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비록 공녀는 아니지만 라티아는 명백히 라움디셀 공작가의 아가씨다. 공녀 대우를 해 줘야 함이 마땅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이 파티를 주최한 로레나라 하더라도 라티아에게 상급자 대우를 해 줘야 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지난 시간 동안 저들은 어떻게 했는가?
‘토드엘 남작 영애만 추켜세우기 바빴지.’
‘자칫하다간 우리가 공작가를 무시하고 남작가를 주인으로서 대우한 꼴이 돼!’
‘안 돼, 우리 가문은 이제 겨우 가신으로 인정받았는데!’
영애들은 충격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더 이상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속에서 라티아는 평온한 얼굴로 빙긋 웃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알아서 떠들어 주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테이블에서 작은 소란이 일자 수족 하녀들이 빠르게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그 중엔 당연히 라티아의 수족 하녀라 무시를 당하던 메리도 있었다.
‘아가씨가 참고 계시니 나도 참고 있었는데…….’
라티아가 아주 대차게 반박을 하고 이겨 버렸으니, 메리도 더 이상 무표정하게 참을 필요가 없어졌다. 때마침 라티아가 힐끗, 메리를 돌아봤다. 메리는 그런 라티아에게 빙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주 잘하셨어요. 속이 다 후련하네요.’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드니 라티아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메리는 그런 라티아가 귀엽고 앙큼해서 풋 웃음이 나와 버렸다.
하지만 로레나의 상황은 전혀 좋지 않았다.
‘이게, 이게…….’
너무 놀라고 충격적인 나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공격이었다.?
‘감히 나를, 나를……!’
로레나의 머릿속에선 분통의 붉은 빛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로레나는 토드엘 남작가의 사랑받는 딸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랑받지 않은 척이 없기에 모두가 그녀를 칭송하고 따르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라티아가 그녀를 공격했다.
‘사생아인 주제에!’
라티아의 태생은 유명했다. 그녀가 직접 재판대에서 언급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글라델리스 후작가 출신 주제에!’
운 좋게 라움디셀 공작성의 아가씨가 된 것이지, 원래대로라면 라티아 또한 죽어 마땅한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나에 비하면 하등 하잘것없는 어린아이가 그저 운이 좋아서 공작성에서 떵떵거리며 살게 된 주제에, 남작가의 금지옥엽 공주님인 나를. 나를 감히 공격해?’
탁한 보랏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를 가진 로레나의 눈매가 사정없이 매서워졌다. 무려 ‘오몽 살롱’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수치스러움이 어마어마했다.
‘그간 내가 입는 모든 드레스는 오몽 살롱의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때문에 이 자리에 모인 영애들은 모두들 로레나가 오몽 살롱의 드레스만 입는다고 알고 있다.
‘아버지께 진짜 오몽 살롱의 드레스가 갖고 싶다고 졸랐지만, 예약조차 되지 않아서 안 된다고 혼나기만 했어.’
그런데 그런 오몽 살롱의 드레스를 라티아가 입었다. 게다가 그걸 로레나가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그동안 해 왔던 거짓말이 몽땅 들통나 버렸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창피하고 부끄러웠고 무엇보다 질투가 났다.
‘내가 뭐가 부족한데? 왜 나는 예약조차 못 하는 드레스를, 저 계집은 입은 건데?’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질투가 나서, 얄미워서, 괘씸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로레나는 뱃속이 다 우그러지는 것 같았다. 로레나가 다짐했다.
‘이대로 당하지만은 않겠어.’?
이 치욕을 그대로, 아니. 두 배로, 세 배로 되돌려 갚아 주겠다고!
어차피 공작에게 이르겠다는 라티아를 말려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마도구의 정체를 밝혀낸 것만 봐도 뻔했다.
‘저 악랄한 꼬맹이는 처음부터 나를 물 먹이기 위해서 온 거야. 왜? 무서웠나 보지? 내가 카르시안 공자님과 맺어지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까 봐?’
결혼은 성인이 된 후에나 할 수 있지만 약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지금 로레나가 카르시안과 약혼을 하게 되면 그녀는 공자의 약혼녀로, 단순히 피후견인인 라티아보다 높은 사람이 된다.
‘우습지도 않은 경계를 하고 말이야. 꼬마야, 진짜 머리싸움이라는 걸 알려 줄게.’
라티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뜬 로레나는 속으로 조소를 삼켰다. 하지만 그녀가 아직도 모르는 정보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라티아가 대 수호천사조차 탐낼 만한 재능의 보유자라는 것.
‘적당히 물러서면 남은 체면은 부지할 텐데, 이런 사람들은 꼭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결국 파멸하더라.’
물론 라티아 입장에선 나쁠 것 없었다. 가신들의 기강을 잡을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라티아가 샐쭉 웃으며 말했다.
“참, 토드엘 남작 영애. 이건 제 선물이에요.”
라티아가 건넨 건 공작성의 정원에서 기른 꽃잎을 말린 차였다.
“냉침으로 마시기 좋아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어머나, 기뻐요. 공작성에서 직접 기른 꽃이라니…… 벌써 그 향을 맡아 볼 수 있게 되어 너무 영광이에요.”
로레나가 밝게 대답했다. ‘어차피 공자의 약혼녀가 되면 매일 맡을 텐데.’라는 속뜻이 숨겨진 말이었다. 라티아는 로레나가 이런 식으로 카르시안과 맺어지는 걸 당연시 여길 때마다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어째서 화가 나는지 몰라 끙끙 앓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곧바로 마셔 보도록 해요. 다들 괜찮죠?”
“네? 아, 네…….”
“그, 그럼요…….”
조금 전만 하더라도 로레나의 말이라면 죽는시늉까지 할 것 같던 영애들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녀들의 신경은 온통 라티아에게 쏠려 있었다. 그에 로레나의 눈가가 신경질적으로 파르르 떨렸지만 라티아를 제외한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로레나의 명령을 받은 하녀들이 금방 냉침을 해 왔다.
“아버지가 수도에서 직접 사 온 이 냉침 키트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곧바로 마실 수 있답니다.”
“와아…… 기다리지 않고도요?”
“네에. 비록 냉침이라 향은 조금 옅어지지만요.”
로레나가 한껏 자랑을 늘어놓으며 라티아를 힐끔거렸다. ‘너희 집엔 이런 거 없지?’ 하는 표정이었다. 라티아는 어이가 없었다.
‘남작가에도 있는 게 공작성에 없겠니?’
하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로레나가 바라는 대로 부러운 척을 하며 말했다.
“와, 멋있네요. 전 멋과 향을 중시하는 공작님의 명령 때문에 수많은 하녀들이 매일 직접 꽃을 따서 말리고, 정성껏 우린 냉침만 마셔서 이렇게 간단하게 색만 짙게 우린 냉침은 처음 마셔 봐요.”
냉침을 한다고 해서 향이 옅어지는 건 아니다. 라티아가 그 점을 정확히 짚으며 공작성의 부유함을 자랑하자 웃고 있는 로레나의 입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결국 로레나는 본전도 찾지 못했다.
“그, 그럼…… 마셔 보죠. 향이 있고 없고는 마셔 봐야 아니까요.”
물론 향의 경우 마시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애들은 아직 남작가를 완전히 손절할 수 없기에 로레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다들 한 모금씩 마셨다. 라티아도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미미하게 꽃 향이 나기는 하나 맹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꽃이 좋아서 나는 향이지, 전혀 우려지지 않았네.’
입맛만 버렸다고 생각하며 잔을 내려 둔 때였다.
“……윽!”
실제 사교계에선 쓰이지 않는 예법인 새끼손가락까지 치켜들고 차를 마시던 로레나가 손수건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쨍그랑! 로레나가 집어 던지다시피 놓친 잔이 산산조각 나며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그 파편 때문에 라티아의 발목에 붉은 실금이 갔다.
“아얏.”
라티아가 깜짝 놀라 눈가를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본 로레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헉…… 꽃에, 대체 무슨 짓을……!”
그녀는 라티아를 손가락으로 정확히 짚으며 경악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이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꺅, 영애!”
“남작 영애!”
다른 영애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큰 소란이 나며 테이블이 어질러졌다. 수족 하녀들이 다급히 달려왔고, 이 난리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남작 부인도 나타났다.
“대체 이 무슨 소란들인가요?”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난 남작 부인은 하녀의 품에 추욱 늘어진 제 딸을 보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악! 로레나! 로레나!”
남작 부인은 곧장 제 딸에게 달려가 정신을 잃은 로레나를 흔들어 깨웠다.
“정신 차리렴, 로레나!”
하지만 로레나의 눈꺼풀만 좀 떨릴 뿐, 눈이 뜨일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경악에 찬 남작 부인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영애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어찌 된 일이기에, 로레나가 쓰러졌냐는 말이에요!”
“아, 그, 그게…….”
“라움디셀 아가씨께서 선물로 주신 차를 함께 마셨어요. 그러자 남작 영애가…….”
“쓰러지기 전에 라움디셀 아가씨를 지목하면서 ‘꽃에 대체 무슨 짓을’이라고…….”
더듬더듬 말하는 영애들의 말에 남작 부인의 표독스러운 시선이 곧장 라티아에게 향했다. 라티아는 메리에게 발목의 상처를 맡긴 채 로레나를 보고 있었다.?
남작 부인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최소한의 의견조차 듣지 않겠단 말이었다. 라티아는 남작 부인의 단호한 표정을 읽고는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변명해 봐야 들을 생각조차 없으시네.’
억울했지만 상황만 더욱 악화시킬 변명이라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현명했다. 라티아는 따끔거리는 발목을 느끼며 남작 부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
“그러세요.”
남작 부인은 라티아가 자리를 뜰 때까지 쏘아보기만 했다.
마차에 오른 라티아가 차창 밖을 살펴보자, 하녀가 로레나를 안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라티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