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클로드가 이속 마법이 걸린 마차를 양보해 줬다.
“공작님…… 듣기로는 오늘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새벽같이 공작성을 나갔다던데.”
“네, 맞아요. 그렇지만 이 마차는 아가씨가 타고 가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메리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라서 일반 마차여도 괜찮은데.”
짧은 거리조차 편안하게 가라는 클로드의 배려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마차는 남작 저택의 정문을 넘어 잠시간 정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난 창밖을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남작가라고 들었는데 글라델리스 후작저보다 넓네…….”
“글라델리스 후작가는 겉으로 신사적인 척을 하느라 저택을 증축하지 못했지만, 토드엘 남작가는 아니거든요.”
“아, 맞아. 3년 전, 우리 라움디셀 공작가가 자리를 잡기 전엔 이 토드엘 남작가가 영주 대리를 맡고 있었다고 했지.”
“네, 맞아요. 지금은 가신으로 충성을 바치고 있고요.”
난 메리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렇게 저택이 크구나. 영주 대리였어서…….
라움디셀 공작령은 황실이 관리해서 서류상의 ‘영주’는 아니겠지만, 어느 곳이든 토박이는 있는 법이다. 황실에서도 때때로 토드엘 남작가에게 영지의 대소사를 일임하기도 했다니, 정말 영주 대리의 역할을 한 셈이긴 했다.
마차가 멈춰 서자 메리가 곧장 내릴 준비를 하며 말했다.
“도착했나 봐요.”
“아, 응. 저기가 파티장의 입구인가 봐.”
난 마차장 너머로 보이는 아치형 울타리를 힐끗거렸다. 늦봄 장미 넝쿨이 감싼 흰 아치가 아름다웠다. 꽃송이들은 작약처럼 풍성하게 흐드러져, 보기만 해도 장미향에 취할 것만 같았다.
마차에서 내리자 메리가 약속대로 옷매무새를 다시 다듬어 줬다. 앉아 있는 동안 구겨진 드레스 자락이 다시 완벽하게 정돈되었다.
“자, 다시 빈틈없이 아름다우세요.”
“고마워.”
난 구두까지 꼼꼼히 살펴 준 메리에게 빙긋 웃어 줬다.
마지막으로 메리가 내게 선물이 담긴 가방을 건넸다. 메리가 들고 가도 되지만, 내가 직접 전해 주고 싶다고 일러뒀다.
내가 준비를 마친 듯 보이자 파티장 입구를 지키고 있던 시종이 메리에게 정중히 이름을 물었다.
“이분은 라티아 라움디셀 아가씨이십니다.”
“아……! 이런, 제가 몰라뵙습니다. 죄송합니다.”
멋들어진 콧수염을 가진 시종이 공손하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종은 놀라울 정도로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마치 기사처럼 말이다.
정작 진짜 기사단이 있는 공작성도 이러진 않는데.
난 완벽한 예법을 자랑하는 시종을 신기하다는 듯 힐끔거렸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시종이 긍장하게 말했다.
“라티아 라움디셀 아가씨 입장하십니다.”
그 소리에 시끌시끌하던 파티장 안쪽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상에! 라움디셀 아가씨께서 오셨어!”
“토드엘 남작 영애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꺄아, 그러면 혹시 에스코트로 라움디셀 공자님도……!”
언제 조용해졌냐는 듯 다시 왁자지껄 시끄러워지며 파티 테이블에 우아하게 둘러앉아 있던 어린 영애들이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그녀들은 어떻게든 선두에 서고 싶다는 듯 드레스 자락까지 움켜쥐며 우당탕 달려왔다. 난 그녀들의 기세에 눌려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렸는데, 다행히 메리가 뒤에 서 있어서 도망치는 꼴사나운 꼴을 보이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라움디셀 아가씨!”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저는 이슬라 자작 가문의 아리도트라고 해요!”
7명, 아니 8명쯤 되는 영애들이 한꺼번에 인사를 건넸다. 난 조금 기분이 고양되었다.
이렇게 열렬한 환대라니!?
마차를 타기 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던 걱정들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 다행이야. 내가 라티아 ‘글라델리스’가 아니어도 이토록 환영받아서!
난 기쁜 마음으로 내 소개를 하려 했다.
그런데.
“어머……?”
“왜…….”
“으음…….”
불을 지핀 듯 뜨거워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밍숭맹숭해졌다. 이제 막 소개를 하려는 내가 다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영애들은 내 주위만 살펴보고 있었다. 무척 당황스러웠는데, 이 모습을 보고 있는 메리 또한 당황스러워 얼어 버렸다. 좋게 말해서 분위기가 밍숭맹숭해졌다는 거지, 이건 나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한 영애가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런데…… 혼자 오셨나요?”
“네? 혼자 오다니요?”
내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이번엔 내 뒤를 힐끔거리던 다른 영애가 말했다.
“다른 분은 함께 오지 않으셨어요?”
“예를 들면 라움디셀 공자님이라던가…….”
“왜 안 보이시지?”
영애들의 말에 메리가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아,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저들이 그토록 환대한 이는 내가 아니었다. 기다리고, 달려와서 반겨 줬던 이는 내가 아니라 카르시안이었다. 저들은 내가 카르시안과 함께 온 줄 알고 나를 환영했던 것이었다!
비참함 다음에 따르는 감정은 허탈함이었다.
“하.”
나도 모르게 짧게 끊어 웃었다. 그만큼 허탈했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나의 냉랭한 조소에도 영애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계속해서 카르시안의 행방을 물었다.
“혹시 따로 오시기로 한 건가요?”
“아니면 잠시 자리를 비우신 걸까요?”
“오늘 오시긴 한 건가요?”
심지어는.
“아이참, 달려오느라 구두에 잔디가 묻었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빨리 와서 라움디셀 공자님의 에스코트를 받고 싶어 달리는 바람에 드레스가 구겨졌지 뭐예요.”
분명히 손님인 나를 앞에 두고 저들의 옷차림이나 살피기 바빴다. 나는 여전히 내 소개조차 하지 못했다.
속된 말로 이런 걸 개무시라고 하는구나.
뻔히 들여다보이는 속마음 속에 ‘라티아 라움디셀’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 덕에 개무시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뼈가 시리도록 깨달았다. 난 꽉 쥔 주먹을 가까스로 폈다. 돌아갈 생각이다.
비록 며칠 동안 드레스를 수선하느라 고생한 수잔과 앤, 메리에게도. 내가 첫 티 파티에 나간다고 직접 보석을 공수해 주고 그것을 아름답게 세공해준 시엘과 셀트론, 유리드에게도. 내가 편히 가라고 이속 마법이 걸린 마차를 양보해 준 클로드에게도. 모두에게도 미안하고, 면목이 없지만, 난 돌아갈 생각이다.
난 알고 있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은 내가 호의를 뒤로한 채 다시 공작성으로 돌아오는 것보다 이 수모를 참고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더 슬퍼할 거라는 걸, 더 속상해할 거란 걸 말이다.
“메리. 아무래도 이 파티에서 진정으로 환영받는 이는 내가 아닌 모양이니…….”
그만 돌아가 보겠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세상에! 이 무슨 무례들이신가요!”
파티장 저 안쪽에서 새되다 못해 날카롭기까지 한 외침이 들린 것이다. 그에 나를 앞에 세워 두고 저들끼리 이야기하기 바빴던 영애들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하지만 쭈뼛거리는 이들은 나보다 키가 커서, 나는 이 인파의 뒤에서 크게 일갈한 이가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믿을 수 없어요. 이토록 교양 없는 짓을 하시다니요! 어떻게 라움디셀 아가씨를 무시하실 수 있는 거죠?”
“아, 저…….”
“저희는 그저…….”
한 소리를 제대로 들은 영애들은 입술에 밀랍이라도 바른 듯 입을 딱 다물고 우물쭈물하기 바빴다. 내게 사과를 하지도 않고서 말이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그녀들이 내게 사과를 하도록 시간을 준 모양인데, 결국 아무도 사과하지 않자 맨 뒤에 있던 영애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자리를 내어 주시겠어요?”
그 소리에 우르르, 내 앞을 장벽처럼 가로막았던 영애들이 좌우로 나눠 섰다. 마치 바다가 갈리는 것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작게 입을 벌렸다. 그 갈라진 바다 너머엔 한 영애가 서 있었다.
조금 색이 탁한 연노란빛 머리카락은 잘 익은 보리처럼 보였고, 화가 난 듯 부리부리한 검은 눈동자엔 옅게 보랏빛 안광이 돌았다.
“토드엘 남작 영애…….”
“저희는 그저…….”
“됐어요. 변명은 듣지 않겠어요. 제가 직접 보고 들은 상황이니까요.”
아! 저 영애가 바로 나를 초대한 토드엘 남작 영애, 로레나인 모양이었다. 로레나는 어떻게든 말을 붙이려는 영애들에게 차갑게 대꾸하고는 곧장 날 향해 다가왔다. 날 선 눈빛이 순식간에 누그러들었다. 로레나가 아주 잘 교육받은 듯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늘리며 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어요. 저는 로레나 토드엘이라고 해요. 이 파티의 주최자로서 대신 사과를 하겠어요. 부디 무례를 용서하세요, 라움디셀 아가씨.”
난 로레나의 인사를 듣고 무심코 따라 인사를 하려다가 멈칫거렸다. 묘하게 그녀의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소개야 그렇다 치지만 사과를 ‘하겠어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뭔가 석연치 않았다. 해서, 인사가 조금 늦어졌는데 가만히 허리를 숙이고 있던 로레나는 내가 인사를 받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내가 인사를 하든 말든, 소개를 하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휙 몸을 돌려 영애들을 둘러봤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아가씨를 이렇게 세워 두시면 어떡하나요? 어서 자리를 만드세요. 그리고 아가씨가 파트너 한 명 없이 혼자 오신 게 뭐가 어때서요? 전 라움디셀 공작가에 초대장을 보냈지만 아가씨께 답신을 받았어요. 공자님께서 오지 않으신 건 당연해요. 아가씨와 이러한 대화를 나누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