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도박장에선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아, 아니야! 사기는 무슨! 애초에 이 비스킷은 이 도박장에서 준 거라고! 다, 다들 먹은 거잖아! 응?”
“하지만 비스킷 밑면에 카드 문양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애초에 도박장인 만큼 이런 문양이 있는 비스킷을 나눠 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원숭이의 주인이 해명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중, 아까 경호원에 의해 끌려 나갔던 남자가 돌아왔다.
“그럼 카드를 검사해 보지. 내가 가진 이 마도구로 말이야.”
그런데 어쩐지 남자의 목소리와 체구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경박하기 짝이 없던 목소리는 딱 듣기 좋게 중후해졌고, 살밖에 없어 퉁퉁 불은 어묵 같던 팔뚝은 잘 단련된 근육이 숨겨진 것마냥 단단해 보였다.
“게임에 사용했던 카드를 조사하면 알게 되겠지. 저 야광 원숭이가 카드에 묻은 도료를 보고 힌트를 주고 있던 건지, 아닌지.”
“야광 원숭이?”
“저 원숭이가 야광 원숭이란 말이야?”
야광 원숭이는 희귀한 마물 중 하나로, 이렇게 밝은 곳에서도 흔히 야광 도료로 사용되는 오로라 반딧불이의 진액을 똑똑히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 내가 마물에 대해 좀 아는데, 저 원숭이는 야광 원숭이가 분명해. 생김새가 좀 달라 긴가민가했지만 눈동자를 보니 알겠더군.”
남자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다 카드를 검사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다들 원숭이의 주인에게 한두 번 털린 게 아니라서 개인적인 앙심이 있었다. 결국 딜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카드를 내어 줬다. 그리고 카드를 검사했는데.
“음?”
“이럴 수가. 아무것도 없잖아?”
이상하게도 카드에선 아무런 물질도 검출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야광 원숭이의 정체를 폭로한 남자가 조금 당황한 때였다.
“아, 잠깐. 지금 검사한 카드는 내가 개인적으로 가져온 거야. 내가 의심이 좀 많아서. 그런데…… 왜 이 세 장의 카드는 검사하지 않는 거지?”
앤이 딜러가 뽑아 엎어 둔 세 장의 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 아, 아니. 이건 아직 오픈하지 않은 카드이고 어, 어차피 다른 카드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다고 판명 났잖습니까? 그러니까…….”
딜러가 도와 달라는 듯 말을 끌었지만, 앤을 비롯한 다른 구경꾼들은 딜러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이 판은 깨진 판이잖아.”
“저 세 장의 카드도 함께 검사를 했어야지!”
“그래. 원숭이가 본 건 저 카드일 거 아냐?”
사람들의 원성에 딜러는 꼼짝없이 엎어 놓은 세 장의 카드를 뺏겨야만 했다.
그리고 검사 결과.
“여, 역시!”
“오로라 반딧불이의 진액이 묻어 있어!”
카드에서 오로라 반딧불이의 진액이 검출되었다.
“다른 카드엔 묻어 있지 않고, 저 카드에만 있다니. 딜러 놈도 한패인 거 아냐?”
사람들은 곧장 달려들어 딜러를 조사했다. 그 결과 야광 도료는 딜러의 엄지에 묻어 있었다. 딜러가 서 있는 테이블 아래 벽면에 부착되어 있는 야광 도료 스탬프도 발견되었다. 딜러는 카드를 뽑은 후 테이블 벽에 붙여 둔 스탬프에서 해당 카드의 모양을 엄지에 찍고, 그것을 카드에 발랐던 것이다.
‘아하, 그래서 카드를 확인했구나.’
도박은 결국 다 속임수라더니, 도박꾼과 딜러가 한편을 먹을 줄이야!?
앤은 헛웃음을 터뜨렸고 사람들은 딜러를 포박해 앉혀 두고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야광 원숭이는 카드에 찍힌 문양을 읽고 같은 모양이 그려진 비스킷을 먹어 주인에게 알렸던 거군.”
“원숭이가 도박장에서 나눠 준 비스킷을 먹든 말든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도박꾼들이 사나운 기운을 품고 원숭이의 주인 주위를 에워쌌다.
“그, 그게…….”
그는 어버버거리며 뒷걸음질을 쳤지만 풍채가 달라진 남자에 의해 가로막혀 버렸다.
그가 말했다.
“다들 이 사기꾼의 얼굴이 궁금하지 않나? 이 사기꾼은 지금 붙잡힌 저 딜러뿐만 아니라 다른 딜러가 있는 테이블에서도 사기를 쳤을 확률이 높아. 그런데 그 많은 딜러와 다 아는 사이일 방법은 하나뿐이지.”
“하나뿐이라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로, 남자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도박장의 주인.”
그렇단 말은 여기서 이루어지는 모든 게임이 다 짜고 치는 판이었단 뜻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타오르고 있는 장작에 기름병이 던져졌다. 그것이 터져서 더 큰 불길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공개해!”
“대체 누구야!”
“가면을 벗겨라!”
“면상이나 좀 보자고!”
사람들이 외쳤고, 사기꾼은 도망가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내 풍채 좋은 남자가 사기꾼의 어깨를 잡아채 가면을 휙 벗겼다. 그리고 그 사기꾼의 얼굴을 확인한 모두는 쩡 얼어붙고 말았다.
“아, 아니. 당신은…….”
“어떻게 이런 일이…….”
사람들은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사기꾼이자 이 불법 도박장의 주인은 다름 아닌.
“토드엘 남작!”
한때 대리 영주였던 토드엘 남작이었으니까!
* * *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응, 들어와.”
내 방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메리였다. 그녀는 아까 토드엘 남작 가문에서 마셨던 것과 동일하게 우린 냉침 꽃차를 들고 있었다.
“시엘 님께 선물 받은 간편 냉침 키트로 우린 꽃차입니다. 토드엘 남작가에서도 이걸 사용했을 거예요.”
“응, 고마워.”
난 조금 긴장된 손길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역시 꽃이 아무리 좋아도 빠르게 냉침하느라 색만 우려져서 그런지 깊은 맛이 없었다. 난 잔을 내려 두며 중얼거렸다.
“……좋아. 난 멀쩡해.”
내가 이 차를 다시 마신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꽃은 물론 차를 우리는 방식에도 문제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 다행히 나는 로레나처럼 복통을 호소하는 일은 없었다.
“다른 영애들한테 뭐 연락 온 것도 없지?”
“네. 따로 정찰도 시켰는데 오로지 토드엘 남작 영애만 복통을 호소하고 있다고
“그렇겠지.”
난 이제야 좀 긴장이 풀려 익숙한 손짓으로 잔을 들었다. 나를 포함한 다른 영애들은 문제가 없는데 오로지 로레나만 아프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로레나가 원작에서 이리스를 괴롭혔듯이 나를 모함했다는 것.
난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하지만 내가 평소에 마시는 방식으로 우린 차가 아니라서 그런지 그저 향만 풍기는 물을 마시는 것 같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만히 눈치를 보고 있던 메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응, 뭔데?”
“어떻게…… 그 불법 도박장의 주인이 토드엘 남작이란 걸 아셨나요?”
“아, 그거.”
난 빙긋 미소를 지으며 메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정말 궁금한지 내 쪽으로 상체도 약간 기울인 채였다. 난 키득키득 새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 글라델리스 후작이 귀족들의 약점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단 사실, 혹시 알아?”
“네? 그랬나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해적이었던 메리는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내 골똘히 생각하던 메리의 얼굴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혹시……!’ 하는 깨달음이 말이다.
메리는 내게 이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난 아무것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내가 치부책을 외웠다는 건 황제는 물론 클로드에게도 비밀인 일이니까. 내가 시치미를 뚝 떼자 궁금해서 어쩔 줄을 모르던 메리는 이내 속으로 결단을 내린 듯했다.
‘아무래도 비밀인가 보네.’ 하고.
난 메리가 이렇게 눈치가 빠르고 똑똑해서 너무 좋더라.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칭찬을 속으로만 되뇌며, 지금쯤 도박장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을 상상했다.
굳이 앤과 삐로리를 보낸 이유는 그 둘이 맡는 게 최적이기 때문이다. 토드엘 남작은 훈련시킨 원숭이를 이용해서 꼼수를 부리고 있다.
그러니 이쪽도 동물을 이용해 줘야 수지가 맞지 않겠어?
또 앤이 딜러에게 건넨 카드는 사실 속임수 카드다. 다 똑같아 보이는 카드지만, 사실은 뒷면이 미묘하게 달라 무슨 카드인지 알 수 있는 ‘마술용 카드’였다. 또 어떤 사고가 생겨도 메리보단 앤이 그런 자리에서 뻔뻔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말이다.
“아,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토드엘 남작이 건 판돈을 몽땅 따서 말이야.
내가 기지개를 쭉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때였다. 퇴창의 쿠션을 정리하던 메리가 깜짝 놀라 나를 돌아봤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돌아오셨어요!”
“어? 정말?”
난 얼른 클로드를 맞이하러 갈 생각이었다.
내가 짜 놓은 판도 이야기해 줘야지.
이 계획이 내 생각대로만 흘러간다면 클로드의 걱정거리를 하나 줄여 줄 수 있다. 클로드에게 칭찬을 받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들떴다.
그런데 메리가 내게 꽤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 줬다.
“그런데요, 아가씨…… 앤도 함께인데요?”
“……응?”
“공작님과 앤, 삐로리가 함께 돌아왔어요. 그것도…… 도박장 가면을 쓴 채로요.”
“도박장 가면? ……공작님도?”
“네!”
난 깜짝 놀라 메리가 서 있는 퇴창으로 달려갔다. 창밖엔 정말 도박장 가면을 쓴 클로드와 앤이 마차에서 내린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메리가 아리송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글쎄…….”
심지어 앤이 찬 돈주머니는 출발했을 때와 비교해도 그다지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