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공작성으로 돌아온 라티아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메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들은 수잔이 깜짝 놀라서 버틀러를 찾아갔다.
“아가씨께 그런 일이……! 가신 가문들의 영애가 아가씨를 무시하다니. 이건 공작가를 무시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버틀러는 길길이 화를 냈다. 메리가 눈치 빠르게 ‘남작가는 멋대로 카르시안 공자님의 약혼을 상정해 둔 것 같았습니다.’라고 덧붙인 탓에 그 화는 더욱 불거졌다.
“공자님을 마음에 품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겠지만, 이를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다니요! 염문을 퍼트려 공자님의 혼삿길을 막으려 한 죄도 작지 않습니다.”
게다가 버틀러는 카르시안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가씨가 공자님의 혼처가 정해졌다고 오해하기 딱 좋군!’
그렇지 않아도 라티아는 어쩐 일인지 카르시안의 앞에만 서면 맹해진다. 하급 하녀들조차 ‘앗, 설마?’ 하는 카르시안의 마음을 하나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공작님께서 돌아오시면 제가 상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아가씨의 곁으로 가 보겠습니다. 너무 걱정이 되어서요.”
“예. 첫 파티라서 무척 들떴고 또 기대하셨는데…… 휴. 아픈 추억으로 남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버틀러와 수잔은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축 처져 보이는 라티아의 얼굴을 상기하고는 가슴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같은 시각, 메리가 수잔에게 이야기를 전할 때 곁에 있어 사정을 다 알게 된 앤이 펄펄 날뛰고 있었다.
“그 녀석들이 다 누구건 무슨 상관이야! 당장 내가 헥터 장군님께 말씀드려서……!”
“쉬잇, 진정해! 앤!”
칼을 빼 들고 난리를 치는 앤을 말리느라 잘 빗어 둔 메리의 머리칼마저 흐트러질 지경이었다. 결국 앤은 수잔이 돌아오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아가씨의 방 앞에서 칼부림이라니!”
따끔하게 혼난 앤은 억울함에 입술을 비쭉이면서도 칼을 잘 숨겼다.
“하지만 하녀장님은 화도 안 나세요? 어쩐지, 아가씨가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나 했어요. 그 망할 것들이……!”
“쉬잇. 제발 목소리 좀 낮춰. 아무리 그래도 그 영애들은 귀족이야.”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쥐고 분노를 참는 건 메리도 마찬가지였으나, 앤을 달래느라 표출할 틈도 없었다. 수잔이 그런 두 사람을 보다 말했다.
“왜 화가 안 나겠니. 하지만 아가씨가 가만히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멋대로 움직이겠어. 그거야말로 아가씨를 무시하는 행동이야.”
“그건…….”
“일단 기다리자꾸나. 아가씨께선 결코 당하고만 있는 분이 아니셔. 분명 이 수모를 갚을 방법을 찾으실 거야.”
수잔이 능숙하게 달래 주자, 앤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메리가 걱정스레 라티아가 틀어박힌 방을 바라봤다.
‘공작님이 계셨더라면 좀 나았을까?’
안타깝게도 클로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메리는 라티아의 기분을 풀어 줄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이러한 소란이 일고 있건만, 라티아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방음 마법이 걸린 캐노피 안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을 정도로 집중하고 있기도 했다.
‘아무래도 로레나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려.’
라티아는 조금 전, 로레나가 쓰러질 당시의 일을 상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한 모금 마시자마자 바로 몸에 이변이 생길 수 있지? 알레르기였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거야. 독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같은 차를 마신 모두가 문제가 생겨야 해. 하지만 나와 다른 영애들은 멀쩡했어. 로레나가 실려 나가는 그때까지도.’
게다가 로레나는 정확히 ‘꽃’이라고 언급했다. 비록 꽃을 우렸다고는 하나 마시고 문제가 생긴 건 ‘차’이니, ‘차에 무슨 짓을!’이라고 말하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 꽃은 불과 어제만 하더라도 수잔이 내게 직접 우려 준 차의 것과 같은 거야.’
공작성 일원들이 차로 즐겨 우려 마시는 꽃잎을 소량씩 소분하여 선물했다. 이보다 안전하고 완벽한 상태를 자랑하는 건 없으니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렇다 보니 아무래도 로레나가 무슨 짓을 꾸몄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 ‘무슨 일’을 꾸민 건지 모르겠다는 거다.
이쯤 되니 그냥 공작성을 나간 것 자체가 문제처럼 느껴졌다.
“에휴, 친구는 무슨…….”
카르시안의 빈자리를 다른 이로 채우려고 해서 벌을 받나 보다.
“그냥 원작 대비나 더 잘할걸…….”
그루안 상단에 부탁한 바람개비꽃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그걸 약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도 찾지 못했다. 해야 할 일을 뒷전으로 미룬 탓에 이런 일을 겪는 것만 같아 더욱 울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기도 좀 그런데…….”
라티아가 속으로 끙 앓은 때였다. 똑똑 또독, ……똑똑! 누군가가 이상한 박자로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라티아는 누군지 묻지 않았다. 경쾌한 박자로 시작하여 눈치 보듯 정중한 박자로 바뀐 소리만 들어도 상대가 누군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으음, 아가씨. 기분은 좀 괜찮으세요?”
라티아의 방에 들어올 때마다 노랫가락처럼 문을 두드리곤 했던 앤이었다. 옆에서 메리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 걸로 보아, 습관적으로 노크하다 혼난 모양이었다.
“음…….”
라티아는 섣불리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 제가 괜찮은 척을 해 봐야 저를 진짜로 걱정하는 이들의 근심만 늘리는 꼴이니까.
라티아가 대답하지 않자, 잠시 눈치를 보던 앤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가씨, 제가 재밌는 거 보여 드릴까요?”
“응?”
라티아가 관심을 조금 갖는 듯 보이자, 앤이 빙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손때가 탄 작은 공을 하나 꺼냈다.
“자, 여기 봐요. 공이 하나 있죠?”
“응.”
“그런데, 짠! 두 개로 늘어났네요?”
눈 깜빡할 새였다. 앤이 손가락 사이에 낀 공을 손바닥에 감추고 주먹을 쥐었다 펴자마자, 손가락 사이에 있던 공이 두 개로 늘어났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하면…… 세상에, 네 개네?”
이번엔 반대 손을 주먹 쥐었다 펴니, 똑같은 공이 네 개로 늘어나 있었다. 라티아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을 쓸 줄 알았어?!”
지난 3년간 이런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해서, 라티아가 놀라자 앤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는 그 공 네 개로 저글링을 하며 말했다.
“아뇨. 이건 마술이에요.”
“마술……?”
“네. 착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에게만 보여 줄 수 있는 거랍니다.”
저글링을 하는 공이 네 개에서 여섯 개로, 여덟 개로 늘어나더니, 다시 하나로 줄어 버렸다. 라티아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와, 정말 대단해!”
조금 전까지 우중충해 보이던 라티아의 얼굴색이 확 밝아졌다. 그것을 보고 안심한 앤이 빙긋 웃으며 라티아에게 공을 하나 건넸다.
“선물이에요. 그거 아세요, 아가씨? 마술은 결국 평범한 사람이 하는 거라서, 다 방법이 있어요. ‘트릭’이라고 하죠.”
“트릭……?”
“네. 결국엔 속임수라는 거예요. 이 속임수를 알게 되면 동심에서 깨어나게 되지만, 그만큼 상황을 냉철하게 보는 시각을 갖게 돼요. 전 메리의 조언으로 마술을 연습하면서 훈련했고, 덕분에 헥터 선장님……이 아니라 장군님께 인정받는 검사가 되었죠.”
앤이 씩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은 라티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라티아는 작고 포실포실한 공을 쥔 채 앤을 내려다봤다. 앤이 쪼그려 앉은 무릎에 팔을 걸치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가씨라면 이 마술의 트릭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저보다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다시 천천히.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봐요.”
앤의 따듯한 말에 라티아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다시 생각해 볼게.”
앤은 라티아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요령이 없었다. 그래서 메리에게 귀띔을 듣고 얼른 마술을 보여 준 것이다.
라티아는 가슴 속이 따듯하고 포근하게 차오르는 걸 느꼈다. 로레나 때문에 화가 나서 차갑게 식었던 뱃속도 말이다. 라티아의 자색 눈동자가 다시 총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앤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실실 웃어 버렸다.
‘드디어 우리 아가씨로 돌아왔네.’
라티아가 완전히 기운을 차렸다.
* * *
난 곧장 삐로리를 찾았다.?
요즘 삐로리는 때때로 멀리 다녀오기도 하기에, 나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다. 잠은 내 곁에서 자는 모양이지만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삐로리! 여기야!”
내가 부르자 정원수가 있는 쪽에서부터 삐로리가 날아왔다.
“삐릭?”
자신을 찾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난 삐로리에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 좀 도와줘.”
“삐릭!”
내가 모두의 표정을 읽듯, 삐로리도 내 마음을 읽는 것 같다.?
동물은 주인의 기분을 영리하게 파악한다더니, 삐로리도 그런 걸까??
삐로리가 결연하게 날개를 퍼덕거렸다. 마치 ‘내가 뭘 하면 돼?’ 하듯이 말이다.
난 그런 삐로리를 손등에 올린 채, 메리와 함께 나를 보고 있는 앤을 보며 말했다.
“앤, 삐로리. 둘이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