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 *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 그래. 조심히 가라. 아니다. 방까지 데려다줄까?”
제라늄 화관을 쓴 채 내가 준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클로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난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겨우 제 방에 가는 건데요.”
“그래도.”
결국 클로드는 나를 방까지 데려다줬다. 이를 본 앤이 “과보호도 이쯤 되면 주책이다.”라고 중얼거리다가 메리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그럼 쉬거라.”
“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자, 클로드의 입가가 짓궂게 꿈틀거렸다.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저러나, 의구심을 갖기 전. 클로드가 제 허리춤을 툭툭 두드렸다.
“앗…….”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로드가 한 손짓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 부끄러워 주변을 휘 둘러보자, 바짝 따라붙어 있던 메리와 앤이 뒤로 물러났다. 정확히는 메리가 앤을 끌고 간 거지만.
클로드는 인내심 있게 나를 기다려 줬다. 난 앤과 메리가 딴청 피우는 것까지 확인한 후 클로드의 허리춤에 폭 매달렸다. 그리고는 클로드의 배에 얼굴을 묻고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꾸우우욱.
허리춤을 두드리는 것, 그건 클로드가 나에게 안아 달란 뜻이자 어리광을 피워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하하하!”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린 클로드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으앗!”
욕심내서 아빠에게 어리광을 피우듯 클로드의 품에 얼굴을 좀 비빌 요량이었던 난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깜짝이야!
저 위에 있던 클로드가 지금은 내 코앞에서 웃고 있었다. 아주 따사롭고 자상한 표정으로. 여전히 그가 머리 위에 쓰고 있는 제라늄 화관에서 조금은 쌉싸래한 향기가 났다. 꽃잎이 아닌 함께 얽은 잎에서 나는 그 향기는 클로드와 무척 잘 어울렸다.
“잘했다, 라티아.”
“그, 그…… 아, 아까. 공작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기쁘다고, 서운한 일이 있어도 하나도 안 서운해진다고, 그, 그래서…….”
끄응, 너무 부끄러워 저절로 말이 더듬어졌다. 이건 아까 우리가 나눈 대화다. 클로드는 내가 건넨 제라늄 화관과 편지를 보고 감동받아 서운함이 사라졌다고 말했지만, 난 너무 미안했다.
공작님이 그렇게나 신경을 쓰고 있을 줄은 몰랐어…….
내 잘못이 맞았다. 내가 너무 무심했다.
공작님은 나를 무척 세심하게 배려해 주셨는데…….
이렇듯 좀처럼 미안함을 이겨 내지 못하는 나에게, 클로드는 만능 열쇠를 하나 줬다. 그게 바로 이거다. 내가 먼저 안아 주는 것.
“그래. 내가 아무리 서운한 일이 있어도 네가 이렇게 해 주면 돼.”
“그런데 정말…… 이런 걸로도 되는 건가요?”
“이런 걸로도, 라니. 넌 네가 울적할 때 내가 안아 주는 게 싫으냐?”
“그건! ……아뇨.”
난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난 이미 한 차례 클로드에게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그렇듯 내가 서운할 때, 울적할 때, 공작님이 날 안아 주신다면 분명 전부 풀려 버리고 말겠지.?
아이에게 부모의 품은 그런 거니까.
“부모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미워도, 화가 나도, 괘씸해도, 서운해도, 이렇게 안아 주면 모든 게 다 눈 녹듯이 사라지지. 물론 난 네게 화가 나지도, 네가 밉거나 괘씸하지도 않지만.”
혹여나 내가 마음을 쓸까 봐 클로드가 얼른 덧붙였다. 그리고는 요령, 아니. 힘도 좋게 한 손만으로 나를 안은 채 내 코끝을 톡 건드렸다.
“조금 서운하긴 했지.”
“으, 죄송해요…….”
“또 그 소리.”
클로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날 질책했다. 내가 아랫입술을 감춰 무는 시늉을 하자, 그가 피식 웃고는 나를 다시 바닥에 내려 줬다.
“그럼 이제 정말 들어가서 쉬거라.”
“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클로드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대신 슬쩍 손을 흔들어 봤다. 그 모습에 클로드도 피식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어 줬다. 뭔가 기분이 좋았다.
방에 들어온 난 아까 읽던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아가씨, 쉬시지 않고 바로 편지를 보시게요?”
앤이 ‘좀 쉬어라!’ 하고 타박하듯 말했다. 난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이것만 읽고.”
내가 슬슬 흔들어 보이는 편지 봉투엔 그루안 상단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것을 본 앤은 나를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편지엔 바람개비 꽃을 채집하기 위해 약초꾼들을 파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드디어!
좋아. 이제 이 약초만 잘 가지고 오면…… 루니아 황후 폐하의 몸에 쌓인 독을 치료할 수 있어.?
휴, 이제야 정말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푹 놓을 수만은 없다. 왜냐면 원작 속 사건의 시간대가 이리저리 바뀌고 있어 걱정이 되었다.
그 전까지 제발 무탈해야 할 텐데.
루니아 황후와 아론 폐태자의 운명에 클로드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일까? 어쩐지 애틋한 기분이 드는 루니아와 아론이 정말로 무사하길 바랐다.
* * *
흰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과 푸르스름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끼워 넣은 창문을 통해 오로라 빛깔이 도는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에,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음이 스쳤다.
또각, 또각, 또각!?
신경질적인 구두 소리가 새하얀 복도를 울렸다. 그 소리를 눈치 보듯 우르르 뒤를 따르는 다른 이들의 발소리도 함께.
“황비 전하, 황비 전하! 부디 고정해 주십시오!”
“고정해 주십시오, 황비 전하!”
그들은 앞서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달리듯 걷고 있는 여인을 말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곱게 빗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걷는 여인의 심기만 뒤틀 뿐이었다.
“시끄럽다! 지금 당장 황후 폐하를 뵈어야겠다!”
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굴곡져 흘러내리는 금빛 머리칼이 휘날렸다. 하지만 앞을 쏘아보는 푸른 눈동자는 햇빛마저 얼어붙게 만들 만큼 시린 얼음의 색이었다.
“지금 당장, 그 망할…… 망할 폐하를……!”
도무지 황비가 상급자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언행에, 그녀를 따르던 시녀들이 숨을 집어삼켰다.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라 하여도 이건 너무 지나친 언사였다.
‘대체 이 무슨…….’
‘아무도 없었지……?’
‘누군가 들었더라면 크게 경을 칠 터.’
황비궁 사람 말고 들은 이들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황비는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에서 늘어진 드레스 자락만이 아스라한 자국을 남겼다.
신경질적으로 시녀들을 일갈했던 황비, 에메르나의 심기는 단단히 비틀린 상태였다.
‘대체 언제, 어떻게 무슨 수를 쓴 거지? 조용히 황후궁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줄 알았는데!’
그간 황후, 루니아는 참으로 잠잠했다. 루니아는 에메르나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황후로서의 입지를 빼앗기고 끝내는 아들, 아론의 황태자 자리도 빼앗겼다. 그럼에도 루니아는 잠잠했다.
‘바보천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했어.’
처음엔 몸을 사리고 힘을 비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해서, 에메르나는 더욱더 황후의 사람들을 압박했고, 황후궁을 거의 폐허로 만들다시피 했다.
‘내가 황제를 제대로 쥐려면 그래야 했으니까.’
하지만 끝내 황후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메르나는 루니아가 움직일 의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독을 먹여 놓길 잘했지.’
지금 폐태자인 아론이 황성에서 떵떵거리며 지낼 수 있는 건 오로지 그의 어미가 황후이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황후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아론의 안전 또한 보장받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기실 황태자가 폐위되는 것, 그건 어지간한 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아주 중대한 사안이었다. 여기엔 에메르나의 뱀 같은 혀가 아주 톡톡히 작용했다.
에메르나는 제게 푹 빠지게 만든 황제, 레오나르도를 쥐락펴락하며 아론이 레오나르도를 시해하려 한다고 속삭였다.
시작은 간단했다.
‘폐하, 황후 폐하께 너무 냉히 대하지 마세요. 이 에메르나, 어찌할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폐하도 아시겠지만 저는 황비라는 자리조차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굽어살피소서.’
‘그것이 무슨 소리냐 물었다.’
‘고작 황비의 일 때문에 폐하의 명성에, 또 폐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대업의 근간에 누를 끼칠까 봐…… 저 에메르나는 너무 두렵습니다.’
‘고작 황비라니! 너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다!’
레오나르도가 발끈하여 외쳤다. 사실 레오나르도는 사랑하는 에메르나를 황비로 두어야 하는 것에 굉장한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레오나르도가 황제로 즉위하는 당시, 황후파 귀족들의 세력을 등에 업은 탓에 루니아를 폐위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에메르나는 이 부분을 이용했다.
‘에메르나는 폐하의 사랑만 있으면 되어요. 오로지 그것만 있으면, 그 어떤 풍파가 닥친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계속 폐하를 사랑하며 기다릴 수 있어요.’
황제가 에메르나를 총애하여, 황후 세력이 에메르나를 견제하고 있다고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또 에메르나는 황비라는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 고초를 겪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뭐라? 황후의 사람들이 황비를 업신여겨?’
‘업신여기다니요. 그러한 뜻은 아니겠지요. 하나, 그날 이후로 아론 황태자 전하께선 제 인사조차 받아주시지 않으셔서…….’
심지어 루니아의 사이에서 난 아론이 에메르나를 무시하고 냉대한다고 이간질도 했다.
‘내 아론에게 황비는 또 다른 어머니이니 깍듯이 대하라 그리 일렀거늘!’
친부인 황제가 친모인 황후를 등한시하고 있으면서, 총비를 또 다른 어머니라 여기라니!
애초에 터무니없는 명령이었지만, 레오나르도는 에메르나의 교묘한 화술의 함정에 빠져 ‘아론이 나를 무시하는구나!’ 하고 발끈하기 바빴다.
이러한 이간질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아론은 끝내 폐위되었고 그 자리는 현재 에메르나의 금쪽같은 아들. 제네스가 대신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이제서 황후가 움직임을 보이다니…….’
그루안 상단이 흰뿔 나무를 벌목할 나무꾼들을 몽땅 사들였다고 한다.
‘대체 어떻게 그루안 상단을 매수한 거지?’
에메르나는 이것을 따져 물으러 황후궁으로 뛰어가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