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 *
처음 라티아의 계획을 듣는 순간 앤의 머리를 강타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
‘아가씨…… 정말 예언자라도 되는 거 아냐?’
라티아는 마치 조금 전, 마치 직접 본 것을 설명하듯 빠르고 정확하게 앤에게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앤은 카드를 바꾸고 삐로리는 원숭이를 방해해서 토드엘 남작이 건 판돈을 모두 쓸어 와. 원숭이를 데리고 사기를 치고 있는 거니까.’
머리 쓰는 것에 영 젬병인 앤의 머릿속에 콕 박힐 정도로 간결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지시보다도 앤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라티아가 불법 도박장의 주인을 알고 있는 데다가, 속임수까지 훤히 꿰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가씨는 대체 어떻게…….’
당시엔 라티아가 제게 명확히 명령하는 것이 너무도 멋있어서 흥분한 나머지 떠올리지 못한 의문이지만, 사건이 일단락되니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앤은 이 의문을 해소할 수 없게 되었다.
‘아가씨께서 명령한 일을 다 해내지 못했어.’
라티아가 앤에게 지시한 건 딱 두 가지였다. 카드를 이용해 모든 도박에서 승리할 것. 그리고 토드엘 남작의 돈을 몽땅 따올 것.
그런데 앤은 토드엘 남작의 돈을 따오긴커녕 클로드에게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 일을 끝마치지 못한 것이다.
‘마차에서 공작님께 해명은 했지만…….’
라티아가 시킨 일은 끝마치지 못한 것이다.
‘아가씨께서 실망하실지도 몰라.’
앤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몰라 두려운 기분마저 들었다.
* * *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올 게 왔구나.
조금 전, 난 돌아온 앤에게 급히 도박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들었다. 앤은 내가 한 지시대로 잘 따르려고 했지만, 도박장이라는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열기에 도취되어 흥분했다고 했다.
‘천천히, 조금씩 신경을 긁었어야 했는데…….’
해서, 내가 부탁한 ‘판 돈을 모두 따 오기’는 실패했다고 한다. 다만 불법 도박장의 주인이 토드엘 남작이라는 것은 밝혀냈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 자리에 클로드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녀올게. 앤은 여기에 있어.”
“네, 아가씨.”
앤이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조금 전, 로레나에게 당하고 와서 시무룩한 나를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쓰였다.
앤이 실패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풀이 죽을 만한 일은 아닌데…….
왜 그런가 싶었는데 나는 앤에게 이야기를 듣기만 했을 뿐,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게 생각났다.
그래서 더 풀이 죽었구나.
난 앤의 앞으로 다가가 아까 그녀가 나에게 보여 줬던 마술을 따라 했다. 주먹을 쥐었다 펴니 손가락 사이에 공이 있었다.
“앗……!”
다만 내 손은 앤처럼 크지 않아서 많이 찌그러진 공이었다. 이래서야 초장부터 트릭을 알려 준 꼴이 된다.
“소, 손이 작아서…….”
내가 멋쩍게 변명하자,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앤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이내 배를 움켜쥐고 깔깔 웃어 댔다.
“아, 아하하학!”
“앤!”
앤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메리가 주의를 줄 정도였다. 하지만 난 메리를 말렸다.
“응, 이렇게 기분 좋게 웃는 게 앤에게 더 잘 어울려.”
내 말에 메리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난 물러서는 메리를 보다 앤에게 다가가 배를 움켜쥐고 있는 손등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아, 하아아…… 진짜 웃…… 아가씨?”
숨을 몰아쉬며 눈가에 고인 눈물까지 닦던 앤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봤다. 난 앤의 손등을 연신 토닥거리며 말했다.
“고생했어, 앤.”
“아가씨…….”
“그러니까 괜찮아.”
“하지만…… 전 아가씨의 일을 잘 완수하지도 못했는걸요.”
“뭐 어때. 결정적인 것만 잘하면 되지.”
“그렇지만…….”
“아무튼 괜찮아. 다아, 괜찮아.”
그러니 너무 걱정하고, 신경 쓰지 말라고 나는 앤을 연신 다독였다.
아, 참. 공.
때마침 아까 앤이 내게 공을 줬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내가 다독이던 손을 잡아끌어 그 위에 공을 올려놨다.
“잼잼.”
“네?”
“기분이 좀 나아지더라.”
내 말에 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푸스스 웃어 버렸다.
이제야 좀 앤다운 얼굴이네.
“그럼 나 다녀올게!”
난 메리와 함께 클로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잠시 후, 나와 클로드는 마주 앉아 있었다.
“……토드엘 남작가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턱없이 낮아진 목소리가 뱃속을 울렸다.
와…….
난 속으로 멍하니 감탄했다.
맹수의 으르렁거림을 들으면 오금이 저려 도망도 못 가게 된다더니…….
클로드의 목소리에도 그런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난 우선 클로드에게 남작가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 일에 대한 부당함을 되갚아 주기 위해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는 토드엘 남작을 공격하려 했다고 설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뒷말은 미처 꺼낼 수조차 없었다. 난 가만히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는 클로드의 얼굴을 흘낏거렸다.
화…… 많이 나셨나?
클로드는 짙고 긴 속눈썹 때문에 눈매가 참 깊었는데, 그 깊은 눈매가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날만도 했다. 난 엄연히 공작가의 아가씨로서 공녀에 준하는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아니, 어쩌면 이런 중대한 일을 알리지 않고 내가 멋대로 움직여서 더 화가 난 건지도 모른다.
난 그저 칭찬받고 싶었을 뿐인데…….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클로드에게 먼저 말을 하는 게 옳은 순서기는 했다. 해서, 난 클로드가 나에게 어떤 벌을 내려도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너는?”
“네?”
“괜찮나?”
“……네?”
클로드는 내게 뜻밖의 말을 했다.
괜찮냐고?
……나? 나 말이야?
난 이해가 가지 않아 눈을 휘둥그레 뜨다 못해, 멍청하게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내가 대답이 없자, 클로드가 감았던 눈을 떴다. 핏빛보다 붉어 냉한 기운이 감도는 붉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저 눈동자를 보면서 단 한 번도 두려운 마음이 든 적이 없으니 말이야.
당장 불호령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금도, 나는 클로드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다정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말했다.
“네 마음은 괜찮냐고. 모처럼 친구를 사귄다고 들떠 있었잖나. 몸이야…… 그 허영심 많은 남작 부인의 딸의 거짓말일 테니 괜찮을 테고.”
아, 이래서인가?
클로드는 그 짧은 틈에 내 몸에 외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열이 나면 바로 표가 나는 두 뺨의 색도 살폈다.
이렇게 다정하기에, 난 공작님을 두려워한 적이 없던 거구나.
혼나러 왔으면서 그가 날 걱정해 주는 게 기뻐서 포실포실 웃음이 샜다.
“음?”
내가 쿡쿡 웃음을 참자 클로드가 “대답도 안 하고 웃기나 하다니.” 하고 중얼거렸다. 어쩌면 난 클로드가 나를 혼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혼내더라도 그게 나를 아끼기 때문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던 건지도.
난 비식비식 새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날 가만히 바라보는 클로드의 무릎 위로 엉기적엉기적 기어 올라갔다.
“……?”
클로드가 뭐 하는 거냔 시선을 보냈지만, 그의 입가엔 감춰지지 않는 기쁨이 이미 움터 있었다. 난 클로드의 허벅지에 앉아, 아빠한테 어리광을 피우는 아이처럼 폭 기대어 소곤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슬펐어요.”
순간 클로드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악 다문 이 사이로 “당장…….”으로 시작하는 욕 비슷한 말이 들렸다. 난 그걸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앤과 메리가, 또 수잔하고 버틀러가 있어서 괜찮았어요. 앤이 저한테 마술도 보여 줬어요!”
납작 기대어 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며 말하자, 잔뜩 일그러져 있던 클로드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풀렸다. 그리고는 커다란 손으로 내 뒤통수를 잡아 제 품으로 다시 기대게 해 줬다. 난 부드러운 이끌림에 몸을 맡겼다. 워낙에 단단한 몸이라 수잔이 안아 줄 때처럼 포근하진 않지만 마음이 따듯해지는 건 똑같았다.
가만히 기대어 있다 보니 한 가지 욕심이 생겼다.
사실 공작님한테 가장 위로를 받고 싶었다고 말하면, 서러우니까 공작님 생각부터 났다고 말하면…… 공작님은 내게 뭐라고 말할까?
나약하다고 혼낼까? 어리광 피우냐고 놀릴까? 그것도 아니면…….
난 클로드의 옷깃을 쥔 채 손만 꼼질거리다가 눈치를 보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좀…… 부러웠어요.”
“……음?”
“남작 영애에게 바로 달려오는 남작 부인이요.”
고른 숨을 내쉬던 클로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까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전엔 바짝 화가 났다면 지금은 어쩔 줄을 모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공작님이 어쩔 줄 몰라 한다니…….
클로드가 그럴 리가 없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조금 용기가 났다. 난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공작님 생각이 났어요.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 그렇지만 그냥…… 공작님이 엄청 보고 싶어졌어요.”
거의 숨을 토해 내듯 말했다.
이 말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어려운 건지!
하지만 더 긴장되는 건 따로 남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클로드의 반응을 살피려고 눈을 올려 떴는데.
퍽.
“힉?! 고, 공작님?!”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클로드가 주먹을 들더니 곧장 제 뺨을 갈겨 버렸다. 다행히 코피가 나거나 입술이 터지진 않았지만 금세 붉게 부어오르는 뺨을 보고 있자니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경악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 아니…….”
한참 동안 읽히지 않던 클로드의 표정이, 지금은 명확히 읽혔다.
‘애 앞에서 폭력을 쓰다니, 뭐 하는 거야!’
스스로를 강하게 힐난하는 속내가 말이다. 그 때문에 내 눈동자가 더 사정없이 흔들린 때였다.
“보지 마.”
클로드가 나를 꽉 안아, 아예 시야까지 차단시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