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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99화 (99/186)

99화

내가 생각한 한 가지 방법, 그건 바로 내가 나무꾼들을 몽땅 고용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현재 고용주인 앤니스 백작보다 더 비싼 값에!

그리고 나무꾼들에게 지시하는 거지. ‘모든 벌목에서 손을 떼고, 산을 지키는 데에 주력하라.’고.

그럼 나무꾼들은 더 이상 ‘파업’이 아닌, 고용주의 명령을 듣는 것이 된다. 이러면 에메르나를 총애하는 황제도 ‘소모적인 파업은 그만두라’고 개입하기 어려워진다.

왜냐면 나무꾼들은 고용주의 말을 듣는 것뿐이거든.

앤니스 백작이 돈이 없어서 내가 비싸게 고용한 나무꾼들을 더 비싸게 고용하지 못하는 걸 어떡하겠나. 아니, 오히려 허영심 많은 에메르나라면 ‘이만한 돈도 없어?’ 하고 앤니스 백작을 일찌감치 손절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앤니스 백작은 에메르나 황비의 궁에 초호화 별채를 지어 주지 못할 테니 최측근이 될 수 없고, 약초꾼들은 다시 약초 채집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자본을 때려 박아 해결하는 일인 만큼, 이게 무슨 터무니 없는 짓이냐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장은 이게 가장 확실하고 빠른 해결법이다.

해서, 셀트론에게 티아나 아메시스트 계좌에 있는 돈을 물은 건데…….

“5억 골드요? 그렇게나 많았어요? 헙!”

난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가 얼른 입을 막았다. 그리고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다행히 공중통신구 부스는 방음이 잘되는지, 문 바로 바깥에 있는 앤과 메리도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셀트론이 웃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럼요. 정확히 따지면 5억 골드하고도 800만 실버쯤 됩니다.

“세상에…….”

―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아가씨께서 주신 도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인걸요.

“으음…….”

현재 셀트론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투자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가 손대는 사업이 족족 성공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셀트론의 뒤에는 바로 내가 있었다.?

나는 지난 3년간, 회귀 전에 아버지 글라델리스 후작이 부를 모았던 방법과 시류를 몽땅 셀트론에게 알려 주었다. 덕분에 그를 ‘솔로몬의 눈을 이어받은 자’라고도 불렸다.

“티아나 아메시스트 계좌에 상당히 많은 돈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5억 골드라니……. 엄청나네요.”

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하자, 셀트론이 부드럽게 웃었다.

― ‘고작’이래도요. 제가 더욱 정진하여 아가씨께 합당한 대우를 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

하마터면 “이미 충분하다.”고 사양을 할 뻔했다.

휴, 그래서는 안 되지. 돈 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잖아.

난 가까스로 겸손을 삼키고, 대신 부담을 갖지는 말아 달라고 말했다.

― 그런데 아가씨, 돈이 급하십니까? 티아나 아메시스트 계좌의 돈이 필요할 정도로요?

“아, 그게요.”

사실 나는 두 개의 계좌를 가지고 있다. 비상금격인 티아나 아메시스트의 계좌와 라티아 라움디셀의 계좌. 여기엔 황제가 직접 준 글라델리스 상단의 지분의 일부를 처분한 금액과 클로드가 따로 저금해 주고 있는 돈, 그리고 내가 사재를 아껴 저금한 돈이 입금되어 있다. 그러니 라티아 라움디셀의 계좌만으로도 어지간한 돈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일에 공작님이 나의 미래를 위해서 저금해 주신 돈을 쓸 수는 없지.

“사실은 제가 사람들을 좀 많이 고용할 일이 생겨서요.”

― 사람들을요?

“네. 혹시 흰 뿔산의 나무꾼 파업 사태를 알고 계시나요?”

― 아,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오전, 예리엘 만물 상단주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네, 제가 그들을 좀 고용하려고 해요.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재고용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금액으로요.”

― 예에?

셀트론이 해괴한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난 그의 반응에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세한 건 해결한 후 이야기 드릴게요. 우선 알았어요. 5억 골드 조금 넘게 있다는 말이죠?”

― 아, 예. 예에. 그렇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난 셀트론에게 인사를 하고 통신을 끊었다. 공중통신구 박스에서 나오자, 메리와 앤이 대화를 나누다가 나를 돌아봤다. 앤의 표정에는 어쩐지 미안함이 역력했다.

‘카르시안 도련님과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난…….’

으음, 아무래도 내가 셀트론과 통화하는 사이 메리가 앤에게 내게 도착한 카르시안의 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 모양이다.

끙, 간신히 잊었는데 또 떠올랐잖아!

앤이 앞으로 말조심을 할 거라는 건 너무 좋은데, 이 마음을 읽는 능력 때문에 다시 그 짤막한 편지 내용이 떠올라 버렸다. 아무래도 한동안 ‘카르시안’의 이름만 들어도 편지가 자동으로 연상될지도 모른다.

몸을 바쁘게 움직이면 다시 잊을 수 있겠지.

“자, 돌아가자.”

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클로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간 김에 쇼핑도 하고, 좀 놀다 오라고.’

‘아빠가 따로 주는 용돈이니까 가져가.’

앤의 품이 유독 묵직하게 보이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음…….”

“아가씨?”

“혹시 더 들르실 곳이 있나요?”

내가 멈춰 서서 뜸을 들이자, 앤과 메리가 나란히 내게 물었다. 막상 쇼핑을 하자니, 어디서 뭘 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그게…… 쇼핑을 하고 싶은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옷은 항상 공작님이 오몽 살롱 마담을 공작성으로 불러서 맞춰 줬지.

“지난 3년간 길거리에서 옷을 산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

내가 멋쩍은 얼굴로 돌아보며 말하자, 앤과 메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의 실없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막 처음으로 나들이를 나온 온실 속 아가씨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어머나아.”

허리에 손을 얹고 상체를 뒤로 젖혀 가며 웃는 앤은 그렇다 쳐도, 항상 고상하고 얌전하던 메리도 입가를 가린 채 후후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 웃는 거 아니야?”

난 괜히 민망해져 입술을 비쭉거렸다. 아하하하, 한참이나 웃던 앤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우와, 우리 아가씨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다니. 공작님이 들었으면 일주일은 으스댔을걸요?”

“후후, 맞아요. 공작님께서 들으셨으면 참 좋아하셨을 거예요.”

메리가 미처 웃음이 지워지지 않아 진한 미소가 걸린 채 다정히 말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놀림이라곤 조금도 담기지 않은, 순수하게 기쁘고 감탄하는 표정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말을 들은 난 비쭉거리던 입술을 슥 집어넣고 대신 쑥스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응, 그러게.”

클로드는 옷은 물론이고 각종 장신구와 가방, 구두 등의 사치품도 모두 계절에 맞춰 성으로 사람을 불러서 해결했다.

그 모든 건 공작님이 우리를 귀하게 키우려고 무척이나 노력하고 계시단 증거지.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나…… 지난 3년간 정말 공작가의 아가씨처럼 살았구나.

새삼 신기했다. 후작가의 장녀지만 사생아였던 내가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다니. 3년 전만 하더라도 엘레네가 ‘물려준다’는 명목으로 버린 드레스를 수선해 입고, 유행은 물론 광택도 잃은 보석을 보관하고, 험하게 다뤄 때가 탄 가방과 내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가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져.

언젠가, 클로드가 내게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었다.

‘라티아,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 바로 ‘망각’이라는 말이 있지.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덮어쓰는 건 아주 현명한 방법이란 소리야.’

당시 난 클로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치욕을 어떻게 잊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과거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아무리 큰 상처도 언젠가는 아물고, 아무리 짙은 흉터도 언젠가는 새살로 덮이는 것처럼.

가만히 생각에 잠긴 나를 보던 앤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요, 아가씨. 제가 주로 옷을 사는 곳에 가 볼래요?”

“응? 앤이?”

“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옷을 사나 구경해 보는 것도 공부가 되지 않을까요?”

“어머, 정말요. 견학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메리가 참 좋은 생각이라며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쳤다. 그녀의 얼굴에서 ‘앤이 웬일로 도움이 되는 말을 다 하네.’ 하고 앤을 기특히 여기는 생각이 읽혔다.

“견학, 견학이라……. 응, 좋아!”

“그럼 제가 애용하는 곳으로 모실게요.”

앤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물론 라움디셀 영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이곳 시장 경제는 어떠한지 구경 다녔긴 했지만, 그것도 벌써 3년 전이다.

그리고 돈이 엄청나게 많다는 걸 알았으니…….

난 앞서 걷는 앤과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메리를 올려다봤다.?

“나온 김에 구두 장인이 있는 수제화 가게도 가는 건 어때?”

“음, 좋아. 분명 아가씨께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그동안 두 사람에게 받은 것이 많으니 선물을 해 줄까?

멀리에 있는 고용자들에게 큰돈을 쓰기 전,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챙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 * *

우리가 돌아오는 걸 보고 자상하게도 현관까지 마중을 나온 클로드가 우리를 보며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해서.”

“히히…….”

“내가 준 돈으로 앤과 메리의 여름옷을 사 줬다고? 10골드를 들여서?”

클로드가 내게 챙겨 준 돈은 금화 150개였다. 가장 돈을 많이 준다는 여관 점원의 한 달 월급이 은화 80개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돈이다. 난 그중에서 무려 금화 10개를 쓰고 왔다.

“음…… 실은 수잔하고 버틀러 그리고 카르시안을 따라간 길버트와 성의 다른 시종과 하녀들의 옷도 좀 샀어요…….”

“허…….”

클로드가 양손은 물론 물품 상자가 쌓인 현관을 휘둘러봤다.

설마 반품해 오라고 하려나?

만약 그렇다면 내 계좌에서 10골드를 찾아서 채우겠다고 말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때.

“네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구나.”

클로드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공작성의 주인인 내가 해야 할 일을 네가 다 했으니 말이야.”

“어…….”

“아주 잘했다. 과연 내 명예 따님다워.”

생각지도 못한 칭찬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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