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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05화 (105/186)

105화

“황비 전하!”

“어, 어찌……!”

“체통을 지켜 주시옵소서!”

황후궁 사람들이 들이닥치듯 뛰어오는 에메르나를 보며 경악했다. 에메르나는 그들을 지나치며 코웃음을 쳤다.

‘흥, 말은 그렇게 하면서 한 명도 막아서지 않는군.’

에메르나 황비는 레오나르도 황제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는 총비였다. 그런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황제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아무리 황후궁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황비인 에메르나의 눈치를 본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괘씸해. 몸으로 막지 못할 것 같으면 말도 하지 말아야지.’

황후궁의 주인인 루니아의 눈치를 보느라 목소리는 높이면서 몸은 낮추는 시종들이 배알 없어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행실이 이해가 갔다.

‘다 힘이 없어서 그렇지.’

저들이 저렇게 비열하게 굴 수밖에 없는 이유, 그건 그들에게 부와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은 가냘픈 여인의 머리 위에 씌인 금관의 무게도 버티게 해 준다.

‘그것이 제아무리 독을 먹어 병든 여인이라 할지라도.’

에메르나는 저 멀리 보이는 황후의 침실을 보며 입 안을 씹었다. 시종들의 소란에도 게 무슨 일이냐 묻지도 않고, 나와 보지도 않는 황후가 바로 이 부와 권력의 편애를 가장 열렬히 받고 있는 이였다.

‘꼴에 개국 공신 가문이라고…….’

황후 루니아의 가문은 아주 먼 옛날, 황가인 에멜하르트와 함께 손을 잡고 이 하이페디움 제국을 세운 오르카니오 대공가였다.

오르카니오는 에멜하르트 초대 황제의 동생이자 개국 공신으로 대공 작위를 받았다. 이렇기에 오르카니오 대공 가문은 하이페디움 역사상 유일한 대공 가문이었다. 또 역대 황후 최다 배출 가문이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황제가 즉위할 당시에도 오르카니오 대공 가문의 도움이 컸지.’

에메르나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일그러뜨렸다. 사실 레오나르도와 루니아는 오랜 소꿉친구이며 연애결혼을 했으므로 ‘도움을 줬다’는 표현은 부적절했지만, 에메르나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화, 황비 전하.”

“황비 전하를 뵙습니다.”

루니아의 침실을 지키는 기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에메르나는 제가 이토록 소란을 피우며 달려왔음에도 저를 막긴커녕 황송해하며 고개를 숙이는 기사들을 보고 제법 만족해했다.

‘황후궁의 기사들마저 나를 가로막지는 못해.’

아, 황제의 총애란 어쩜 이다지도 달콤한 건지!?

에메르나는 가슴 깊은 곳이 뜨거운 권력 맛으로부터 차오르는 환희에 젖어 드는 걸 느꼈다. 설령 그 총애가 만들어진 총애라 하더라도 말이다.

“내가 왔다 알리게.”

“네, 알겠습니다.”

게다가 에메르나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흐르는 꿀 같은 금발과 청명한 아침 햇살을 머금은 호수 같은 눈동자는 뭇 남성들을 상사병에 걸리게 하기 안성맞춤이었다. 해서, 대답하는 기사의 말끝이 살짝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메르나는 이것에 큰 기쁨을 느꼈고 말이다.

그런데 이때였다.

“송구합니다만, 황후 폐하께선 오늘 몸이 좋지 않아 황의로부터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는 말을 듣고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한 여인이 감히 에메르나에게 축객령을 내린 것이다. 에메르나는 심기가 꿈틀거렸다.

기실 지금껏 그 누구도 그녀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하물며 황제조차 몸을 비틀어 손수 문을 열어 주는 여인이 에메르나였다. 한데, 그러한 에메르나를 사사건건 방해하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

‘아이리스…….’

바로 루니아의 충성스러운 심복이자 황후궁의 시녀장, 아이리스였다.

아이리스는 고요한 눈빛으로 에메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흔에 가까운 나이이므로 눈가와 입가에 진 주름은 고집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잘 곱게 빗어 넘긴 잿빛 머리칼과 무감정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의 빛깔 덕분에 고지식하고 깐깐하다기보다는 위엄 있어 보였다. 황비인 에메르나조차 없는, 모두에게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위엄이 말이다.

에메르나는 그 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이를 까득 물며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어디, 얼마나 좋지 않기에 감히 황제의 총비인 저를 만나지 않느냔 뜻이었다. 달리 말하면 고작 시녀장 주제에 감히 총비인 자신이 황후를 독대하는 것을 가로막냐는 협박이기도 했다. 하지만 루니아가 황후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시녀로 황후궁에서 일했던 아이리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네.”

딱딱하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어디가 얼마나, 어떻게 좋지 않다는 말조차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에메르나는 경을 쳤겠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리스에겐 그럴 수 없었다.

‘뭐 하는 년인지 도통 모르겠어.’

사실 에메르나는 이미 몇 차례나 아이리스를 죽이려고 했다. 그녀 때문에 루니아를 골탕 먹이는 데에 실패한 게 몇 번이다. 또 아이리스는 오랫동안 황후궁에서 일해 온 시녀로, 그녀의 뒤엔 뤼델 백작가가 버티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론을 폐위할 당시 뤼델 백작가에선 드세게 반대를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메르나는 아이리스를 죽일 수 없었는데.

‘독도, 살수도, 마차 사고도, 도통 통하지가 않아.’

에메르나가 아이리스를 해치려 할 때마다, 아이리스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에메르나의 손길을 피해갔다.

‘진짜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황후의 수호천사야, 뭐야.’

물론 에메르나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겐 수호천사가 있고, 그들의 도움으로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동화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정말 신의 권능을 갖고 있는 수호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위험으로부터 살아남고, 또 루니아를 지켰다.

아이리스가 없었더라면 루니아는 진작 죽었을 것이다. 아론과 함께.

“그렇지 않아도 쇠약하신 분께서 오늘따라 몸이 좋지 않다 하시니 걱정이 되는구나. 내 직접 황후 폐하께 이 걱정되는 마음을 전하고 싶으니 비키게.”

“거듭 송구합니다만 황후 폐하께서 직접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설령 황제 폐하께서 오신다 하더라도 사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와도 못 들어간다, 그러니 돌아가라는 아이리스의 말에 에메르나의 결 좋게 빗어 내린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제가 이따위 궁에 오긴 왜 와! 내가 여기에 못 오게 하려고 얼마나……!’

순간 울컥한 그녀지만 이내 빠르게 진정을 되찾았다.

“이 황비의 간곡한 부탁에도 안 되겠는가? 황후 폐하께서 심히 걱정되어 그러네.”

에메르나에겐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그루안 상단을 어떻게 꾀어냈는지, 알아내야만 해.’

그루안 상단은 순식간에 세력을 부풀려 황성에 약초까지 대고 있다. 무슨 목적인지 흰뿔산 나무꾼들을 매수했으면서, 에메르나의 기분이 상할까 봐 파도물망초 꽃을 보내 왔다. 하지만 이건 오히려 에메르나의 심기를 거슬렀는데.

‘어떻게 앤니스 백작이 흰뿔 나무로 내 궁에 별채를 지어 줄 거란 걸 알아낸 거지?’

이건 앤니스 백작이 에메르나에게 아첨처럼 말했던, 다시 말하면 사적인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루안 상단이 나와 앤니스 백작의 사적인 대화 내용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기 위해선 여태 잠잠하던 황후가 왜 갑자기 나서서 그루안 상단을 매수했는지,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건지 알아내야만 해.’

그러지 않으면 훗날 그루안 상단은 에메르나에게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대로 루니아와 손을 잡고 에메르나에게 대적하는 세력으로 클지도 모른다.

‘그건 안 돼.’

그루안 상단의 뒤엔 예리엘 만물 상단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예리엘 만물 상단주는 마법사란 소문이 파다했다.

‘코르티잔 아리엔느의 말에 의하면 그냥 마법사가 아니고 마탑의 주인이라고 했어.’

물론 아리엔느의 말이라고 다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만약 코르티잔 아리엔느의 말이 맞다면…… 안 돼. 마탑주라면 필시 내가 하고 있는 짓을 알아볼 거야. 황성에 관심 갖게 하면 안 돼!’

조급해진 에메르나는 몇 번이고 아이리스와 말씨름을 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마치 성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견고했고, 그럴수록 에메르나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거듭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는 황후 폐하께서 내리신 황명입니다.”

결국 아이리스의 입에서 나온 ‘황명’이란 말에 에메르나의 신경선이 뚝 끊겨 버렸다. 이는 에메르나가 제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비’에 그친다는 말이었으니까. 에메르나는 결국 황후가 아니란 소리였으니까.

“네가 감히 지금 나를 우롱하는 것이냐!”

에메르나는 머릿속이 불길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제 성질을 버티지 못하고 손을 번쩍 들어 올렸을 때.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반대쪽에서 폐태자, 아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자 저하.”

아이리스는 에메르나에게 방금 맞을 뻔했음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아론에게 몸을 낮출 뿐이었다. 에메르나는 하필이면 이때 등장한 아론 때문에 분노가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황비 전하께 인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방금 전 보여 주신 일은 해명이 필요할 듯싶군요.”

가까이 다가온 아론은 황후에게 줄 선물이었는지,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에메르나의 시선이 해독 작용이 있는 센시아베리 꽃에 닿았을 무렵, 아론이 말했다.

“또한 황후 폐하께선 오늘 몸이 무척 좋지 않습니다. 해서, 황후 폐하께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혹, 아이리스 시녀장이 이 사실을 전하지 않던가요?”

이미 몇 차례나 실랑이가 있었기에, 에메르나는 못 들었다고 잡아떼지도 못했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 폐하의 건강이 너무도 걱정되어 직접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뿐이랍니다.”

에메르나가 가슴을 짚고 한숨을 내쉬며 루니아가 있을 방을 한 번 바라봤다. 이 애타는 마음을 전할 수 없는 게 못내 아쉽다는 듯이. 출중한 미모 덕분에 기사들은 그에 홀린 듯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론은 아니었다.

“황비 전하께서는 참 이기적이시군요.”

“그, 게 무슨…….”

“폐하가 걱정되어 마음이 쓰인다는 분이, 그 폐하께서 계신 방 앞에서 이런 소란을 벌이다니. 자신의 마음만을 앞세우는 게 이기적인 게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 이기적이란 말입니까?”

그에게 에메르나는 그저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은 가증스러운 악당에 불과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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