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카르시안이 보낸 편지로 울적해진 기분을 전환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라티아가 밖. 그러니까 상업 지구에 가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그루안 상단에 가 봐야겠어.’
대체 왜, 정확히 무엇 때문에 바람개비 꽃이 있는 산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는지 알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으니까.
메리가 라티아의 연약한 살이 타지 않게 꼼꼼히 크림을 발라 주는 때에, 앤이 물었다.
“오늘도 버니캐롯 잡화점에 들릴 거죠?”
버니캐롯 잡화점, 그곳은 직접 염색한 종이를 판매하는 곳이었다. 꾸밈이 들어간 다이어리 내지도 무척이나 아기자기해서 라티아는 물론 앤과 메리도 자주 애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라티아가 버니캐롯 잡화점에서 산 종이로 카르시안에게 편지를 보냈단 거다.
“…….”
“…….”
앤의 눈치 없는 물음에 라티아와 메리는 우뚝 굳어 입을 꾹 다물었다. 휘이잉, 타이밍도 좋게 천장에 달린 냉방 마도구에서 찬바람이 불어왔다. 보닛까지 야무지게 쓴 라티아의 밀빛 머리카락이 산들산들 흔들렸다. 그 아래의 얼굴은 우중충했지만. 그런데 앤의 눈치 없는 행동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아가씨? 표정이 왜 그래요?”
보통 분위기가 이만큼이나 싸늘해지면 알아서 입을 다물 만도 한데, 과연 앤이었다. 앤은 라티아의 가방을 불량하게 멘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다시 한번 라티아를 재촉하려 할 때, 결국 메리가 나섰다.
휙!
“앗, 깜짝이야.”
바람 소리가 들릴 만큼 고개를 휙 돌린 메리는 목이 180도 돌아간 것같이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라티아에게 자신의 표정과 입 모양이 보이지 않게 최대한 고개를 돌린 채.
“닥, 쳐.”
조용히 뻐끔거렸다.?
그 입 모양과 번뜩이는 눈을 본 앤은 본능적으로 입을 합 다물었다.
‘이거…… 여기서 한 마디라도 더 하면 저렇게 목을 돌려 버리겠단 뜻이겠지……?’
다행히 앤이 더 이상 떠들지 않자, 메리가 싱긋 웃으며 목 상태를 원상태로 되돌렸다. 그 모습엔 흠칫, 라티아도 조금 놀랐다.?
‘모, 목이 어떻게 된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메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웃으며 턱 밑에 묶은 보닛의 리본을 고쳐 줬다.
“자요, 아가씨. 다 됐어요.”
그녀의 얼굴은 평화롭기만 했다. 하지만 앤에게 보여 주고 있는 뒤통수에선 ‘입 열면 죽는다.’는 아우라가 풍기고 있었다.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그래…….’
치이, 앤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기실 앤이 이렇게 눈치 없이 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왜냐면 조금 전, 수잔이 카르시안이 라티아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설명해 줄 때 앤은 길버트의 편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길버트는 카르시안의 시종으로 뒤늦게 아카데미로 불려 갔는데, 앤과 술친구였던 그는 종종 앤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 길버트에게서 도착한 편지의 내용이 꽤 심각했다. 최근 토드엘 남작의 일로 라티아의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도와주려는 앤의 집중력이 흐트러질 정도로 말이다.?
앤은 조금 전 읽었던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아카데미 내 따돌림이라니…….’
세상에 그 누가 상상이나 할까? 해적을 교화시켜 해상 무역로를 개척한 클로드의 아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을 거라고!
‘뭐, 길버트가 말하길 카르시안 도련님에게 다 생각이 있다고 하니까…….’
길버트는 만약 아카데미에서 ‘카르시안이 사고 쳤다!’는 소식이 들리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미리 언질해 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클로드나 라티아가 걱정할 테니, 일단은 잠자코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사실은 공작성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카르시안 도련님의 일인데!’
생각을 마친 앤이 뭐라 입을 열려는 때, 콰직!
“으윽!”
메리가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가는 라티아를 따라가는 척 앤의 발등을 밟아 버렸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핑 돌고 세상이 아찔하게 멀어지는 현기증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앤이 풀썩 주저앉아 밟힌 발등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위로 싸늘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카르시안 도련님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 하지 마.”
“끄윽…… 뭐, 뭐어?”
“적어도 오늘은 말이야.”
놀라서 올려다보니, 메리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그것을 본 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어, ……어, 으응.”
밟힌 발등의 고통조차 잊을 정도로 말이다.?
결국 앤은 메리의 협박 아닌 협박을 잘 받아들여, 길버트에게 받은 편지에 적혀 있던 카르시안의 일을 꿀꺽 삼켰다.
* * *
공작령 상업 지구의 그루안 상단.
난 여기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네에? 나무꾼들이 파업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산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내게 상업 지구의 이야기를 전해주던 직원이 면목 없다는 듯 열심히 허리를 숙였다. 난 오뚝이처럼 사과하는 직원을 말렸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관자놀이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벌목하는 나무꾼들이 지금 산의 입구를 막고 파업 시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산은 워낙 산세가 험해서 다져진 길이 아니면 사람이 다니기 위험해서, 나무꾼들이 막고 있는 한 입산 자체가 어렵다고 약초꾼들이 그러더라고요.”
“으으음…….”
이건 참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약초 수급이 안 되나 했더니, 나무꾼이 아예 가로막고 있을 줄이야.
이러면 여기서 손 쓸 수 있는 방도는 완전히 사라진다. 난 팔짱을 끼고 내 팔뚝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하다 물었다.
“그런데 그 나무꾼들은 왜 파업을 하는 거래요?”
“그게…… 산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네? 산을…… 위해서라고요?”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산을 위해서 산을 막고 있다고? 나무꾼들이?
의문이 끝을 모르고 꼬리에 꼬리를 물 적, 직원이 쩔쩔매며 말했다.
“그게 말입니다. 음, 사실 바람개비 꽃은 흰 뿔산에서만 자생합니다.”
“네, 알아요. 그리고 흰 뿔나무가 유독 많아 그렇게 불리는 산이고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 산에 자란 흰 뿔나무가 다량으로 벌목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네. 그런데 이제, 그게 그냥 벌목 수준이 아니고 아예 뿌리째 뽑아가는 경우가 대다수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나무꾼들이 이 이상 더 벌목하면, 그러니까 나무를 뽑으면 산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더 이상의 벌목은 멈춰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음, 타당한 이야기예요. 저도 배우길, 나무가 많이 없는 민둥산은 산사태가 날 확률이 높다고 했어요.”
“예, 맞습니다. 흰 뿔산 밑에는 민가가 많습니다. 대부분이 임업 종사자고요. 그러니 흰 뿔산이 상하면 그 마을의 많은 이들이 삶터와 일터를 잃는 거나 다름없죠.”
그런 거라면 나무꾼들이 왜 더 이상 벌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시위하는지 이해가 갔다.?
“그만하면 고용주가 나무꾼들의 말에 따라 줄 만도 하지 않나요?”
“그런데 그…… 고용주가 말입니다.”
직원은 내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뜸을 들였다. 그러다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벌목을 지시한 자가 바로 앤니스 백작이라고 합니다.”
“앤니스 백작……이요?”
그가 뭐 어쨌다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린 그때. 난 실내에 있는데도 번개에 맞은 줄 알았다.
“아……!”
앤니스 백작! 앤니스 백작은 그 사람이잖아, 그 사람!
날 번쩍 일깨운 번개는 다름 아닌 원작의 내용이었다. 에메르나 황비는 원작에서 최종 빌런인 만큼 수많은 작은 빌런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름이 나온 앤니스 백작도 에메르나 황비의 수하였다.
가만있어 보자, 그러니까 앤니스가 에메르나 황비의 최측근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아, 그래! 흰 뿔산에서 공수한 대량의 흰 뿔나무로 에메르나 황비의 궁에 초호화 별채를 지어 주면서였지!
“아, 세상에.”
앤니스 백작이 나무꾼들의 파업 시위에도 아랑곳 않고 흰뿔 나무를 벌목하려는 이유는 다름 아닌 에메르나 황비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직원이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 말을 이었다.
“흰 뿔산이 루니아 황후 폐하의 사유지인 건 아시죠?”
“아, 네. 제국 지리 수업 시간에 배웠어요.”
“예. 그렇다면 이해가 빠르실 것 같습니다. 흰 뿔산은 황후 폐하의 사유지이자, 흰 뿔나무 숲은 황후 폐하께서 가장 사랑하는 숲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지역을 지키려는 나무꾼들의 파업을 무시하는 건 황후 폐하에 대한 반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난 직원이 왜 이 이야기를 하는 데에 그렇게 쩔쩔맸는지 깨달았다.
아, 나무꾼들이 파업을 하고 있는데 억지로 입산하려고 들면, 자칫하다간 앤니스 백작과 한패로 묶일 수도 있구나.
“하……. 이를 어쩌죠?”
“으음, 음…….”
직원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난 그에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아 괜찮아요, 지금 당장 해답을 내놓으라고 한 건 아니었어요.”
“아, 네에…….”
직원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휴, 살았다……. 어떻게 말하나 걱정했는데…….’ 직원의 쩔쩔매는 생각이 고스란히 읽혀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일단 알겠어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았으니까 돌아가 볼게요.”
“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직원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난 그에게 이러지 말라고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아니에요. 이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니까요. 오히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말해 줘서 고마운걸요.”
“아가씨…….”
내 말 한 마디에 직원이 진하게 감동받은 듯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조금 전까지 땀을 닦던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냈다.
“그럼 가 볼게요. 또 다른 일이 생기면 말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나를 깍듯하게 배웅했다. 난 그루안 상단을 나오자마자 곧장 공중통신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실 내 머릿속엔 한 가지 방안이 있긴 했다. 문제는 그게 완벽한 방법이 아니라는 거지만…….
짤그랑, 공중통신구에 동화가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셀트론? 저예요. 라티아. 다름이 아니고요…… 지금 티아나 아메시스트 계좌에 얼마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