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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91화 (91/186)

91화

* * *

앤과 삐로리는 북적거리는 한 주점을 찾았다.?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주점 안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났다. 술과 땀내 그리고 담배 연기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비위가 상할 정도로 독했지만 해적 출신인 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앤은 곧장 꼬장꼬장해 보이는 늙은 남자가 서 있는 카운터로 향했다.

“이봐.”

남자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에 시큰둥한 시선을 보냈다. 앤이 뒤집어쓰고 있는 후드엔 보풀이 일어 있을 정도로 낡았지만 묘하게 깨끗한 느낌을 줬다. 남자의 탁한 갈색 눈동자에 의심이 피어오를 때, 앤이 품속에서 가면을 슬쩍 꺼내며 속삭였다.

“참새는 귀리와 보리 중 어느 걸 더 좋아하지?”

그녀의 행동과 말에 남자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뜨였다. 그리고는 아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친절한 표정으로 손까지 싹싹 비비며 대답했다.

“보리를 가장 좋아하지요.”

“역시 그렇군.”

다시 품 속으로 가면을 숨긴 앤이 삐로리가 숨어 있는 가방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 카운터에 슥 올렸다. 남자는 그 은화를 아주 조심스레 제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말했다.

“마침 좋은 맥주가 들어왔습니다. 자, 이쪽으로.”

남자는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다른 남자에게 카운터를 보라고 눈짓한 후 앤을 주류 창고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선반 하나를 기울여 비밀의 문을 열었다. 비밀의 문 안에는 흙벽이 고스란히 드러난 어두컴컴한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자가 아주 공손하게 그 통로를 손짓하며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앤은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 통로 안으로 몸을 들였다. 그녀가 어느 정도 멀어진 걸 본 남자는 주위를 살피며 다시 비밀의 문을 닫았다.

앤은 남자가 문을 닫은 것을 확인한 후,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열었다.

“삐쪼릭!”

여태 숨을 죽이고 있던 삐로리가 퍼드득 날아오르며 뻐근한 날개로 기지개를 켰다. 삐로리는 곧장 앤의 어깨에 걸터앉았고, 앤은 그런 삐로리의 턱 밑을 살살 긁어 주며 씩 웃었다.

“자, 그러면…… 한탕 하러 가 볼까?”

“삐, 삐로로!”

의기투합하듯 우렁차게 대답한 삐로리가 한쪽 날개를 촤악 펼쳐 어두컴컴한 앞을 가리켰다. 앤은 낯선 곳이 두려울 법도 한데 당당하게 걸었고, 끝내 한 나무문에 다다랐다.?

문 너머에서 누군가의 환호성과 동시에 박수 소리, 좌절하는 신음이나 불같이 화를 내는 고성이 동시에 들렸다.?

“흐음. 벌써 한창 놀고 있나 본데.”

“삐릭, 삑!”

“그래. 우리도 재밌게 놀아 보자고.”

호기롭게 웃은 앤이 가면을 썼다. 그녀의 붉은 머리칼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삐에로 가면이었다. 앤이 나무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순식간에 엄청나게 찬란한 빛과 그에 맞먹을 정도의 시끄러운 소음에 둘러싸였다.

“아, 안 돼!”

“으하하하!”

“전 재산을 배팅하겠소!”

“겁나면 그만하지 그래?”

앤이 이토록 은밀하게 찾아와 문을 연 곳, 여기는 다름 아닌 도박장이었다. 그것도 가면을 쓰고, 자신을 철저히 숨겨 가며 즐기는 ‘불법 도박장’ 말이다.

휘익, 가면을 쓴 앤은 휘파람을 불며 주위를 둘러봤다. 넓은 카드 테이블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고,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과 서서 구경하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 테이블이든 웃음과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어딜 껴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무언가를 찾듯 두리번거리던 앤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다른 테이블보다 불도 어둡고 사람도 얼마 없는 구석이었지만 그곳을 본 앤의 붉은 눈이 흥분으로 빛났다.

‘찾았다.’

그 테이블 역시 도박이 한창이었다. 다들 제 앞에 칩을 산더미처럼 쌓아 둔 채 다리를 달달 떨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오픈!”

가면을 쓴 딜러가 외치며 제 앞에 엎어 놨던 카드를 세 개를 열었다. 그 카드는 하트, 하트, 클로버.?

“이야아아! 다 맞혔다!”

“아아, 안 돼!”

희비가 교차했다.?

전부 맞혔다고 외친 이는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칩을 쓸어 모았고, 다른 카드에 건 것으로 보이는 이는 머리를 싸매며 좌절했다.

이 광경을 보며 앤은 때마침 비어 있는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쫙 깔고 말했다.

“그림 맞히기라……. 같이 하지. 재밌어 보이는데.”

“하, 재밌어 보인다고? 이봐, 이건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싸움이야.”

앤의 말에 방금 칩을 몽땅 잃은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죽은 목숨인데 어떻게 말을 하지?”

“뭐?”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모르나?”

요컨대 털렸으면서 말이 많다는 뜻이었다. 이를 알아들은 남자는 기가 차서 뭐라 윽박지르려고 했지만, 그 전에 앤이 테이블 위로 은괴를 꺼내 놓았다. 턱, 무거운 소리를 내며 올라온 은괴는 누가 보아도 진품이 확실해 보였다.

“이걸 걸고 싶은데 장 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날파리가 시끄럽네.”

앤의 말에 은괴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 딜러가 재빨리 테이블 아래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던 험상궂은 남자들이 다가왔다.

“선생님, 잠시 따라오시죠.”

“아, 아니……!”

남자는 순식간에 험상궂게 생긴 이들에 의해 자취를 감춰 버렸다.?

앤은 딜러에게 즉석에서 칩으로 교환해 달라고 했고, 딜러는 그 어느 때보다 친절한 얼굴로 칩을 바꿔 줬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딜러가 카드를 섞으려는 때였다.

“잠깐.”

앤이 딜러의 손을 막고는 그에게 개봉되지 않은 의미로 봉합 실링이 붙은 카드 팩을 건넸다.

“내가 의심이 좀 많아서 말이야. 방금 쫓겨난 남자와 여기 앉아 있는 이 신사의 게임을 지켜봤는데, 조커를 뺀 쉰두 장의 카드 중 세 장의 카드가 전부 정답인 게 좀 수상하더라고.”

“그건 오롯이 운에 의한―”

“알지. 알아. 도박은 운빨이라는 거. 그런데 내가 의심이 많다고. 그러니까 이 카드로 해.”

“하지만 카드를 멋대로 바꾸는 것은―”

“왜 못 바꿔? 저 테이블은 보아하니 고객이 들고 온 쇠구슬도 굴리는 모양인데. 왜. 넌 이 카드에 무슨 짓이라도 했나 보지?”

앤의 말에 딜러는 입을 딱 다물었다. 딜러가 하는 수없이 앤이 건넨 카드를 받으려는 때, 남자가 앤을 흘낏거리며 말했다.

“보아하니 이 바닥에선 처음 만나는 것 같은데, 초장부터 괜히 목숨까지 걸지 말고 장난삼아 한번 해 보는 게 어때? 고작 푼 돈인데.”

달리 말하면 카드 하나 가지고 왜 그리 유난이냔 뜻이었다.?

보통은 술을 마시고 게임에 뛰어드니, 이만한 도발에서 발끈하여 제 말을 철수하겠지만 앤은 아니었다.

“그러는 당신은 아까 보니까 거금을 따던데,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아무리 불법 도박장이라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게임을 더럽혔냐는 뜻이었다.?

결국 남자는 심기가 불편한 신음을 뱉으며 딜러에게 고갯짓을 했다. 패를 섞으란 뜻이었다. 딜러는 남자와 앤이 보는 앞에서 카드가 멀쩡하단 것을 보여 준 후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끼, 끼끼!”

패가 섞이는 소리에 남자의 어깨에 얌전히 앉아 있던 원숭이가 남자와 앤의 사이에 놓인 비스킷 바구니 근처로 내려왔다. 그러자 앤의 어깨에 있던 삐로리도 내려와 비스킷 바구니의 가장자리를 걸어 다녔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거, 친구 관리 좀 하지.”

“얘가 나보다 서열이 높아서 말이야.”

하지만 앤은 이번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에 남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른이 조언을 해 주면 들어야 뒤탈이 없는 법인데…….”

“어른? 피차 똑같은 사람들끼리 웬 어른.”

이곳이 불법 도박장인 걸 잊었느냐며 앤이 노골적으로 비웃자 칩 하나를 만지고 있는 남자의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자가 점잖은 목소리로 가르치듯 말했다.

“그래. 이곳에서는 신분도, 나이도, 지위도 필요 없지. 오로지 행운의 여신이 따르는 자만이 승자일 뿐. 머리가 아둔한 자는 몸이 고생한다지?”

“아~ 못 해 먹겠네. 쫄리면 뒈지시든가. 돈 걸기도 전에 말이 왜 이렇게 많아.”

“뭐, 뭣……!”

하지만 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어쭙잖은 도발을 제대로 된 도발로 받아쳤다. 남자는 결국 목까지 시뻘게져서는, 조금 전까지 딴 칩의 절반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밀어 넣었다.

이윽고 딜러가 카드 세 장을 뽑아 자신의 앞에 놓았다. 그 순간 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저 딜러, 카드를 확인했잖아?’

보통 사람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이었지만, 흔들리는 배에서 싸워 왔던 앤은 그 모습을 정확히 포착했다. 게다가 딜러에겐 특이한 습관이 있었는데, 카드를 놓을 때 엄지로 누르듯 놓는단 것이었다.

때마침 원숭이가 비스킷을 먹으려고 손을 뻗었다. 자연스레 남자의 시선도 원숭이의 손을 따라갔는데, 이때였다.

“삐쪼릭!”

별안간 삐로리가 깜짝 놀란 척하며 비스킷 바구니를 다 뒤엎은 것이다.

“우끼끽!”

화들짝 놀란 원숭이도 얼른 남자의 어깨 위로 타고 올랐다.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구니가 엎어져 산산조각 난 비스킷들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이 소란 통에 주변에서 도박을 하던 이들도 무슨 일이냐며 기웃거렸다.?

“아, 아니. 별일 아니니…….”

남자가 애써 수습하며 비스킷을 잘근잘근 밟으려는 순간 한 도박꾼이 말했다.

“잠깐, 저 비스킷…… 좀 이상한데?”

“그러게? 바닥에 문양이 그려져 있어.”

그가 던진 의문에 근처를 서성이던 도박꾼들이 모여들어 바닥에 떨어진 비스킷을 관찰했다. 그러던 중, 한 남성이 비명처럼 외쳤다.

“하트, 다이아, 클로버, 스페이스…… 잠깐만, 이건 카드 문양이잖아! 저 자식, 사기를 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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