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챕터 3. 달리지 않아도 바람은 항상 불고 있다.
아론의 외침에 루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찌나 빨리 달려온 것인지, 아론의 결 좋은 은발이 다 흐트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루니아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머리가 다 헝클어졌습니다.”
“아.”
아론은 그제야 제 꼴을 깨닫고는 황급히 머리칼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루니아의 손이 뻗어 오는 것을 보고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다가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자가…….”
루니아는 익숙하게 아론을 불렀지만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아론은 황자가 아닌 황태자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총애받는 황비 에메르나와 그의 아들인 제네스에 의해 폐태자가 되었고, 다시 황자로 격하되었다.
“황, 자가…….”
“폐하……?”
루니아가 말을 잇지 못하자 아론이 의아하단 듯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아론의 보라색 눈동자는 루니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지만, 햇빛에도 달빛처럼 빛나는 저 은발은 황제인 레오나르도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루니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레오나르도와 루니아는 드물게 연애결혼을 했다. 비록 나이는 레오나르도가 3살 많았지만, 황자였던 레오나르도와 공작가의 여식이었던 루니아는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낸 소꿉친구였다. 소꿉친구가 약혼자가 되는 건 금방이었고, 어릴 적부터 둘에겐 서로밖에 없었으니 그 사이에 사랑이 싹트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루니아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레오나르도가 황태자 책봉식을 올린 그날 받았던 프러포즈가 선명히 떠올랐다. 황태자 책봉식에서도 떨지 않았던 레오나르도가 두 손을 덜덜 떨면서 제 마음을 ‘받아 달라’도 아닌 ‘알아 달라’고 부탁하던 그 순간을. 그리고 아론을 가졌을 때, 아론이 태어났을 때 레오나르도가 짓던 그 함박웃음 또한.
‘그랬던 레오가…….’
한순간에 변해 버렸다. 그것도 아론의 첫 생일 연회 날에 말이다. 그때부터 레오나르도는 사람이 완전 바뀌어 버렸다.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정말 한순간에.
‘내가 알던…… 레오는 이제 없어.’
오로지 루니아만을 사랑했던 남자, 모두에게 칭송받으며 성군이라 인정받던 남자, 하인들의 실수에도 인간적이라며 웃어넘기던 자애로운 남자는 없다.
에메르나 황비의 치마폭에 싸여 침상에서 밤낮을 구분하지 못하여 정무를 내팽개치는 무능한 황제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는 에메르나의 사치를 위해 매번 엄청난 금액의 세금을 걷고 농사철에도 백성들을 불러다 노역을 시켰다. 기분이 나쁘면 하인에게 일부러 실수하도록 유도해서 처벌했고, 에메르나 황비의 말이라면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모두 사형에 처했다.
사랑에 배신당한 것이 슬픈 게 아니다. 자신이 알던 이가, 사랑했던 이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슬펐다.
루니아는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들을 보다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그녀가 아들의 머리칼을 야윈 손가락으로 정리해 주며 말했다.
“황자가 되어서 궁을 뛰어다니셔야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아론은 어머니에게 혼이 나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손길이 좋아 비식비식 새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루니아도 그것을 알아 잠시 청초한 라일락을 빼닮은 연보라색 눈동자를 흘겼으나 더 이상 말을 얹지는 않았다. 아론의 나이는 이제 14살이건만, 루니아의 눈에는 그저 한없이 어리고 안타까운 아들일 뿐이었으니.
“그런데 저어, 폐하…….”
아론이 두근두근 설레는 얼굴로 눈치를 봤다. 조금 전, 그가 이 황후궁에 뛰어들면서 외친 물음에 대한 답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루니아가 조용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예. 이야기 들었습니다.”
“어, 어떻게요?”
아론은 분명 제가 첫 소식을 물어다 준 줄 알았는데,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루니아의 곁에 있는 이를 보고는 “아하.” 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몸이 약한 루니아의 눈과 귀, 손과 발이 되어 주는 이가 한 명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이리스로, 아론의 유모기도 했다.
루니아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이리스가 말을 전해 줬습니다. 정말…… 다행인 일입니다.”
그간 걱정을 했던 탓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레오나르도를 생각해서 그런 걸까? 속이 쓰렸다. 아이리스는 그런 루니아를 기색을 예리하게 살펴 미지근한 물을 한 잔 건넸다.
“아린위 잎을 넣어 우렸습니다. 속이 조금 편해지실 겁니다.”
“고마워, 아이리스.”
아론은 루니아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녀가 물을 절반 정도 마셨을 쯤, 아론이 입을 열었다.
“한데, 정말 의롭지 않습니까? 심지어 나무꾼들의 월급도 엄청나게 높여 줬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무꾼들은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이 너무 적지 않았습니까? 수도의 여관 종업원이 80실버를 받는데, 그들은 고작 65실버…… 많이 받아야 68실버이니 말입니다.”
“최근 수도 시찰을 다녀왔다 들었는데, 여관 종업원의 월급을 알아보고 오셨습니까?”
루니아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묻자, 아론이 언제 어린아이처럼 들떴냐는 듯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도에서 살고 있는 백성들의 경제력을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세금이 너무 많이 걷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빈부격차가 크지는 않은지, 물가는 적당한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아주 잘하셨습니다.”
루니아의 진심 어린 칭찬에 사랑하는 어머니께 칭찬받는 아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뿌듯한 표정은 덤이었고 말이다. 루니아가 그런 아론에게 한 마디 더 칭찬을 하려는데.
“큭, 콜록, 콜록!”
갑자기 거센 기침이 시작되었다.
“폐하!”
“어머니!”
흐뭇한 미소를 걸친 채 애틋한 모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이리스가 놀라 루니아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보였던 아론의 표정도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저는 괜찮, 콜록…… 콜록, 콜록…… 우욱!”
“아이리스! 어서 황의를!”
“예, 알겠습니다. 저하!”
아론의 명령에 이제는 마흔이 다 된 아이리스가, 그 나잇대로는 보이지 않는 잽싼 몸놀림으로 얼른 달려나갔다. 아론이 루니아의 침대 옆 협탁에 항상 자리하고 있는 손수건과 약을 꺼냈다.
“어머니, 어서 약을 드세요.”
“콜록, 콜록…….”
아론의 목소리가 걱정으로 흔들렸다. 루니아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좀처럼 기침이 멎지 않아 힘겨웠다. 아론은 그런 루니아를 익숙하다는 듯 등을 쓸어내려 줬다. 이제 겨우 14살이라고 생각하기엔 환자를 대하는 데에 너무도 익숙해 보이는 손길이었다.
잠시 후, 아이리스가 황의를 데리고 들어왔다. 루니아는 아론이 건넨 약을 먹고 조금 진정한 상태였는데, 황의는 루니아를 진찰한 후 고개만 푹 숙였다. 이번에도 황의가 할 말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네. 괜찮네.”
황의는 분명 이 나라 최고의 의원인데 불구하고, 루니아의 병명조차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경련, 발작, 구토, 각혈 등 상당히 많은 증상을 보여, 정확히 무슨 약을 처방해야 하는지조차도.
“정말 입이 열 개여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폐하를 뵐 낯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달란 말은 오만처럼 느껴졌다. 죽여달란 말조차 송구스러워서 할 수가 없었다. 루니아의 상태가 좋지 않은데, 할 수 있는 게 없어 스스로가 한심하고 무력하게 느껴질 뿐.
‘분명 마음의 병이시겠지…….’
황의는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여색에 미쳐 폭군이 되어 버린 남편의 냉대에 마음 다치지 않을 여인이 어디에 있을까. 루니아는 황후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 뭉개진 마음을 토로할 수도 없이 속으로만 삼켰을 것이다.
‘그러니 속병이, 화병이 나신 거야.’
황의는 몇 번이나 루니아에게 사죄를 하고, 안정제를 조금 처방한 후 돌아갔다. 아론은 그사이 차갑게 질려 굳어 버린 루니아의 손을 꼭꼭 주물렀다. 티아나 아메시스트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조금 전, 어머니라 불렀던 아론의 호칭이 다시 폐하로 바뀌어 있었다. 루니아는 찬밥 신세가 되어 아들의 황태자 자리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이를 꿋꿋하게 ‘황후 폐하’로 대하는 아론이 안쓰럽고 고마웠다.
“전 괜찮습니다, 황자.”
루니아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핏기가 싹 가셔서 허여멀건 하기만 한 얼굴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지만, 아론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루니아의 손을 감싸 쥐고, 그녀의 야윈 손등에 뺨을 비비며 눈물짓는 수밖에는.
* * *
이튿날, 셀트론에게서 통신이 왔다.
“네? 앤니스 백작이 직접 찾아왔어요?”
그건 아주 뜻밖의 소식이었다. 내가 놀라 소리를 높이자, 책장을 청소 중이던 앤이 놀라 이쪽을 돌아봤다. 난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고, 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난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셀트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예. 티아나 아메시스트를 직접 만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본점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고요.
으음, 물론 앤니스 백작이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대놓고 찾아올 줄이야.
수화기 너머에서 뭔가가 깨지고 “나와! 나오라고!” 하고 고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앤니스 백작일 테지.
셀트론이 골치 아프단 목소리로 물었다.
― 어떻게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