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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97화 (97/186)

97화

* * *

한편, 수잔에게 편지와 함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클로드는 연신 되묻고 있었다.

“카르시안이? 라티아에게? 편지를 짧게 보냈다고?”

어절 사이사이 의문이 가득 차 있는 게, 도무지 수잔의 말을 믿을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수잔은 100% 사실만을 전했다.

“네. 그 편지가 고작이었어요. 그거 한 장, 아니. 반 장이요.”

“허,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실은 조금 전, 클로드에게도 카르시안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런데 클로드의 편지에는 온통 라티아 이야기밖에 없었다.

‘두 장의 편지 중, 두 장이 전부 라티아의 이야기였는데…… 정작 라티아에게 쓴 편지는 반 장이 채 되지 않았다고?’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

‘부끄러워서 내게만 주접을 떨고 정작 라티아에게는 체면을 차렸을 리는…… 없고.’

카르시안이 라티아의 앞에서 멋지고, 어른스럽고, 강인해 보이고 싶어 하는 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티아에 대한 마음을 숨기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 오히려 라티아가 이상하게도 카르시안의 앞에서만 눈치가 없어진단 걸 그도 알기에, 더 티 내려고 노력한다면 모를까.

‘설마 아카데미에 가기 전에 차여서 그런가?’

아니, 그건 아니다. 그렇다기엔 라티아가 만들어 준 화관을 직접 들고 마차에 탔지 않은가.

“쓰읍…….”

클로드가 아리송한 숨을 들이키며 라티아에게 도착했다는 편지를 꺼내 들었다.?

사실 클로드는 카르시안의 편지를 읽지 않을 생각이었다. 라티아야 워낙 눈치가 없으니 ‘공작님도 아들의 편지를 궁금해하겠지?’ 하고 수잔에게 편지를 들려 보냈다지만, 클로드는 아니다. 굳이 아들의 연애편지를 훔쳐보는 못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조금 궁금은 했다지만…….’?

이렇게 확인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대체 무슨 이야긴지…….”

아직도 수잔의 말을 믿지 못하는 클로드가 곧장 편지를 읽어 나갔다. 사실 읽을 것도 없었다. 한눈에 전부 들어오는 짧은 문장이 끝이었으니까.

“……?”

클로드의 머리 위로 의문투성이인 물음표가 마구잡이로 떠올렸다.?

클로드는 조금 전, 라티아가 그랬듯이 편지를 거꾸로 들어 보고, 뒤집어도 보고, 햇빛에 비쳐 보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그게 다였다.?

클로드가 허망한 얼굴로 수잔에게 물었다.

“……진짜로?”

“그렇다니까요.”

수잔이 슬픈 듯 가슴께를 누르며 대답했다. 그러나 클로드는 수잔을 믿지 못해 다시 한번 편지 봉투를 탈탈 털어 봤다. 이 또한 라티아가 했던 행동 그대로였다. 그러니 클로드도 라티아처럼 추가 편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허어.”

클로드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탄식 같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어떻게, 한번 깨워 드릴까요?”

수잔이 장단을 맞춰 주면서도 장난은 그만 치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그 편지가 전부였어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전 사실 사칭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아무리 봐도 필체가 카르시안 도련님의 것이어서요.”

“음…….”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클로드가 진중한 얼굴로 카르시안의 편지를 내려다봤다. 제게 도착한 편지와 나란히 두고 비교를 해도 필체는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아가씨는 상심에 빠져서 눈물까지 글썽이셨어요.”

“그, 음…….”

“솔직히 전 아직도 사칭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도련님께서 아가씨에게 이렇게…… 성의 없는 편지를 보낼 리가 없잖아요. 아가씨를 궁금해하는 말도 한 마디 없고요.”

수잔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라티아의 앞에서는 상처를 후벼 파는 꼴이 될까 봐 참아 왔던 말이었다. 클로드가 이마를 짚고 편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 편지에선 라티아 이야기밖에 안 해 놓고…….”

라티아는 잘 지내는지, 유치는 다 빠졌는지, 이빨 요정이 가져가도록 베개 밑에 숨겨 놨는지, 여름인데 찬 것만 먹는 건 아닌지, 배탈이 나진 않았는지, 열대야에 잠을 설치진 않는지, 외로워하지는 않는지, 삐로리는 아직도 밖으로만 돌아 라티아를 심심하게 하는지…….

클로드의 편지엔 온통 라티아에 대한 걱정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라티아에겐 이따위로 말했다, 라…….”

고민하던 클로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렸다. 그가 짙은 눈썹을 오므리며 말했다.

“더위 먹었나 본데.”

“……네에?”

“그러지 않고서야 카르시안이 이따위 편지를 나도 아니고 라티아에게 보냈을 리가 없잖나.”

클로드가 라티아에게 보낸 편지를 손가락으로 성의 없이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더위 먹은 게 분명해. 그게 아니면 미쳤거나.”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할 길은 딱 그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클로드는 그렇게 아예 못을 박아 버렸다.

“버틀러에게 말해서 약을 좀 보내도록 해. 그럼 정신 차리겠지.”

“그, 그러면 될까요?”

“그래. 사춘기라서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기엔 내 편지에 적힌 내용들이 말이 되지 않잖나.”

수잔이 그것도 그렇다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그렇고…….”

클로드는 카르시안의 편지를 아예 못 본 셈 치려는 건지, 다시 수잔에게 건네며 말을 돌렸다.

“문제는 라티아군.”

“아, 네. 맞아요. 아가씨가 얼마나 상심했을지…… 분명 마음이 많이 다쳤을 거예요.”

“카르시안의 고백을 뻥 발로 까 버렸을 때처럼 눈치 없게 굴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3년 전, 글라델리스 후작저에서 있던 일들 때문인지 자신에게 부정적인 시선에 대해서는 유달리 신경 쓰는 것도 있고.’

클로드는 턱을 괸 채 책상을 두드리며 어쩔까 고민했다.

‘전에 마음이 아플 때 내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지금 찾아가는 건 독이려나.’

문득 빈센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딸은 아들과 달라서 힘들 거라던 그의 조언이 말이다.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으나 갈피가 잡히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클로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사람을 시켜 라티아가 좋아하는 몽블랑 과자점의 딸기가 올려진 우유 케이크와 얼그레이 크림 에클레어를 사 오도록 해. 딸이 시무룩해 있는데, 빈손으로 찾아갈 수는 없지.”

클로드의 말에 편지를 쥔 채 결단을 기다리던 수잔이 빙긋 웃었다.

“네.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내 집무실로 가져와. 내가 직접 가지고 갈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클로드가 직접 나서 준다니. 수잔이 한시름 던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클로드는 턱을 괸 채 테이블만 두드렸다. 도무지 카르시안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거지?’

피가 이어진 아들인데도 이해가 가지 않으니, 나중에 라티아의 사춘기가 시작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공작님, 공작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클로드가 한창 고민하는 때에 그 당사자인 라티아가 문을 통통 두드렸다.

“음?”

클로드가 놀라 고개를 들자, 밖에 서 있던 버틀러가 슬쩍 문을 열어 줬다.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얼굴부터 들이미는 고양이처럼, 라티아가 쏙 작은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저 잠깐 밖에 다녀와도 돼요?”

그건 아주 뜻밖의 이야기였다.

“밖에?”

“네. 안 돼요?”

수잔이 말하길, 라티아는 마음에 큰 상실감을 안아 시무룩해졌다고 했는데 웬걸.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라티아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클로드의 집무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작은 다람쥐가 쪼르르 다가오는 것같이 앙증맞은 걸음새는 여전했다. 해서, 라티아의 마음을 알면서도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밖에는 왜?”

“아, 음…….”

그런데 그게 실수였나 보다.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지 않나. 라티아가 힐끔, 클로드의 책상 위를 장식하고 있는 편지 더미를 눈짓했다.

‘……아.’

그제야 클로드는 라티아가 카르시안의 편지 때문에 의기소침했던 것이 맞으며, 기분 전환 겸 밖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로드는 다시 라티아의 머릿속이 카르시안으로 가득 차기 전에 얼른 말했다.

“그래. 알았다. 대신 앤, 메리와 함께 가도록 해.”

“네, 알겠어요.”

라티아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클로드는 무심했던 조금 전의 자신이 생각나 책상에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멍청한 자식.’

조금 전까지 라티아를 그렇게 걱정해 놓고, 막상 걱정할 새가 없이 바보처럼 굴어 버렸다. 클로드는 마음이 급해졌다.?

“라티아.”

그는 막 돌아 나가려는 아이를 불러 세우고 서랍을 열어 돈이 든 주머니를 꺼냈다. 거래용으로 따로 빼 둔 금화이므로 가문의 공용 재산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가져가거라.”

“네?”

투욱 하고 책상에 올라오는 소리부터가 묵직했다. 그 안에 든 금액이 얼마인지 가늠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

라티아가 마치 놀란 토끼처럼 눈을 땡그랗게 뜨고 깜빡이자, 클로드는 나른한 사자처럼 고개를 까딱거렸다.

“나간 김에 쇼핑도 하고, 좀 놀다 오라고.”

“아, 하지만…….”

“아빠가 따로 주는 용돈이니까 가져가.”

“아, 아빠가…….”

“그래. 그러니까 가져가.”

클로드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더 거절할 수도 없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한 라티아는 손이 아래로 툭 꺼질 정도로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섰다. 클로드는 라티아가 돈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의 짐을 좀 덜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라티아가 그루안 상단의 제2 관리자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라티아가 후장식 총기의 투자자이기 때문에 후장식 총기는 예리엘 만물 상단과 그루안 상단에서 독점 판매하고 있었다.

‘나 백지 수표 있는데…….’

물론 기뻤다. 기쁜데…… 이렇게까지? 안타깝게도 유독 손이 작고 힘이 없는 라티아에게 묵직하기만 한 금화 주머니는 오히려 쇼핑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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