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난 설레는 마음으로 봉투 속에 잘 들어 있는 편지지를 꺼냈다. 수잔도 무척 설레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첫 문장부터가 좀 이상했다.
[라티아 라움디셀에게.]
라티아…… 라움디셀?
카르시안이 적은 나의 이름이 똘똘 뭉쳐져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것 같다.
“하…….”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나 보다. 답답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막혔던 숨이 토해졌다.
“라티아 라움디셀……?”
매일같이 본 나의 이름이지만, 난생처음 본 해괴한 글을 읽은 것처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난 라티아 라움디셀이 맞다. 클로드가 내 후견인이 되었으니까. 그뿐만 아니라 난 클로드의 입으로 ‘명예 따님’이란 말도 들었으니 ‘라움디셀’ 성을 쓰는 것에 거리낄 것도 없어졌다.
그런데 이 기분은 대체 뭐지?
카르시안은 분명 맞는 말을 한 건데, 왜 난 배신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얼얼해지는 거지?
손바닥이 저릿거렸다. 나도 모르게 기분 나쁘게 콩닥거리는 가슴을 짚었다. 아, 이건 콩닥거린다기보단 쿵쾅거리는 것 같다. 심장이 화가 나서 갈비뼈를 다 부숴 버리려는 것처럼 쿵쾅쿵쾅거리고 있었다.
“아가씨?”
“어…….”
수잔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불렀지만, 대답해 줄 정신이 없어 나는 뜸을 들였다.
라티아 라움디셀, 라티아 라움디셀, 라티아 라움디셀…….
“이상하네.”
“네?”
“아, 아냐. 아무것도.”
그저 내 이름을 보았을 뿐인데, 이런…… 이런 기분이라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난 스스로를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편지를 읽어 나갔다.
그런데.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날이 더우니 음식을 드실 때 유의하세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편지는 이 간결한 문장이 전부였다.
“……응?”
편지지를 뒤집어 보고, 거꾸로 보고, 햇빛에 비쳐 보아도 저 문장이 끝이었다. 정말로, 저게 다였다!
“하.”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난 허탈한 웃음을 짧게 끊어 뱉으며 허망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게…… 진짠가? 정말 이게 끝인가?
마지막 희망으로 편지 봉투를 탈탈 털어 봤지만, 먼지 한 톨 떨어지지 않았다.
난 항상 다섯 장, 여섯 장, 이렇게 보냈는데! 정원에서 딴 꽃도 보내고, 방으로 날아들어 온 나뭇잎도 보내고 그랬는데!
내가 멍하니 굳어 있자, 결국 수잔이 나섰다.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저렇게 얼어붙으신 거지?’
표정에 물음표가 가득 찬 수잔이 고개를 빼어 내가 책상에 올려 둔 편지를 흘낏거렸다.
“아…….”
수잔도 읽었겠지. 상단에 무뚝뚝하게 적힌 내 이름을. 그리고 그 밑의 하잘것없는 내용을.
잠시간 탄식한 그녀가 입가를 가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는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니 예의를 차리시는 게 아닐까요?”
“아, 예의.”
한쪽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난 뭐 예의 차릴 줄 몰라서 카르시안한테 편지를 몇 통씩 보내고 그랬나? 카르시안이 공자로서 예절 교육을 받았다면 나도 공녀에 준하는 교육을 받았는데.”
내가 투덜거리자 수잔이 얼른 역성을 들어 줬다.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너무하네요. 아가씨는 내내 ‘친애하는 카르시안에게’라고 적어 보냈는데, ‘라티아 라움디셀’이라는 풀네임으로 부르다니요.”
‘이제서 벽을 치려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수잔이 일부러 삼킨 말이 표정에서 역력히 드러났다. 난 수잔의 말을 들은 후에야, 내가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알았다.
아, 나 지금 서운한 거구나.
나는 그동안 카르시안에게 세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카르시안 라움디셀에게’라고, 풀네임을 부른 적은 없다.
“내용도…… 정말 너무할 정도로 딱딱하고요.”
게다가 내용도, 카르시안은 내게 마치 만난 지 얼마 안 된 영애를 대하듯 경어를 쓰고 있었다.
난 그냥 우리가 대화하듯 썼는데,
그러다 보니 할 말도 무진장 많았는데 카르시안은 고작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날이 더우니 음식을 드실 때 유의하세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가 끝이었다. 너무 간단해서 그새 외워 버렸다.
나, 참. 진짜 어이가 없어서…….
“하, 하하…….”
혼자 헛웃음을 짓고 있자니, 수잔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도련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그렇잖아요. 도련님께서 다른 사람의 편지도 아니고, 아가씨의 편지에 이렇게 답장할 리가 없어요.”
혹시 수신자가 잘못된 걸지도 모른다면서 수잔이 편지 더미를 뒤지는 시늉을 했다.
“어쩌면 사칭일지도 몰라요. 아니면 아가씨께 보낸 게 아닐지도요.”
하지만 수잔의 열띤 위로에도 불구하고 난 계속해서 비참해지기만 했다.
“편지에 쓰여 있잖아. 라티아 라움디셀에게, 라고.”
그러니 부정할 수도, 눈 가리고 아웅 할 수도 없다. 저 편지는 카르시안이 내게 보낸 편지가 맞았다. 짧은 내용이 전부인, 저 편지는 내게 도착한 것이 맞았다. 화가 났다.
난 왜 카르시안의 필체를 알아서, 사칭이라는 수잔의 말에 행복 회로도 못 돌리는 건지!
문득 가슴이 미어진다는 표현이 떠올랐다. 그래, 지금 내 가슴은 미어지고 있었다. 밀대에 의해 이리저리 치대지다가 납작하게 깔리는 반죽마냥 아주 사정없이 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요, 아가씨. 카르시안 도련님이 아가씨께 이렇게 퉁명스러운 편지를 보낼 리가 없잖아요.”
“몰라.”
수잔의 잘못도 아닌데, 그녀는 나를 어르고 달래 줬다. 그런데 누가 위로를 해 주니 나도 모르게 자꾸 퉁명스러운 목소리만 나간다.
“사춘기가 또 도졌나 보지!”
사춘기가 병이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고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카르시안에게 서운하고, 그가 괘씸했다. 내가 여러 장의 편지를 무려 세 통이나 보낼 동안 이 반 장짜리 편지 한 통을 보냈다는 것도 미웠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아카데미에 갈 때는 뭐, 어? 편지 해 줄 거냐는 둥, 와 줄 거냐는 둥……. 마치 나랑 떨어지는 게 아쉬운 사람처럼 굴었으면서!
이젠 화가 날 지경이었다. 난 씩씩거리며 편지를 아무렇게나 접어 다시 봉투에 밀어 넣었다.
“아가씨, 답장용 편지지를 가져올까요?”
“아니.”
“안 보내시게요?”
“흥, 잘 지낸다잖아. 날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뭐하러 보내.”
볼멘소리가 쉴 새 없이 나왔다.
조금 전, 편지를 읽기 전까지는 나에게 있었던 일을 답장으로 보낼 생각에 들떠 있었다. 토드엘 남작가 파티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클로드, 앤과 함께 어떻게 헤쳐 나왔는지 말할 생각에.
공작님한테 ‘명예 따님’이란 말도 들었다고 알려 주고 싶었는데…….
이 싹퉁바가지가 울고 갈 편지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럴 거면 내가 만들어 준 화관은 왜 챙겨 갔어?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입술이 비쭉거렸다. 난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며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이러지 않으면 시큰한 눈가에서 한바탕 울음을 쏟아내 버릴 것 같기 때문이었다.
울지 마, 울긴 왜 울어. 서운하지만, 그렇게 서운하지도 않아. 괘씸하지만, 울 정도로 괘씸한 건 아니라고! 고작 이런 일로 울기엔 세상에 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울지 마. 그니까 울지 말라고 라티아!
그러나 나의 노력과 달리 그렁그렁 눈가에 맺히기 시작하는 눈물을 말릴 길은 없는 듯했다. 수잔이 가슴 아픈 듯 탄식을 뱉기에, 난 재빨리 수잔에게 카르시안의 편지를 내밀었다.
“자. 공작님도 아들의 근황이 궁금하실 테니까.”
기어이 울먹거리느라 목소리가 흔들린다. 수잔은 그런 날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일단 내가 건넨 편지를 받아 들었다.
‘아가씨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시겠지. 밖의 앤과 메리도 데리고 가는 게 좋겠다.’
수잔의 따스한 배려를 읽을 수 있었지만, 감동받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응, 알았어.”
난 수잔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다음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건 셀트론 상단의 직원이 보낸 편지였다.
내가 일전에 부탁한, 황후의 몸을 해독할 약초를 구했단 연락일까?
난 애써 생각을 돌리며 편지를 뜯었다. 하지만 이 편지도 내 기분을 낫게 해 주지는 못했다.
“아, 진짜…… 오늘 왜 이래…….”
편지엔 바람개비 꽃이 자생하는 산에 입산이 힘들다는 충격적이고도 짜증 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바람개비 꽃은 양식이 무척 어렵고 까다로워서 셀트론도 아직 씨앗으로는 재배에 성공하지 못한 식물이었다. 그러니 야생에서 자라는 묘목을 구해야 하는데, 산에 들어갈 수 없다니.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하아…….”
난 이마를 짚었다. 입술 새로 새어 나가는 한숨을 막을 생각조차 못 하겠다. 짚고 있는 동그란 이마가 좀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오늘 나한테 왜 이래…….”
그토록 기다린 카르시안의 편지에선 냉기만 풀풀 날리지, 황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막혀 버렸지…….
“아, 머리 아파.”
두통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다. 지끈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누르다가 결국 책상 위로 늘어져 버렸다.
씨이, 간신히 참았던 울음이 다시 비집고 나올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힝, ……흑.”
이건 억울하고 짜증 나서 그래. 약초를 구하지 못하는 게 된 게 속상해서 그런 거야. 절대로 카르시안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구.
난 한동안 입술을 꾹 물고 볼을 타고 흘러 책상에 똑, 똑 떨어지는 눈물방울 소리를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