 뉘앙스의 편지를 보냈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사죄 선물과 함께 말이다. 물론 초대받은 이는 아무도 없다.
“그나저나 조금 전에 보셨죠? 공작님께서 직접 나와서 맞이해 주셨잖아요.”
“그러니까요. 저 깜짝 놀랐어요. 왜냐면 전 수십 번을 졸라야 아버지께서 간신히 나오시거든요.”
“저도예요. 그것도 마지못해 말이죠. 그런데 공작님은 무척 즐거워 보이셨죠?”
사실 딸이 연 티파티에 가주가 직접 나와서 환영을 해 준다는 것, 그건 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 보여 주는 수준이 아니었다. ‘우리 딸 최고!’ 하고 현수막을 걸다 못해 제국에 전단지를 뿌리는 수준의 딸주접이었다. 언제나 체면과 입장을 중시하는 귀족 어른들에겐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었고 말이다.
“심지어 같이 앉으려고도 하시려는 것 같던데요?”
“맞아요. 라움디셀 아가씨께서 창피하니까 저리 가라고 하지 않았다면 진짜 같이 앉았을지도 몰라요.”
영애들이 귀여운 아이를 놀리듯 키득키득 웃었다. 난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왜냐면 우리와 같이 앉아서 함께 파티를 즐기려는 걸 전생식으로 비유하자면 딸 친구들이 놀러 오자 딸의 방에서 나가지 않고 같이 과일을 집어 먹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내 얼굴이 화끈거릴 수밖에!
고마운데, 과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