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음…….”
사실 그냥 내 마음 같아서는 무시하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귀족을 무시하라니. 그건 내가 아무리 사생아였다 하더라도 후작가의 장녀였고, 또 공작성의 아가씨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겠지.
대상단주이자 드루이드의 후손이라 약초 재배에 일가견이 있음에도 귀족이 아니란 이유로 황제를 알현하지 못하는 셀트론에겐 생각하는 것조차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그에게 앤니스 백작은 ‘백작’ 작위를 가진 귀족이니까.
― 감히 상인 나부랭이인 주제에 나를 기다리게 해?!
수화기 너머에서 앤니스 백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 지, 진정하십시오!
― 경비대를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귀족의 행패에 쩔쩔매고 있는 그루안 상단 직원들도.
― 경비대? 뭣? 불러! 부르라고! 내가 누군 줄 알아!
직원들의 응대에 앤니스 백작이 더욱 화가 난 모양이다. 다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 음…….
셀트론이 곤란해하는 소리도. 결국 난 한숨을 폭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 방법까진 쓰고 싶지 않았는데…….”
― 예? 이 방법까진, 이라니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고 했는데, 내게 바짝 집중하고 있는 셀트론의 귀에 쏙 들어간 모양이다. 아니면 그만큼이나 내게 어떠한 도움을 기대하고 있는 걸지도.
그래, 내가 벌인 일이니 내가 마무리를 지어 줘야겠지?
이대로 앤니스 백작이 셀트론에게 민폐를 끼치게 놔둘 수는 없다. 큼큼,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요, 셀트론.”
난 책장 청소를 마친 앤이 방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사실은요, 앤니스 백작은…….”
소곤소곤, 속닥속닥.
내 말을 들은 셀트론이 수화기 너머에서 놀라 자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내게 또 한 번 감사하다고, 살았다고 인사하는 소리도.
“고맙긴요. 저 때문에 수모를 겪고 계신데.”
― 아닙니다. 아가씨 덕분에 항상 돌파구를 찾습니다. 감사합니다.
셀트론이 조언대로 하겠다며 통신을 끊었다. 때마침 들어온 메리가 다가와 말했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 음. 오늘 일정은…….”
아카데미에 간 카르시안과 과목을 맞추려고 미뤄 놨던 수업을 다시 시작해도 좋고, 이대로 메리와 나가 사격을 연습해도 좋다. 이때 문득 내가 하인들에게 여름옷을 선물 했을 때, 클로드가 내게 뭐라 말을 걸려고 했던 게 생각났다. 그때 클로드는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음…… 그러고 보니 그 이후로 공작님께 찾아간 적이 없네…….”
내가 흰뿔산의 일로 바쁜 것도 있었지만, 수잔이 말하길 카르시안의 편지 일로 아직도 신경 쓰는지 걱정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때 카르시안의 편지 내용을 들은 삐로리가 [내가 지금 아카데미 가서 머리를 새집처럼 만들고 올까?] 하고 대신 분통을 터뜨려 줘서 이젠 괜찮은데……. 아니,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진 걸지도 모른다.
역시 우울할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야.
그런 이유로.
“공작님께 갈래.”
클로드를 좀 보고 와야겠다. 실은 카르시안의 편지를 막 읽은 날 저녁, 클로드가 직접 디저트를 들고 찾아왔었다. 나무꾼 고용 건으로 바빠 함께 먹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전부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뿐이었다.
“빈손으로 가긴 좀 그러니까…… 아, 편지지가 남은 게 있었지. 용돈 주셔서 감사하다고 편지를 쓰는 건 어떨까?”
“굉장히 기뻐하실 거예요. 아가씨께 편지 받는 건 처음이시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
“매일 같이 계셨으니까요.”
순간 가슴이 따끔거렸다. 멀리에 있는 나무꾼들을 챙기기 전,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챙기겠다고 옷을 사 왔으면서. 지난 3년간 항상 곁에 있어 줬던 클로드는 챙기지 않았다. 심지어 카르시안에게 화관을 줄 때조차!
난 아뜩해지는 정신을 다잡고 말했다.
“메리, 온실에서 붉은 제라늄 좀 꺾어와 줄래?”
“붉은 제라늄을요?”
“응. 공작님의 눈 색하고 꼭 닮았잖아.”
혹자는 클로드의 붉은 눈을 보고 번들거리는 짐승의 화경눈이라 하였으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붉은 눈동자’라는 위압감 때문에 날이 서 보이는 것이지, 클로드란 사람 자체는 굉장히 따듯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나를 명예 따님이라 불러 줄 정도로 인정도 많은 사람이야.
그래서 난 그의 눈동자를 볼 때엔 두려움보단 세상의 온갖 귀한 것이 떠올랐다. 붉은 제라늄의 꽃잎처럼 부들부들한 상냥함도 떠올랐고.
“내가 만든 화관하고 같이 드리고 싶어.”
“어머나…….”
메리는 제가 선물을 받은 것처럼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기뻐했다.
“금방 가져올게요. 아주 예쁘고 탐스러운 꽃으로요.”
“응, 고마워.”
사실 내가 직접 가고 싶었지만, 편지를 써야 했다. 이 이상 클로드를 외롭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를 잊었거나, 챙기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물론 공작님이라면 그런 생각은 안 하실 테지만…… 흐음. 그런데 뭐라고 쓰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카르시안이 아카데미에 가고 그에겐 편지를 좀 썼는데, 클로드에겐 지금이 처음이었다. 펜을 집어 드는 손이 괜히 떨렸다.
이게 뭐라고…….
하지만 그 떨림이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 좋게 콩닥거려 조금 들뜨기도 했다. 부끄러워서 목소리로는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담아보고자 한다.
걱정과 달리, 내 펜은 쉬지 않고 편지지를 채워 나갔다.
* * *
앤니스 백작, 그는 티아나 아메시스트를 만나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분명 상단을 운영하는 게 아니고 취직을 한 것이니 귀족이 아닐 테지!’
귀족이었다면 아무리 작은 상단이라 하더라도, 곧 죽어도 자신이 운영하고자 했을 것이다. 주변의 시선도 있고, 상단을 운용하는 자산과 인맥 같은 것도 사교계에서는 하나의 지표가 되어 주니 말이다.
게다가 아메시스트라는 성도 들어본 적 없을뿐더러, ‘티아나’라는 이름은 누가 들어도 여성의 이름이었다.
‘감히 여자 따위가, 평민 나부랭이가 이 앤니스 가주의 대업을 가로막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귀족을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얼마나 후회하게 되는지, 똑똑히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한데, 그렇게 벼르고 있는 앤니스 백작의 앞에 나타난 이는 기다리던 티아나 아메시스트가 아닌 셀트론 그루안이었다.
“백작님, 우선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싫다고. 티아나 아메시스튼지 뭔지 하는 그 계집년이 직접 나오라고!”
앤니스 백작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런데 ‘계집년’이란 소리에 여태 잠잠히 예의를 갖추던 셀트론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곤란해하면서도 설설 기던 상단원들의 표정도 싹 굳어 버렸다.
“어디서 그따위 눈을 뜨고 감히 귀족을 똑바로 봐?! 당장 눈 깔지 못해! 빨리 그 계집년이나 데리고 오라고!”
퍽, 챙그랑! 앤니스 백작이 발길질을 하자, 그가 한차례 쓸어 버려 바닥을 나뒹굴던 집기들이 깨지고 짓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늘 자상하고 온화하던 셀트론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목소리에 살기가 실려 퍼진다면 이런 소리일까? 어찌나 서슬 퍼런지, 두 차례나 연속된 ‘계집년’ 소리에 씩씩거리던 다른 직원들조차 돌처럼 굳어 버릴 정도였다.
“뭐, 뭐……!”
앤니스 백작이 항변하려 하자, 셀트론이 그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바닥이 움푹 패이는 환청이 들렸다.
“상품을 던지고…… 가게를 부수고…… 고객을 내쫓고…… 영업을 방해하는 건……. 그래,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른 차가운 분노에, 앤니스 백작은 오금이 저려 저도 모르게 반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그분을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아니, 참지도 않을 겁니다. 다시는!”
성큼 다가온 셀트론이 앤니스 백작의 어깨를 꽈악 움켜쥐었다.
“티아나 아메시스트 님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다시는, 다시는……. 경고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그, 그, 아악…….”
앤니스 백작은 어깨를 쥐어뜯을 것처럼 구는 셀트론의 악력보다 실눈처럼 온화하게 감겨 있던 눈에서 흐르는 선명한 안광이 더욱 두려웠다. 앤니스 백작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셀트론은 언제 그를 겁박했냐는 듯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인자하게 말했다.
“이쪽으로.”
“음, 험…… 험험.”
평민이라 그토록 무시했던 직원들의 기백에 눌린 앤니스 백작은 이만 봐주겠다는 듯 셀트론의 뒤를 따랐다.
‘그, 그래! 뭐. 꼴에 대상단주이니 따라 주는 거야. 내가 절대로 밀렸거나 꿀린 게 아니라고.’
앤니스 백작은 슬금슬금 금이 가기 시작하는 자존심을 억지로 이어 붙이며 허세를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셀트론의 안내대로 자리에 앉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불법 격투장에서 벌었던 돈은 다 어디에 쓰시고, 고작 인당 150실버를 쓸 수 없어서 귀하신 백작께서 직접 수도까지 올라와 일개 상단에서 이리도 행패이신지. 원…….”
쯧, 셀트론이 혀를 차며 하는 소리에 앤니스 백작은 쩡 얼어붙고 말았다.
“지금…….”
뭐라 말하였소? 하고 되묻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숨이 턱 막혀 심장이 덜컹 멈추는 바람에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
“영지가 중앙지방에서 굉장히 떨어진 데다가 교통도 좋지 않고 땅도 비옥하지 않아 한미하다더니, 설마 그루안 상단의 제휴 업체가 예리엘 만물 상단이라는 정보까지 모르는 건 아니시겠지요?”
분명 경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가 하는 말을 이루는 모든 어절이 앤니스 백작의 숨통을 조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