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03화 (103/186)

103화

그루안 상단의 뒤에는 예리엘 만물 상단이 있다.

“그건…….”

앤니스 백작은 이러한 이야기를 물론 알고 있었지만 제게 큰 피해를 끼칠 순 없을 거라 생각했다. 왜냐면 그루안 상단은 귀족의 상단이 아니니까.

‘제아무리 예리엘 만물 상단이라 하더라도 귀족에게 대들 수는 없어.’

또 예리엘 만물 상단주는 무척 바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 들었다.

‘이런, 이런…… 사소한 일에 끼어들…… 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셀트론의 입에서 예리엘 만물 상단의 이름이 나오자 괜한 두려움이 일었다.

‘아니, 괜찮아. 저건 그냥 의혹일 뿐이야. 내가 그 격투장 사업에 개입했단 이야기는 아무도 몰라. 그래, 글라델리스 후작의 그 치부책에만 적힌 이야기잖아!’

애써 스스로를 달랜 앤니스 백작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을 때, 셀트론이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혹시, 앤니스 백작께선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아무래도 귀족이시다보니 저희 같은 상인보단 귀가 밝으실 것 같아서요.”

“그런 이야기라니……?”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치부책’에 대해서 말입니다.”

“……!!!”

앤니스 백작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는 속으로 경악했다.

‘서, 서, 설마……!’

글라델리스 후작의 치부책을 손에 넣었단 말인가? 예리엘 만물 상단주의 힘을 빌려서?!

‘만약 그렇다면…….’

그 순간 앤니스 백작은 깨달았다. 자신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곳을 건드려 버렸다는 것을!

그루안 상단은 그냥 벌집도 아니고 장수 말벌집이었다!

‘도망쳐야 해. 안 그러면 죽는다!’

앤니스 백작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말했다.

“그, 급한 일이 생각나서 말이네. 이만 가 보겠네.”

하지만 셀트론은 앤니스 백작을 쉽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한데, 하실 말씀이 있어서 찾아오신 것 아닙니까? 티아나 아메시스트 님께요.”

“그, 그것이…….”

앤니스 백작은 제 목숨과 관련된 눈치라면 백단이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뛰어났기에, 그는 지금껏 이러한 성질머리를 가지고도 무탈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앤니스 백작은 알 수 있었다.

‘티아나 아메시스트를 쉽게 내어 주지 않았던 점, 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 예리엘 만물 상단을 들먹인 점, 그리고 글라델리스 후작의 치부책에 대해 알고 있다고 드러낸 점…….’

그것들을 모두 종합했을 때, 셀트론이 알려 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티아나 아메시스트는 예리엘 만물 상단주의 사람이다. 그녀가 치부책을 알고 있는 거야……!’

티아나 아메시스트, 그녀가 바로 여왕 말벌이라는 것을!

앤니스 백작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셀트론이 제게 왜 이런 이야기를 술술 해 줬겠는가!

‘나를, 죽일지도 몰라…….’

앤니스 백작은 귀족이지만, 달리 말하면 그저 귀족일 뿐이었다. 셀트론처럼 대상단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예리엘 만물 상단처럼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아니었다. 저들이 여왕벌을 건드린 앤니스 백작을 해하고자 한다면, 앤니스 백작은 언제든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힐 위험이 있었다.

“그러니까…….”

앤니스 백작의 눈꺼풀이 공포로 쉴 새 없이 깜빡거렸다. 칼 한 자루, 총 한 자루 없이 평화로운 응접실이 이토록 두려울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앤니스 백작은 손바닥에 차오르는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 내가 뭔가 착오가 있던 것 같네. 아무, 일도 없어. 그러니까 그분을 뵐 이유도 없지. 난 이만 가 보겠네.”

앤니스 백작은 조금 전까지 ‘계집년’이라 욕했던 티아나 아메시스트를 ‘그분’이라 칭하기까지 했다. 셀트론은 완전히 겁에 질려 숨도 못 쉬는 앤니스 백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기보다 강한 힘이 있는 자 앞에서 납작 엎드리는 꼴이란…….’

기도 안 찼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앤니스 백작은 그루안 상단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니까. 이토록이나 겁을 먹었으니 섣불리 떠들어 대지도 않을 터.

‘하지만 보험은 들어 놔야겠지.’

이윽고 셀트론이 말했다.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닐세. 혼자 가겠네.”

“그러시다면야…….”

셀트론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앤니스 백작은 두려움에 다리가 저려 절뚝거리며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저희 그루안 상단에서 예리엘 만물 상단과 손을 잡고 기획한 상품이 하나 있습니다.”

“…….”

“확성기, 라고요. 작은 소리도 크게 증폭시켜 주는 마도구 아이템인데, 혹시 필요하시다면 한번 보고 가시지요.”

앤니스 백작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얼어붙고 말았다. 이건 협박이었다. 셀트론이 글라델리스 후작의 치부책에 대해 알고 있다 발설하면, 그 치부책에 적힌 이야기가 세상에 모두 공표되고 말 거라는……. 그리된다면 차라리 자결을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황비가 다 무어냐.’?

지금 당장 목숨을 잃게 생겼는데! 이 상단을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커다란 절망감에, 앤니스 백작은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어졌다.

* * *

요 며칠, 사실 클로드는 울적해하고 있었다. 물론 라티아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는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아서 이를 알아챈 이는 몇 명 없다. 그와 함께 트라이던트 해적선에서 생활했던 헥터와 메리, 지난 3년간 집사이자 보좌관으로 일해 주고 있는 버틀러 정도였다. 앤은 클로드를 보고 알아차렸다기보단 메리를 보고 알았다.

‘앤이 좀 시무룩하네? 공작님께 무슨 일이 있나?’

앤의 속에서 클로드는 굉장히 큰 사람이었다. 고작 감정이나 기분 따위에 흔들릴 만큼 감상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말이다. 해서, 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늘도 상태 이상하던데?”

“점점 식사 시간도 짧아지고 있습니다. 몸이 상하시진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헥터와 버틀러는 아니었다. 이제 20살 남짓인 앤은 얼굴과 몸만 20대지, 실 나이는 서른이 넘은 클로드가 무척 어른처럼 느껴지겠지만, 헥터와 버틀러는 클로드와 동년배니까.

“뭐 요즘 안 풀리는 일이 있어? 사업이라든가. 아니면 또 귀족들이 기승이야? 그놈의 ‘역사’가 없다고?”

헥터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물론 저기서 말하는 ‘역사’란 ‘돈으로 쓰인 역사’를 말한다. 지금 클로드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영웅이지만, 그는 한때 가난한 백작이었다.

“거, 뭐. ‘모두가 비웃는 무역을 떠난 머저리’라고 불렸다며. 클로드가.”

한데 모여 비웃었던 클로드가 금의환향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특급 무공 훈장을 받아 공작이 되었으니, 배가 아플 만도 했다. 해서, 원로한 권세가들은 라움디셀 공작가를 ‘수도 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기 바빴다.

“듣자 하니 영지 일도 건들기 시작했다는데. 그래서 저러는 거야?”

헥터의 물음에 버틀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물론 그래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버틀러는 클로드에게 귀족은 그만한 영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국경선을 건든다고? 트라이던트 기사단을 보내.’

‘교역 검문소에서 우리 마차만 오래 붙잡고 있었다라……. 재밌군.’

‘어전회의에서 내 입지를 좁히려고 하는 모양이더군. 우습지도 않지.’

클로드는 귀족들의 작태를 그저 ‘흥미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클로드는 실제로 바다에서 숱하게 생사를 넘나들며 검을 빼 들고 삶을 개척했다. 게다가 그는 황제가 직접 특급 무공 훈장을 하사하여 공작이 된 남자다. 그러한 클로드에게 ‘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황실밖에 없었다.

해서, 버틀러는 제 턱을 쓰다듬으며 조심히 말했다.

“아뇨, 공작님의 고민은 다른 곳에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곳? 대체 어디에 말이야?”

헥터가 답답하다는 듯 분통을 터뜨렸다. 사실 버틀러는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라티아 아가씨께서 사용인들의 여름옷을 사 오셨을 때…….’

버틀러는 라티아가 기특해서 흐뭇하게 웃기 바빴지만, 귀여운 부녀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때 공작님께선 라티아 아가씨를 살피고 계셨어.’

처음엔 밖에 다녀온 라티아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걱정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다기엔 클로드의 표정이 미묘하게 들떠 있었다.?

‘마치…… 그래. 마치 내 건 없나 두리번거리는 강아지처럼 말이야.’

모시는 주인에게 강아지라니, 무척이나 불경한 말이었지만 이 말 외에는 당시 클로드의 표정을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클로드는 라티아가 제게 줄 것이 무엇인지 잔뜩 기대한 채 설레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티아 아가씨께서는 그대로 방으로 올라가 버리셨지.’

쪼르르 계단을 올라가는 라티아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리던 클로드의 표정은 정말 버림받은 강아지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클로드는 혼자 씩 웃으며 자신의 하관을 감싸 쥐었다.

‘그래, 사람들 앞에선 아직 부끄러울 수 있지.’

그렇게 중얼거린 클로드의 말엔 라티아를 귀여워하면서 동시에 ‘꼭 그래야만 한다.’는 강렬한 바람이 깃들어 있었다. 그날 밤, 클로드는 라티아에게 버틀러가 사 온 디저트를 들고 갔으나 5분도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그때부터였지. 공작님의 우울이 시작된 것은…….’

그렇기에 버틀러는 클로드가 이토록 침울해하는 이유가 라티아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곁에서 지켜보면 참 귀여운 일이었지만, 마냥 흐뭇해할 수는 없었다.

“나, 참. 저 녀석 나랑 요즘 대련도 안 해 준다고.”

“일정에도 차질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랬다. 클로드가 너무 침울해하는 나머지 점점 해야 할 일을 등한시하고 있단 것이었다.

이를 어쩌면 좋은가, 헥터와 버틀러가 머리를 맞댄 채 한숨을 쉰 때였다.

“헥터 장군님! 버틀러 집사장님!”

저 멀리서부터 항상 얌전하고 예의 바르던 메리가 마치 앤처럼 뛰어오기 시작했다.

“하, 하아…….”

순식간에 달려온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헥터와 버틀러에게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일을 말해 줬다.

“라티아 아가씨께서 공작님께 화관과 직접 쓴 편지를 선물하실 거래요!”

아! 드디어 클로드의 기분이 풀린다는 소식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