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아아, 그것도 그러네요.”
“음, 저희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군요.”
“아, 역시 토드엘 남작 영애세요.”
“어떻게 이렇게 똑똑하고 사려 깊으실 수 있죠?”
“영애는 정말 대단하세요!”
로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영애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칭찬했다. 로레나는 이런 칭찬이 아주 익숙한 듯 보였다. 심지어 그들은 내 소개를 제대로 받지도 않고, 자리를 내어 주려고 하지도 않고 쉴 새 없이 떠들기만 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저들만의 세계에 빠진 이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뒤에서 메리가 속삭였다.
“아가씨, 어떻게 할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상당히 낮고 거칠어져 있었다. 숨이 씨근덕거리는 걸로 보아 무척 화가 난 눈치였다. 내가 말만 하면 당장이라도 들이받을 듯 보였다.
난 로레나를 가만히 보다가 복화술을 하듯 조용히 말했다.
“일단은 두고 보는 게 좋겠어.”
“네? 어째서죠? 저들은 아가씨를 무시했어요.”
“그래서야.”
늘 내 말에 잘 따라 주던 메리가 상당히 욱했는지 반박했다. 난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날 명백히 무시한 영애들을 토드엘 남작 영애가 혼내 줬잖아.”
“하지만 그 내용이 이상하잖요. 돌려 까는 것처럼 말이에요.”
“나도 그렇게 느꼈어. 그렇지만 토드엘 남작 영애의 언행에서 문제로 삼을 만한 건덕지가 있지도 않아.”
“그렇지만…….”
“내가 문제를 삼아도 다른 영애들은 내 손을 들어 주지 않을 거야.”
끙, 메리가 한숨을 삼켰다.
“게다가 이 일로 인해 공작성에 피해가 갈 수도 있어.”
내가 걱정하는 건 이거였다. 물론 공작성 사람들은 내가 이런 푸대접을 받느니 이 자리를 싹 다 엎어 버리길 바라겠지만, 난 일단 공작성의 아가씨. 고작 이만한 일에 화를 내는 이로 얕잡혀 보여서 좋을 건 없었다. 그 상대가 대리 영주였다면 더더욱.
“아가씨? 아직도 거기에 계시군요?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한껏 칭찬을 들어 고양된 표정을 짓는 로레나가 빙긋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말로만 해도 될 텐데 어린 손아래 동생을 부르듯이 말이다.
난 로레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역시 어려서 그런가? 손이 너무 많이 가네.’ 날 비웃는 생각이 고스란히 읽혔다. 로레나는 13살로, 나보다 3살이 많았다. 기실 이 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로레나의 또래였다.
“네. 알겠어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친구를 만들고 싶어서 왔건만, 이 길은 험하고 또 험할 듯싶었다.
* * *
라티아가 로레나의 곁으로 다가가자, 영애들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공작성의 아가씨는 무척 똑 부러진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토드엘 남작 영애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하네?’
‘역시 대리 영주였던 토드엘 남작 가문의 영애!’
‘토드엘 남작 영애는 정말 대단하구나!’
로레나를 칭송하는 감탄 말이다.
이 자리에 모인 영애들은 귀족이긴 하나 모두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몇 명은 기사 가문이어서 구색만 간신히 갖춘 귀족이라 할 수 있었고 또 몇 명은 자작이나 남작가긴 하지만 대리 영주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토드엘에 비하면 한미했다.
‘어머니가 그러셨어. 토드엘 남작 영애와 친해지라고.’
‘우리 가문은 토드엘 남작 가문을 꽉 붙들고 있어야 해!’
모름지기 호랑이가 없는 산에선 여우가 대장 노릇을 하는 법. 토드엘 남작 가문이 그러했다. 그들은 라움디셀 영지가 비어 있던 지난 시간 동안 ‘대리 영주’직을 맡으며 권력을 행사하며 부를 쓸어모았다.?
라움디셀 공작이라는 진정한 주인이 생긴 지 3년이나 지났건만, 영지에 있는 귀족이나, 그 근처의 다른 소귀족들은 아직도 토드엘 남작가를 따를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토드엘 남작 부인의 말이 맞아. 새로 온 공작가와 맺어질 자격이 있는 이들은 토드엘 남작가뿐이야.’
‘카르시안 공자님과 어울리는 사람은 로레나 영애밖에 없어.’
‘공작가와 혼맥을 맺으면 토드엘 남작가는 더욱 승승장구할 거야.’
그러니 영애들은 가문을 위해 더욱 열심히 토드엘 남작가와 친해져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물론 라티아는 이러한 영애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전부 읽고 있었다.?
‘하, 웃긴다.’
문제점을 파악한 라티아는 속으로 날카로운 비웃음을 터뜨렸다.
‘주제를 모르는 거였구나.’
이제야 그녀들이 보인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크게 없었다. 저들이 저런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이상 문제 되는 건 없으니 말이다.
라티아는 분노로 뱃속이 싸늘하게 식는 감각을 느꼈다. 다른 게 화가 나는 게 아니었다. 라움디셀이라는 명백한 주인을 두고도 다른 가문을 섬긴다는 게 화가 났다.
‘하극상이라…….’
라티아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맹렬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족 하녀들을 뒤로 물린 이들이 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라티아는 로레나의 바로 옆이었다.
“다망할 텐데도 이렇게 자리에 모여 줘서 고마워요.”
“토드엘 영애의 초대인데 당연히 와야죠.”
“토드엘 영애의 초대라면 만사를 제쳐 두고 오겠어요.”
영애들은 모두 여우의 비위를 맞추는 소동물처럼 알랑방귀를 뀌기 바빴다. 그 속에서 라티아 혼자만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로레나는 기분이 상했다.
‘뭐야? 내가 옆에 앉게 해 줬는데 말 한 마디를 안 하네?’?
로레나의 옆자리는 특권이었다. 매번 그녀에게 가장 크고 비싼 선물을 주는 영애가 앉아 버릇하는 곳이었다. 그런 위대한 자리를 내어 줬는데도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안 하다니!
‘똑똑하다더니, 역시 어려서 그런지 이런 쪽으로는 영 눈치가 없네.’
로레나는 라티아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러다 공격할 틈을 발견한 족제비처럼 눈을 빛냈다.
“어머나, 그러고 보니 라움디셀 아가씨의 드레스는 참 독특하네요?”
로레나가 운을 떼며 영애들에게 눈짓을 하자, 다른 이들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토드엘 남작 영애의 말대로 저런 드레스 형태는 처음 봐요. 어느 살롱의 구작을 리폼했나 봐요?”
“누가 아니래요, 라시사 영애. 색이 좀…… 안 어울리는 거 아닌가요? 머리색도 미묘해서 옷 고르기 힘들겠어요.”
라티아가 마치 아주 촌스러운 꼴을 하고 있다는 양 까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기회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라티아는 슬픈 눈망울을 한 채 영애들을 둘러봤다. 로레나를 비롯한 다른 영애들이 다들 한 소리씩 얹으며 라티아의 차림새에 대한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헤어 살롱 마담이 나이가 많나 봐요. 나잇대와 어울리지 않아요.”
“보석도 너무 과하고요. 저였다면 좀 덜어 냈을 거예요.”
“토드엘 남작 영애의 곁에 있어서 그런지 더욱 비교가 되네요.”
“아무렴요. 토드엘 남작 영애의 드레스는 무려 오몽 살롱의 신작이잖아요?”
그녀들의 품평이 길어질수록 라티아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라티아는 수치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단 눈치로 우물쭈물하다 유리드가 세공해 준 소매의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곤란하네요…… 왜냐면 이 드레스는 오몽 살롱의 것이고, 헤어 살롱은 라움디셀 공작님께서 심사숙고 끝에 직접 불러 주신 것이며, 이 보석은 예리엘 만물 상단주인 시엘 선생님이 공수해서 후장식 총기를 개발한 유리드 아저씨가 직접 세공해 준 거거든요.”
라티아의 말에 한참 떠들어 대던 영애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한 영애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네? 오몽, 살롱의 것이라고요?”
“네. 그런데 토드엘 남작 영애의 드레스도 오몽 살롱의 것이라고요? 이상하네요. 지난 3년간 신작 드레스는 제가 몽땅 구매했…… 아! 구작 리폼 드레스군요?”
라티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사한 얼굴로 말했다.
영애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오몽 살롱 드레스를 폄하한 것으로도 모자라 공작의 안목을 무시하고, 예리엘 상단주의 미적 감각을 비웃은 셈이 되어 버렸다. 영애들은 로레나를 힐끔거렸는데, 그녀의 표정도 하얗게 질린 채였다.
게다가.
“휴우, 좋은 조언들 감사합니다. 이 일은 제가 공작님께 낱낱이, 소상히 말씀드려 개선하도록 하겠어요.”
라티아가 이 경을 칠 일들을 고스란히 공작에게 일러바친다고 한다. 영애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아, 아뇨. 아가씨.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아, 아가씨.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제가 했던 말들은……!”
그녀들은 얼른 변명을 하며 ‘네가 오해해서 들었다.’ 또는 ‘이런 식으로 곡해하다니 서운하다’고 말했건만, 라티아에겐 먹히지 않았다.
“네? 정말요? 하지만 방금 대화는…… 아, 그럼 우리 다시 들어 볼까요?”
사랑스럽게 사르르 웃는 얼굴로 소매를 장식한 보석 단추를 꾹 누른 것이다. 그러자 녹음된 영애들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 어머나, 그러고 보니 라움디셀 아가씨의 드레스는 참 독특하네요?
― 그러게요? 토드엘 남작 영애의 말대로 저런 드레스 형태는 처음 봐요. 어느 살롱의 구작을 리폼했나 봐요?
― 누가 아니래요, 라시사 영애. 색이 좀…… 안 어울리는 거 아닌가요? 머리 색도 미묘해서 옷 고르기 힘들겠어요.
친히 이름까지 불러 주며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알려 주는 목소리들이 말이다!?
영애들은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렸는데, 그 사이로 라티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미처 말씀을 못 드렸네요. 이 보석은 사실 마석이거든요. 이걸 대상단주 셀트론 님과 유리드 아저씨가 의논 끝에 ‘녹음’을 할 수 있는 마도구로 가공해 줬어요. 제 첫 파티의 즐거운 추억을 간직하라는 뜻으로요!”
요컨대 지금껏 영애들이 했던 모든 만행이 이 보석 단추에 몽땅 기록되었단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