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00화 (100/186)

100화

클로드가 씩 웃으며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든 이들에게 말했다.

“라티아가 공작성을 위해 묵묵히 고생해 주는 이들을 위해 여름옷을 장만했다는군. 모두 일렬로 서서 받아 가도록 해.”

“와아……!”

“어머나,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를 생각해 주시다니, 기뻐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소중히 입겠습니다.”

그들은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몇 명은 눈시울까지 붉히며 내게 고개까지 숙여 보였다.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데…….

난 좀 머쓱해졌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한 명씩 손을 꼭 잡아 줬다.

“이번 여름, 모두들 건강하게 지내길 바라.”

“아가씨…….”

“어쩜 이렇게 다정하실까…….”

내가 무슨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시종들은 감동받기 바빴다. 난 그들을 바라보다 방으로 향했다. 클로드가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지금 좀 바빠 시간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난 앤니스 백작에게 고용되어 파업 중인 나무꾼들을 몽땅 고용하겠다는 편지를 썼다. 금액은 협의가 가능하지만 최소 약 100실버인 금화 1개를 보장하겠다는 말과 함께.

“자, 메리. 이걸 흰 뿔산 조합장에게 보내 줘.”

“네, 알겠습니다.”

메리가 싱긋 웃고 편지를 받아 갔다. 난 곧장 다시 셀트론에게 통신을 걸었다.

“아, 셀트론? 저예요. 라티아. 지금 흰 뿔산의 나무꾼들을 몽땅 고용하겠단 편지를 보냈어요. 티아나 아메시스트로요. 앤니스 백작은 분명 절 추적할 거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루안 상단에도 연락이 닿을 거예요.”

난 조금 전, 그루안 상단 직원이 보였던 태도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는 우리가 앤니스 백작과 묶여 황후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비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이제 막 황성에 약초를 납품하기 시작한 그루안 상단이 정치 파벌 싸움에 휘말릴까 봐, 겠지.

그런데 지금 내가 그루안 상단의 제2 관리자로 있는 티아나 아메시스트로, 에메르나 황비의 편에 서려는 앤니스 백작을 방해한다면? 앤니스 백작은 이를 에메르나 황비에게 알릴지도 모르고, 아니면 직접 찾아온 에메르나 황비가 앤니스 백작의 토로를 들을지도 모른다.

물론 에메르나 황비야, 자존심이 강하니 ‘그 정도 돈도 없다니!’ 하고 등을 돌려 버릴 게 분명하지만, 황제에게 투덜대긴 할 것이다. ‘그루안 상단의 제2 관리자 때문에 제 궁에 별채 증축이 어려워졌어요.’ 하고.

그러면 이제 막 황성에 납품을 시작한 그루안 상단에 피해가 가겠지?

그것에 대해서 미리 대비가 필요했다.

“일단 앤니스 백작은 무시해도 괜찮아요.”

그는 별채를 만들어 준 후에야 에메르나 황비의 눈에 든 것이지, 지금은 아무 힘도 없는 한미한 시골의 백작일 뿐이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건 황성 내의 기류예요.”

― 루니아 황후 폐하와 에메르나 황비님 말씀이신가요?

셀트론이 목소리를 확 낮추고 조용히 물었다.

“네, 맞아요. 이렇게 하세요. 지금 곧장 에메르나 황비님께 대량의 파도물망초 화단을 보내세요.”

파도물망초 꽃은 제습 효과가 아주 뛰어난 식물이다. 곧 중앙 지방에 장마철이 시작될 예정이다. 아주 습하고 끈적거려, 괜히 짜증이 나는 그 시기가 말이다.

그리고 이땐 머리 모양을 아무리 꾸며도 소용이 없어지고, 습기와 땀 때문에 화장이 순식간에 무너져, 에메르나 황비의 히스테릭이 극에 달하기도 하지. 그런데 제습 효과가 뛰어난 식물들이 주변에 많으면, 습기가 덜하지 않겠어?

이런 이유로 에메르나 황비는 장마철마다 파도물망초 꽃을 찾았다. 하지만 파도물망초 꽃은 재배는 물론, 제습 효과가 가장 뛰어난 만개 하는 시기가 짧아 관리가 무척 어려운 식물이었다.

하지만.

“그리고 셀트론이 황성에 들를 때마다 그 파도물망초 꽃을 보살펴 주세요. 제습 효과가 아주 뛰어나도록이요.”

양식이 가능하다면 제아무리 까다로운 식물이라 하더라도 드루이드의 후손인 셀트론 앞에서는 사랑스럽고 다루기 쉬운 아이일 뿐.

셀트론의 손길에 살아나고 더욱 효과가 좋아지는 파도물망초 꽃을 보면, 에메르나 황비는 그루안 상단을 절대로 내치지 못할 것이다.

애당초 앤니스 백작이 그녀에게 흰뿔나무로 별채를 지어 주려 했던 것에도 이러한 이유도 품고 있긴 했다. 흰뿔나무도 제습 효과가 탁월한 자재니까.

― 네, 알겠습니다. 루니아 황후 폐하 쪽은 어떻게 할까요?

“아, 거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 예?

“티아나 아메시스트라는 사람이 에메르나 황비의 사치품으로 소모될 뻔한 흰뿔 산을 지켜 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테니까요.”

황후가 사랑하는 숲이라고 소문이 난 흰뿔나무숲이 있는 흰뿔 산이 에메르나 황비궁의 한낱 별채로 소비된다면 분명 이러한 소문이 퍼질 것이다.

‘황후는 이제 끝났다.’고.

그 소문은 그렇지 않아도 아론 황태자가 폐위되고, 엄청나게 약화된 황후 세력에게 어마어마한 전의 상실감을 갖다 줄 게 분명했다. 그런데 황실에 약초를 납품할 정도로 세력을 키운 대상단 그루안의 제2 관리자가 그 숲을 지켰다니? 이 이야기는 황후 세력에 또 다른 희망감을 안겨 줄 것이다.

겸사겸사 황후 폐하의 귀에도 티아나 아메시스트의 이야기가 들어가면 더 좋고.

그럼 훗날 내가 클로드를 통해 황후의 중독을 낫게 할 약초를 들여 보내는 데에 유리할 것이다.

“아, 셀트론. 그러고 보니 혹시 그건 어떻게 됐어요?”

― 그건, 아……! 제가 황제 폐하를 직접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 말입니까?

난 일전에 셀트론에게 “혹시 황제를 직접 진찰하고 처방할 방법이 있겠느냐”고 물어보고, 부탁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에메르나 황비에 의해 독살당할 황제의 운명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음,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기는 한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전 ‘약초를 다루긴 하나, 의학 지식이 없는 상인’으로 치부되는 모양이더군요.

“끄응…… 셀트론이 드루이드의 후손이고, 대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이라 하더라도요?”

― 네. 작위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고, 전에 예리엘 만물 대상단주가 그러더군요. 마탑의 주인인 그녀조차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게 고작이라고 했습니다.

“음…… 아쉽게 됐네요.”

안타깝게도 귀족들 입장에서 셀트론은 아무리 부를 축적해도 ‘상인’에 그치는 모양이다. 그 귀족들도 상단을 운영하고 있으니, 대상단을 운영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텐데도.

아무래도 황제까지 구해 내는 건 너무 욕심인 것 같다. 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통신을 끊었다. 때마침 메리가 돌아왔다.

“편지를 보내고 왔어요. 특급으로 보냈으니 모레쯤이면 도착한다고 합니다.”

“응, 고마워. 고생했어.”

난 이제부터 불어올 파란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 * *

5일 후.

“아니, 뭐야?!”

메기 같은 수염이 유독 인상적인 한 남자가 읽고 있던 나무꾼 조합의 편지를 책상 위에 탕 내려놓고는 소리를 질렀다.

“일을 그만두겠다고? 더 높은 급여를 부른 이가 있어? 허!”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조차 제대로 터지지 않아 화가 날 지경이었다.

메기 수염이 인상적인 남자, 그는 앤니스 백작으로 라움디셀 공작령 서쪽의 한미한 소영지를 갖고 있는 남자였다. 본래 자작가였던 앤니스가는 조부의 숱한 비리와 로비 덕분에 선황제의 눈에 들어 간신히 백작 작위를 얻어 내었다. 이는 현 백작은 물론이고 선친에게도 창피한 약점으로 남아, 불명예를 씻는 것만이 숙명이라 여길 정도였다.

해서, 앤니스 백작은 현재 황제의 모든 총애를 받고 있는 에메르나 황비의 눈에 들어 어전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얻고자 했다. 이 또한 결국 그의 조부가 했던 ‘비리와 로비’였지만, 그 핏줄이 어디 가겠나. 앤니스 백작은 오로지 출세만 바라볼 뿐이었다.

한데, 그 에메르나 황비에게 잘 보이고자 준비한 사업이 초장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감히, 귀족인 나의 명령을 무시하고 파업을 하더니 기어이……!”

와그작, 앤니스 백작의 손아귀에서 나무꾼들의 성명문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앤니스 백작은 화가 나서 콧김을 연신 뱉어 댔지만,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대관절 티아나 아메시스트란 놈은 대체 뭐 하는 작자야? 돈이 얼마나 썩어 빠졌기에, 고작 나무꾼 나부랭이들을 고용하는 데에 인당 150실버나 준단 말이야!”

앤니스 백작이 나무꾼들을 고용한 건 인당 70실버였다. 이것도 원래 68실버씩 받는 이들을 2실버나 높게 불러 준 것이었다. 그런데 150실버라니! 이는 1골드 50실버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앤니스 백작이 부른 액수보다 두 배가 넘는 금액이란 말이다.

“젠장, 젠장……!”

그렇다고 150실버를 넘게 책정해 주자니, 돈이 너무 아까웠다. 이리되면 벌목엔 성공한다 하더라도, 정작 별채를 지을 돈이 없어진다.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제기랄, 앤니스 백작이 상스러운 욕을 입에 담으며 종이를 쥔 손으로 얼마 남지 않은 머리도 쥐어뜯었다. 일이 순조롭게 빠그라지고 있는 행태에 훌쩍, 훌쩍 울음까지 나왔다.

‘에메르나 황비님께 도움을 청해 볼까? 아니, 아니야. 그분께서는 이 정도 일을 헤쳐 나갈 힘도 없냐며 날 무시할 거야.’

어쩌면 듬뿍 기대하게 해 놓고 실망시켰다며, 황제가 직접 엄벌을 하려 할지도 모른다. 수렁 같은 절망감에 앤니스는 그만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같은 시각, 이 소식은 하이페디움 제국의 황후 루니아 위스테리아 에멜하르트의 귀에도 들어갔다.

하나로 묶여 늘어뜨린 머리칼이 여름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렸다. 언뜻 보면 백금발처럼 옅은 금사가 섞인 은발 같은 밀빛 머리칼이 아주 다정해 보였다. 그녀의 라일락처럼 옅은 보랏빛 눈동자가 깜빡거린 때였다.

“황후 폐하, 혹시 그 일을 들으셨습니까?”

황제를 닮아 시린 달빛이 연상될 정도로 깨끗한 은색 머리칼에, 플로라이트 보석처럼 투명한 빛이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뛰어 들어왔다.

“티아나 아메시스트라는, 그루안 상단의 제2 관리자가 폐하께서 사랑하는 그 숲을 지켜 냈다고 합니다!”

그는 바로 폐태자, 아론 그레이프 에멜하르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