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95화 (95/186)

95화

앤을 완전히 내부 고발자로 만드는 것.

그건 클로드가 도박장에서 체포한 무리들 사이에서 앤만 끄집어냈던 방법을 다시 한번 이용하는 것이었다.

라티아가 딸기 하나도 제대로 베어 물 수 없을 것처럼 작은 입술로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앤을 토드엘 남작가 사람으로 위장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도박장에 있었고, 내부 고발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 거죠. 그리고 그 앤이 저에게 앙심을 품은 로레나의 심부름꾼이라고 하는 거예요.”

앤은 임무에 실패했단 이유로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런 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그녀를 깔끔하게 빼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클로드는 감탄했다.

‘사실 라티아는 아이샤와 나도 모르는 딸 아닌가?’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마음이 꼭 들어맞을 수가 없다. 놀랍게도 클로드도 라티아와 같은 생각을 했다. 앤에게 의사를 물어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긴 했다.

‘도박장에서 토드엘 남작을 잡는 데에 도와준 이가 앤이라는 걸 알았을 땐 얼마나 놀랐던지.’

하마터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하고 물어볼 뻔했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앤 또한 불법 도박장에 참가한 사람으로 현행 체포를 당할 위기였으니까.

“남작 영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왜냐면 토드엘 남작가에서 일한 앤은 제게 남작 영애가 꽃차를 마시고 쓰러진 게 연기라고 이야기를 해 줄 테니까요.”

라티아는 이미 모든 생각을 마쳐 둔 후였다.

“남작 영애가 앤이 자신의 하녀가 아니라며 부정하고 모함이라 주장하려면 앤이 말한 ‘남작 영애는 사실 아프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전면 부정해야 해요.”

“하지만 그 영애는 부정할 수 없을 테지. 그게 사실이니까.”

“네, 맞아요. 남작 영애가 아프지 않다는 건 의사를 불러와서 진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니까요.”

“그러면 그 영애는 공작가의 아가씨인 너를 모함한 죄를 받게 되겠지.”

“그러니 남작 영애는 절대로 앤이 자신의 하녀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작 영애의 잘못이 덮어지는 것도 아니죠. 제가 앤을 믿지 못하는 척하며 의사를 부를 거니까요.”

“어찌 됐든 남작 영애는 너를 모함한 죄를 받게 되겠군.”

?

클로드가 아주 만족스럽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 모습은 때때로 사악하게 킬킬 웃던 라티아와 쏙 빼닮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후 앤은 완벽한 내부 고발자가 되어 정상참작을 받고, 남은 이들만 처벌하면 되는 거예요.”

라티아가 손뼉까지 짝 소리 나게 치며 말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버릴 것 없이 다 주옥같았다. 클로드는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앓는 소리를 끌어 올렸다.

‘이 작은 머리에 든 생각은 왜 그렇게나 많은 건지.’

한 손안에 다 들어차는 작은 머리통이 항상 맹렬히 움직이더니, 이제는 클로드마저 따라잡았다.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찌 기특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클로드가 말랑말랑한 라티아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으무?”

커다란 눈이 땡그랗게 뜨여 클로드를 올려다봤다. 몰랑몰랑한 볼은 잘 숙성된 뽀얀 밀가루 반죽처럼 부드럽게 늘어났다.

‘중독성이 엄청난데.’

물론 늘어나는 볼살만큼이나 늘어난 라티아의 귀여움도 한몫했다. 클로드가 아프지 않게 라티아의 볼을 조물락거리며 말했다.

“역시 널 내 딸로 입양했어야 했다.”

“으웅?”

“그랬더라면 우린 최강의 부녀가 됐을 텐데.”

카르시안 때문에 그러지 못했던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하지만 라티아는 클로드의 말만이라도 무척 기뻤다.

‘지난번에 한 번 아빠 같다고 말은 했지만…… 공작님의 입으로 부녀, 라니…….’

아, ‘부녀’라는 단어가 이다지도 기분 좋은 울림을 가진 단어였던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행복한 단어였던가.

라티아는 기쁜 마음에 클로드에게 폭 안겨 가만히 ‘부녀’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조금 뒤, 클로드가 설렁줄을 잡아당겨 헥터를 불렀다. 이야기를 들은 헥터는 가슴을 탕 치며 말했다.

“협박과 공갈, 사기! 내 전문이지!”

과연 전(前)해적 선장다운 말이었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라티아의 예상대로 위로를 받은 것과 별개로 임무에 실패했다는 것에 대해 풀이 죽어 있던 앤은 단박에 자신이 나서겠다고 간청했다.

‘잘할 수 있어요, 제가 꼭 하게 해 주세요!’

그 말을 들은 클로드와 라티아가 똑같이 사악하고도 계략적인 표정으로 마주 보며 웃은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다음 날, 토드엘 남작가 일원은 고스란히 수도로 향했다.

“수도에서 황제 폐하께서 직접 처형을 선고하신다면서요?”

“그래. 내 영지의 일이니 여기서 마무리 짓겠다고 했지만 더 큰 콩고물을 원하는 모양이더군.”

더 큰 콩고물, 그것은 수도에도 존재하는 불법 도박장의 소탕을 말했다. 요컨대 황제는 토드엘 남작을 ‘본보기’로서 처형하려는 것이었다.?

“‘지금은 음지에 잘 숨어 있겠지만 적발되면 이보다 더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뭐 그런 거겠지.”

클로드가 어제저녁에 먹은 메뉴를 말하듯 여상하게 말했다. 아무리 다른 뜻이 있다지만, 황제가 직접 나섰으니 선처는 물론이고 항소조차 못 하게 되었다.

‘반기를 드는 즉시 황명거역죄가 될 테니까.’

영지의 일을 모두에게 알린 격이니 라움디셀 공작령에 대한 평판에는 조금 문제가 생기겠지만, 후처리는 이편이 훨씬 더 깔끔한 게 사실이다.

“도박장을 직접 운영한 남작은 사형이고, 남작 부인은 무기징역이라고 했어요. 그럼 영애는 어떻게 되나요?”

“왜, 걱정되느냐?”

클로드의 물음에 라티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이라기보다는 그냥…….’

엘레네가 생각났을 뿐이다. 회귀 전, 엘레네 때문에 라티아는 희대의 악녀, 동물학대범이라는 무서운 별명이 생겼다. 그래서 회귀 후 똑같이 되갚아 줬다.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생각이 나.’

제가 너무했던 건 아닌지, 엘레네도 저처럼 어린아이였는데 과한 복수를 한 건 아닌지…….

‘복수에 과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서 이번에 로레나의 괘씸한 연기를 토드엘 남작의 도박장과 엮어 버린 것도 내심 지나친 건 아닌지 상념이 따랐다. 클로드는 라티아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생각 그만.”

“……네?”

“내 손바닥보다 더 커지기 전까지는 딱 그만한 생각만 해. 더 과하게, 깊게 파고들지 말란 소리다. 지금도 이미 지나쳐.”

슬슬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투박하면서도 다정했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작성의 아가씨, 즉 공녀를 모함한 죄는 크다.”

“그건 알아요. 그렇지만…….”

?

“그럼 이렇게 생각하거라.”

?

클로드의 목소리에 일순간 장난스러움이 깃들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라티아가 올려다보자 그가 한쪽 입꼬리만 씨익 끌어 올리며 악동처럼 웃었다.

“이 하이페디움 제국 영웅의 명예 따님이라고.”

“……!”

클로드의 말에 라티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제는 부녀, 오늘은 따님이다. 이제는 부정할 수가 없다.?

“…….”

라티아는 대답하는 대신 클로드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 어떤 대답보다도 확실한 기쁨의 표시였다. 그러나 클로드의 장난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답은?”

굳이 또 그걸 듣고 싶어 한다.

일순간 라티아는 제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나 철렁했지만, 조심스레 올려다본 클로드의 만면에 짓궂은 웃음이 걸린 걸 보고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만 말고.”

클로드가 다시 라티아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라티아는 볼이 늘어나 발음이 늘어지지 않도록 어절 사이에 힘을 줬다.

“좋아요.”

좋아요, 그렇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 대답은 다리를 끌어안은 것 다음으로 라티아의 마음을 가장 확실하게 나타내는 대답이었다. 굳이 사르르 접혀 흐물흐물 녹아 미소짓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말이다.

“흠.”

“앗!”

클로드가 번쩍 안아 들자, 라티아는 깜짝 놀라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모습은 마치 아빠에게 안기는 아이 같았다. 이제 10살이건만 라티아는 아직도 작기만 했다. 포근히 풍기는 어린아이 특유의 부드러운 향기에, 클로드가 라티아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날카롭고 딱딱한 콧대에 말랑한 라티아의 볼이 짜부러졌다.

“아하하.”

간지러운 나머지 라티아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자, 클로드의 단정한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럼 이만 안으로 들어가지. 날이 덥다.”

“네.”

라티아가 부끄러운 듯 행복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라티아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어지러운 생각은 깨끗하게 사라진 후였다.

* * *

내가 클로드의 명예 따님이 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로레나는 너무 어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감옥이 아닌 수도원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했다. 클로드 덕분에 잊고 있던 까끌한 죄책감이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갔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편지가 왔다.

“어서 열어 봐요, 아가씨!”

난 나 못지않게 설레는 얼굴로 두 손까지 꼭 모으고 있는 수잔의 말에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기다려 봐…….”

하지만 기대감으로 들뜨기는 나도 마찬가지라 아까부터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왜냐면 지금 우리가 이토록 기대하고 있는 편지는, 다름 아닌 아카데미에 간 카르시안이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