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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94화 (94/186)

94화

날 어찌나 세게 안았는지, 콧속 가득 클로드의 냄새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조금 쌉싸름하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게 하는 냄새였다. 더운 바깥 날씨에 눅눅해진 천의 냄새도 났다.

얼마나 안겨 있었을까?

클로드가 나를 천천히 떼어 내며 말했다.

“미안하다.”

“……!”

“날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 주지 못 해서.”

지금, 나에게 사과……를 한 건가? 공작님이? 나한테? 내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얼떨떨하면서도 뜨거운 뭔가가 울컥 차올랐다. 그건 아마도 울음일 것이다. 난 눈시울이 아려 오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클로드를 바라봤다. 그는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나를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클로드는 나의 눈을 통해서 내 마음이 다치진 않았는지, 다쳤다면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섬세하고 따듯한 마음에, 나는 응어리진 것도 없는 마음이 풀어져 버리는 걸 느꼈다.

“……응.”

그래서 난 괜찮다거나 그런 말 하지 말라는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울망울망 차오른 눈물을 억지로 참지도 않았고, 애써 웃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회귀 후,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달리느라 쓰고 있던 가면이 클로드 때문에 한 꺼풀씩 벗겨지다가, 지금 완전히 깨진 것 같다. 표정을 숨길 줄도, 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다음엔…… 그땐 같이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힘이 들어가지 않던 입술을 타고 솔직한 마음이 고스란히 나가 버린다. 그럼에도 놀라거나,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나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클로드의 눈이 조금 커졌지만, 이내 나른한 웃음으로 뒤덮였다.

“그래. 그런 일이 다시는 없게 할 거지만, 만약에 생긴다면 그땐 같이 있어 주마.”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뱃속이 울렸다.

무서운 목소리도 아닌데…….

난 클로드가 가만히 내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고여 있던 눈물을 흘려보냈다.

잠시 후.

클로드가 너무도 솔직한 목소리로 딱 한 마디 말했다.

“어떻게 조지지.”

그건 아주 무섭고, 또 내 마음을 완벽하게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사실 난 어떻게 조질지 다 생각해 뒀다. 앤이 딴 돈으로 남작가의 재산을 탈탈 털고, 남작가를 떠받드는 이들 앞에서 남작가의 재력의 기반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사실 남작은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고.

그런데 앤이 돈을 따오지 못했으니…….

“세상에 도박장의 주인이 누군지 밝혀야죠.”

“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밝히기는 좀 아쉬운데.”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토드엘 남작이란 걸 밝혔다면서요. 다른 이들이 토드엘 남작가로 가서 항의하면 더 흐지부지 끝날걸요?”

“당장은 아닐 거다. 토드엘 남작이 도박장의 주인이란 걸 밝히려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도 알려야 할 테니까.”

그럼 자신도 도박장에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

“흠…….”

클로드가 어떻게 토드엘 남작을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나는지 고민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 또한 여전히 클로드의 품에 안겨 생각에 잠겼는데, 문득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그런데 공작님, 공작님은 어떻게 토드엘 남작이 도박장의 주인이란 걸 아셨어요?”

“내 영지에서 불법 도박장이 운영되고 있다는 걸 안 지는 꽤 됐다. 다만 너무 비밀리에 운영되어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랐어. 토드엘 남작이라고 의심은 하고 있었지. 그는 대리 영주직을 맡고 있긴 했지만, 그렇기엔 너무도 많은 부를 축적했거든.”

“아하…… 그럼 오늘은 주인을 확실히 알아보러 가셨던 건가요?”

“음, 그래. 그간 여러 번 잠입했지만 항상 실패했었거든. 네가 보내 둔 앤 덕분에 잡을 수 있었지.”

클로드가 내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난 그의 손길이 기분 좋아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 공작님은 원래 어떻게 하실 생각이셨어요?”

“그 즉시 처형을 하려고 했어.”

하긴, 이런 일에선 현장체포 및 즉결심판이 가장 깔끔하긴 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그럼 앤도 처벌을 받는다는 거다.

“사전에 말을 맞추고 조력을 해 준 내부 고발자라며 앤을 빼 오긴 했지만, 현행범들을 몽땅 처벌한다면…….”

클로드가 입을 다물었다. 난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내부 고발자라서 참작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안 돼. 앤도 처벌해야 뒷말이 없을 거야. 하지만 앤은 잘못이 없어. 앤을 보호하면서 잡아 온 이들을 몽땅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

그런데 그런 방법이 있을까?

난 눈까지 질끈 감고 생각했다. 이때였다. 한 가지 방안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아!”

“아.”

나와 클로드가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며 감탄사를 뱉었다.

앗, 설마 공작님도 방법을 알아낸 걸까?

클로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먼저 말해 봐.”

“아. 네.”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클로드에게 방금 내 머릿속을 치고 지나간 생각을 열심히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클로드의 표정은 호기심과 흥미로움이 진하게 깃든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문제는 그게 긍정적인 건지, 부정적인 건지 모르겠다는 거다.

난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어떠세요?”

내 생각엔 괜찮은데, 공작님이 듣기엔 터무니없게 들릴까?

걱정되어 손바닥에 땀이 고일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웬걸.

클로드가 내 머리에 손을 턱 올려놓고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린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야. 나도 같은 생각을 했거든.”

* * *

“여보! 여보!”

저 멀리서부터 딱딱하고 습한 지하실 바닥에 요란하게 부딪치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로 새된 목소리가 섞여 들었는데, 울음은 물론 비명까지 녹아 있었다.

“여보, 대체 이게……!”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토드엘 남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녹이 슨 두꺼운 철창 안에 갇혀 구해달라 팔을 뻗는 토드엘 남작에게 한달음에 달려왔다.

“여보!”

“아아, 여보!”

부부는 눈물의 상봉을 했다. 남작 부인은 얼른 제 남편을 살폈다.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당신을 험하게 대하진 않았고요? 세상에, 고문당하신 건가요? 얼굴이 반쪽이 됐잖아요!”

토드엘이 잡혀 들어온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건만, 남작 부인은 한 달은 못 본 이를 대하듯 애틋하게 말했다. 하지만 토드엘 남작은 그런 아내의 지극정성에도 곧 들이닥칠 지옥이 걱정되어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저 볼살이 디룩디룩 늘어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보기 흉하게 울음을 삼킬 뿐이었다.

‘아아, 하필이면 공작님께 바로 들킬 게 뭐란 말인가! 이제 난 어떡하면 좋지? 내 아내는, 내 딸은! 내 돈은, 내 지위는!’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 하필이면 클로드에게 걸려 무마할 수도 없고, 그럴 길도 보이지 않았다.

‘내부 고발자란 대체 누구고,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토드엘 남작의 얼굴엔 진한 절망만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그것을 명민하게 읽은 남작 부인에겐 다 뜻이 있었다.

“여보, 걱정하지 마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뭐, 뭐? 그게 정말이오? 하지만 당신이 뭘 할 수 있단 말이오?”

“걱정 마세요. 그게 있죠, 여보…….”

남작 부인은 눈물로 얼룩진 제 남편의 얼굴을 애타게 쓰다듬으며 조금 전, 낮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줬다.

“뭣이? 라티아 그 계집이 우리 로레나에게 독을 먹여?! 로레나는 괜찮나?!”

“쉬잇. 목소리 낮춰요. 그리고 계집이라뇨.”

화들짝 놀란 남작 부인이 주변을 바쁘게 살피며 얼른 남작의 입을 틀어막았다. 남작이 진정한 듯 보이자, 남작 부인이 나붓하게 속삭였다.

“엄연한 공작가의 아가씨인 걸요.”

남작은 제 딸을 위험에 빠트리게 한 계집을 높게 사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작 부인의 속셈을 알아차린 그의 입가에 슬며시 섬뜩한 미소가 스쳤다.

“그래. 공작가의 아가씨가 우리 딸에게 독을 먹였다, 이거지.”

남작은 뒤통수 저 멀리서 성스러운 종이 울리는 환청을 들었다. 막막하기만 했던 눈앞이 밝게 트이며 드디어 돌파구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니 저만 믿으세요, 여보. 우리의 돈줄…… 아니, 생활력을 이대로 잃진 않겠어요.”

남작 부인이 눈을 휘어 접어가며 웃었다. 남작은 제 아내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아까 남작 부인이 들어올 때처럼 저 멀리서부터 수십 개의 군화가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장한 트라이던트 기사단이 부부의 앞에 멈춰 섰다.

기사단장 자격으로 맨 앞에 서 있던 헥터가 처억 하고 부부를 가리키며 외쳤다.

“비한센 토드엘! 그리고 올리나 토드엘! 두 사람을 라티아 라움디셀 아가씨 시해 미수범으로 체포한다!”

철컹 하고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소름 끼쳤지만, 그보다 소름 끼치는 헥터의 외침에 부부는 쩡 굳어 버렸다.

“시, ……시해?”

“누가, 우리가?!”

두 사람은 철창을 사이에 두고 엉겨 붙은 채 눈만 끔뻑거렸다. 그런 그들에게 헥터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래. 정확히는 시해 미수범의 부모지만!”

시해 미수범의 부모라니?

남작과 남작 부인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 말은 즉…….”

“로레나가……?”

“그럴 리 없어!”

“이건 모함이에요!”

드디어 상황 파악을 마친 부부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두 사람의 말을 들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올리나 토드엘도 지금 바로 투옥해!”

“예! 알겠습니다!”

그저 헥터의 명령에 따라 남작 부인까지 감옥에 밀어 넣는 충실한 기사만 있을 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조금 전으로 돌아간다.

라티아가 낸 꾀, 그건 아주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것이었다. 클로드에게 조심스레 속삭인 라티아의 말은 아주 깜찍했다.

“앤을 아예 진짜 내부 고발자로 만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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