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에메르나가 면전에 대고 이러한 창피를 당하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황제의 눈에 든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에메르나는 너무도 정신이 혼몽하여 멍하니 입만 벌렸다.
그러한 에메르나를 보던 아론은 아이리스의 앞으로 가, 에메르나와 완벽히 대치했다.
“하물며 아이리스는 황후 폐하의 수족입니다. 그런 이에게 손을 올리시다니요.”
이게 진정 환자를 위하는 사람의 태도냐 묻는 표정은 고고하기만 했다.
아론은 이제 겨우 14살이건만, 그 목소리에 담긴 위엄은 결코 어린아이답지 않았다. 아무리 폐위되었다 하더라도 한 차례 황태자라는 자리에 책봉되었기 때문일까? 아론은 서 있는 자태마저 완벽했다. 에메르나는 아론과 자신의 친아들, 제네스를 비교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다.
에메르나가 턱 끝을 오만하게 든 것과 대비되게 꽉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저 제게 불경한 태도를 보인 아랫것을 교육하려 했을 뿐입니다.”
“불경한 태도요?”
“제게 제대로 된 인사와 자세도 갖추지 않고 그저 황후 폐하께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기만 하더군요. 황후 폐하께서 몸이 좋지 않아 아랫것들의 교육에 힘쓰지 못하는 건 익히 알고 있으나, 너무 방만해진 것 같습니다.”
에메르나가 아론의 뒤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아이리스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는 시녀장으로 황후궁의 모든 시녀와 하녀들을 관리하는 이잖습니까. 그러한 시녀장이 이토록 건방을 떨다니요. 황후궁의 기강이 흐트러질까 봐 염려됩니다.”
에메르나의 말에 아론은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에메르나가 멸시하며 깎아내리고 있는 이는 루니아의 오랜 친우이자 아론의 유모였다. 십여 년 전, 그 누구보다 건강했다는 루니아의 몸이 급격히 악화된 이후 아이리스는 아론의 또 다른 어머니나 마찬가지였다.
‘하, 아이리스를 건들다니.’
아론은 에메르나를 이대로 돌려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큼, 아론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저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군요. 황후궁의 시종들은 황비궁의 시종보다 우수하여 때때로 황비궁으로 차출되어 가지 않습니까?”
“…….”
“당장 어제만 하더라도 차출되어 갔지요?”
에메르나의 궁을 채운 이들은 모두 본래 황후궁에서 일하던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아론의 말은 ‘황후궁 사람들의 충의가 부러워서 억지로 데려간 주제에 이제 와서 딴소리냐’는 뜻이었다. 이를 알아들은 에메르나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지만, 아론은 멈추지 않았다.
“하나, 황비 전하께서 보시기에 그렇다 하시니 이는 제가 황후 폐하께 따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또한 황비궁으로 간 이들이 황비 전하께 민폐를 끼칠까 걱정되니 반환받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황비궁의 시종들은 아주 우수합니다. 제가 따로 교육을 하고 있으니 그리하실 필요는―”
“아닙니다. 황비궁은 황제 폐하께서 가장 자주 방문하시는 곳이지 않습니까. 그런 곳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되지요. 하면, 그리하는 줄 알고 있겠습니다. 모두 황비 전하의 뜻대로 하는 것이고 아이리스의 용서를 빌기 위해 하는 것이니 번복은 없겠지요?”
아론은 에메르나의 말허리를 자르고 아예 대화까지 끝마쳐 버렸다. 아론은 순식간에 황후궁의 사람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것과 동시에 빼앗긴 황후궁의 사람들마저 되찾았다. 그의 섬광 같은 대화 속도에 에메르나는 벙쪄 버렸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에메르나는 반박하려 했지만 주위에 느껴지는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여긴 황후궁이라 에메르나에겐 적진이고 아론에겐 홈 타운이다.
‘여기서 더 말해 봐야 나만 손해야.’
결국 에메르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발 물러서는 걸 택했다. 나중에 마음에 바뀌었다는 둥 황제에게 달려가면 해결될 일이니까.
아론은 가져온 센시아베리 꽃다발을 아이리스에게 전했다.
“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폐하를 잘 부탁하네.”
아이리스와 아론은 에메르나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저들끼리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 완벽한 무시에, 에메르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가 뭐라 말하려는 때였다.
“한데, 황후 폐하께서 걱정되어 오셨다는 분께서 어찌 빈손이십니까?”
아론이 에메르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에메르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아론에 분개하느라 ‘병문안을 왔는데도 빈손인 상태’를 간과하고 있었다.
에메르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아론이 다 안다는 듯한 표정에 가벼운 비소를 얹어 말했다.
“아, 안부만 전하러 오신 겁니까? 그렇다면 시녀장인 아이리스가 대신 전해 줄 터이니 황비 전하께서는 걱정 마시고 저와 함께 돌아가시지요.”
“……네. 그리하지요.”
결국 에메르나는 아론과 함께 황후궁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말없이 복도를 걷다 황후궁 앞에서 헤어졌다.
“전 도서관에 볼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참, 황후궁 건은 제 보좌관을 통하여 황제 폐하께 건의를 올려놨으니 황비 전하께서 신경 쓰실 건 없습니다.”
“언제 그걸…….”
에메르나는 복도를 걷는 도중 슬그머니 사라진 아론의 보좌관을 떠올렸다.
‘설마 그때?’
그녀의 고운 눈썹 사이가 일그러졌다. 아론 또한 그것을 봤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에메르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리며 아론을 내려다봤다.
‘어린 것이 벌써부터 능구렁이가 다 됐구나.’
아론의 보라색 눈동자는 청순하고 가녀려 보이는 루니아의 것과 달리 무척이나 강인한 인상을 남겼지만, 결국 모자지간이라고. 두 사람은 몹시 닮아 꼭 루니아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에메르나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것 같았다. 아론이 속으로 조소했다.
‘아무렴요. 능구렁이가 되고 말고요. 적자로 태어났지만 서자에게 자리를 주기 위해 열 살에 황태자 자리에 올랐다가 그새를 못 참은 총비의 술수에 의해 폐위당하면 그렇게 되고 말고요.’
사르르 접히는 눈웃음은 지나다니는 하녀들이 얼굴을 붉힐 정도로 무척이나 화사했다. 그 탓에 이를 본 시종들은 에메르나와 아론이 다정다감하게 이야기하는 줄 착각했다.
“휴, 다행이야 두 분의 사이가 저렇게 좋으니 이제 황성에도 평화가 찾아오겠어.”
“쉬잇. 듣는 귀가 많아! 하지만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하지.”
시종들의 이야기를 보아, 에메르나가 나중에 황제에게 ‘황자가 건방지다’고 항의한다 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듯싶었다.
아론은 나른하고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에메르나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에메르나는 제 인사를 받기 전 휙 몸을 돌려 도서관 쪽으로 사라지는 아론의 뒷모습만 바라봐야 했다. 그의 뒤로 까드득, 끄드득……. 에메르나가 이를 악문 채 갈고 있는 섬뜩한 소리가 흘렀다.
“아, 날씨 좋다. 어머니께서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인데, 아쉬워.”
그러거나 말거나, 아론은 화창한 한여름 날씨를 만끽할 뿐이었다.
* * *
카르시안에게 편지가 오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다른 편지는 단 한 통도 오지 않았다. 나에게 짤막한 편지를 보낸 카르시안이 괘씸했던 것도 잠시, 두 달간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서 편지를 쓰던 참이었다.
“삐륵, 삐릭!”
한동안 뻔질나게 밖으로 나돌던 삐로리가 탁탁탁, 불만스럽다는 듯 큰 발소리를 내며 다가와 내가 쥐고 있는 펜대를 쪼았다.
“아이, 왜 자꾸 방해하는 거야.”
난 손으로 삐로리의 가슴을 막아 책상 끝으로 밀어냈는데, 삐로리는 파드득 날아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뭐하러 편지 쓰냐고!]
결국 삐로리가 발로 동물어 번역기 펜던트를 조작해 전원을 켜 버렸다.
“뭐하러 쓰냐니, 궁금하잖아. 잘 지내고 있는지, 밥은 잘 먹는지…….”
[그런 게 왜 궁금해? 그 녀석은 너한테 그런 걸 궁금해하긴 했어?]
“그건…….”
편지 내용을 떠올린 내가 입술을 오물거리자, 화난 삐로리가 내 손에서 펜대를 뺏어 책상에 패대기쳤다.
“앗!”
그 바람에 펜촉에 묻어 있던 잉크가 편지지에 흩뿌려졌다.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바보짓 막지!]
삐로리가 성질나서 빽빽 소리를 질러 댔다. 난 나의 일에 이토록 과하게 몰입하는 화를 내는 삐로리를 바라보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알았어, 진정 좀 해. 편지 안 쓸게.”
[그래! 쓰지 마. 절대로, 알았어?]
삐로리의 이마를 열심히 쓰다듬어 줬지만 삐로리는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괘씸한 녀석. 내가 이제 나가서 직접 찾아주나 봐라!]
“찾아주다니, 뭐를?”
[그, 그런 게 있어!]
급히 말을 돌린 삐로리는 한참이나 꿍얼거렸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그래, 뭔가가 있나 보다. 그런 삐로리를 달래 주던 무렵,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름 아닌 클로드였다.
“공작님!”
매일같이 보는 얼굴이지만 왜 볼 때마다 이렇게 반가운 건지! 아니, 클로드가 내 방에 찾아온 건 이틀 만이긴 하다. 난 괜히 들뜬 마음에 삐로리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삐로리와 놀고 있었나? 그런데 책상이…….”
클로드의 시선이 잠시 잉크로 엉망이 된 책상에 닿았다. 난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실은요. 카르시안한테 편지를 쓰고 있었어요.”
“음?”
“그런데 삐로리가 자꾸 방해를 하지 뭐예요.”
난 클로드에게 다가가 속닥거렸다.
“아무래도 저번에 카르시안이 제게 보낸 편지 때문에 화가 났나 봐요.”
“으음.”
클로드가 알만하다는 듯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삐로리가 카르시안을 미워해서 떨떠름해 보이는 표정 뒤로 나를 향한 안쓰러움이 보였다. 동시에 삐로리 못지않게 카르시안을 괘씸해하는 마음도.
난 공작님하고 삐로리가 달래 줘서 이제 정말 괜찮은데…….
하지만 클로드는 아닌지, 내게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렸다. 또 사과를 하려는 모양이다. 난 얼른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그런데 공작님, 무슨 일이세요?”
“아, 음. 뭐. 내가 네 방에 오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클로드의 말에 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멋쩍어서 뒷목을 주무르며 말하는 건 정말 카르시안과 꼭 닮았다.
아니, 카르시안이 클로드를 닮은 거지, 참.
내가 웃기만 하자 클로드가 슬쩍 따라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말이다. 네게 부탁을 하나 하려고 한다.”
“부탁이요?”
“그래. 티파티를 하나 주최해 줬으면 좋겠는데.”
“티……파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