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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86화 (86/186)

86화

카르시안과 접점이 생겼다며 환하게 웃은 소녀의 이름은 로레나 토드엘로, 토드엘 남작 가문의 하나뿐인 귀한 딸이었다.

로레나가 들뜬 표정으로 남작 부인에게 말했다,?

“아아, 꿈만 같아요! 제가 공작 부인이 될 수 있다니요!”

로레나의 머릿속은 화려하게 장식한 공작성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자신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하얀 공단 리본들이 늘어지고, 그 사이사이 연분홍빛 실크가 장식되겠지? 웨딩 로드의 길이로 가문의 부를 과시하니, 공작성의 정원의 시작부터 끝까지 벨벳 카펫이 깔릴지도 몰라.’

자신은 하얗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고 고귀함이 느껴지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그 길을 걸을 것이다.

‘내 곁엔 아버지게 계시겠지? 아아, 아버지는 분명 나와 함께 걸으며 눈물을 흘리실 텐데!’

딸을 시집보내는 건 너무나 슬프겠지만 괜찮을 것이다. 왜냐면 다른 누구도 아닌 제국 영웅의 아들, 카르시안 라움디셀의 부인이 되는 거니까.

‘남작가의 영애인 내가 공작 부인이 되는 거야!’

그러니 슬프면서도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로레나는 웨딩 로드 그 끝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카르시안을 상상해봤다.

‘그때쯤 공작이 되셨을 공자님은 얼마나 멋있으실까?’

시선을 확 빨아당기는 것같이 검은 머리칼은 신랑들이 으레 그러하듯 깔끔하게 뒤로 넘겨,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을 것이다.

단정하지만 짙은 눈썹 밑에선 항상 서늘하면서도 애수에 젖은 눈빛을 하고 있는 붉은 눈동자가 선명히 빛날 테고.

‘그것도 날 보면서!’

오뚝한 코는 신이 잘 벼려 낸 칼처럼 날렵한 분위기를 도드라지게 할 거고, 그 아래의 도톰한 입술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짓고 있을 터였다.

‘그 또한 날 보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기를 섭렵하다시피 배우고 있는 이니, 몸도 무척이나 탄탄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니 턱시도도 무척 잘 어울리겠지?’

보타이 대신 그의 눈동자와 맞춘 붉은 넥타이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로레나의 상상 속에서 카르시안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원래도 완벽한 분이시니까, 날 위해 치장한 모습은 더욱 훌륭하고 완벽하겠지.’

로레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카르시안이 정중하게 건네고 있는 손에 흰 실크 장갑을 낀 제 손을 얹는 상상을 했다. 손톱마저 아름다울 카르시안은 로레나의 손을 가져가며 자상하게 웃을 것이다. 어쩌면 로레나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참지 못하고 손등에 입을 맞출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아, 그러면 난 심장이 떨려서 정말 수줍은 신부처럼 사르르 웃겠지.’

자신은 또 얼마나 아리따울까. 또 얼마나 카르시안의 마음을 뺏을까. 너무도 황홀한 상상에, 로레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입꼬리를 다스릴 길이 없었다.

이러한 상상은 몇 번이고 라티아의 답신을 읽고 있는 토드엘 남작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내 딸이 공작 부인이 된다니!’

비록 한미한 자작가의 딸로 태어나 남작 부인이 되었지만, 이젠 팔자가 다 폈다.

‘난 이제 공작 부인의 어머니가 되는 거야!’

그리되면 저를 졸부라 멸시하는 귀족들에게도 한 방 크게 날려 줄 수 있다. 그들의 앞에서 보란 듯이 콧방귀를 뀌어 주는 것도 좋으리라.

‘운이 좋으면 라움디셀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이페디움 제국에선 사돈 사이가 돈독하면 두 가문이 함께 파티에 참석하거나 어머니들끼리 춤을 추는 경우도 있었다.

‘공작이 참석하는 파티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공작 부인의 어머니인 날 그냥 데리고 다니진 않을 거야. 지참금도 어마어마할 거고, 품위유지비도 어마어마하겠지?’

남작 부인은 딸이 결혼하면서 생길 부수입이 눈이 멀도록 눈부시게 느껴졌다. 그리고 벌써부터 그걸 받기라도 한 사람처럼 “약혼식엔 뭘 입지~” 하며 홍알홍알 노래까지 불렀다.?

“너무 잘됐구나, 로레나!”

“그렇죠, 어머니? 아아, 벌써 기대되어요!”

남작 부인은 로레나가 벌써 식장에 들어서기라도 한 것처럼 눈물까지 지었다. 로레나 또한 자신의 행복에 감격한 어머니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행복해야 한다, 로레나.”

“감사해요. 어머니.”

?

모녀는 한동안 서로를 꼭 안으며 다독이고, 달래 줬다.

로레나는 이제 겨우 13살이며, 아직 라티아도 만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 * *

드디어 날이 밝았다.

난 오늘을 매일 손꼽아 기다렸다. 왜냐면 토드엘 남작 영애가 주최하는 티 파티에 참석하는 날이니까!

너무 기대되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심지어 아침 해가 뜨자마자 눈도 번쩍 뜨였다. 그런데도 피곤함이라곤 조금도 없다. 첫 소풍을 나가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이번 생에선 첫 나들이가 맞고 또 난 어린아이가 맞지.

물론 ‘진짜’ 어린아이는 아니라지만, 난 들뜬 마음을 합리화하기 위해 속으로 씩씩하게 우겼다.

“수잔, 앤! 메리!”

내가 이불을 박차며 외치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만반의 준비를 마친 세 사람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오늘이야!”

“네.”

“바로 준비해 줘!”

난 당차게 말했지만, 나란히 서 있던 세 사람 중 수잔이 앞으로 슬쩍 나서며 말했다.

“그 전에…….”

“응?”

“식사부터 하고요.”

수잔이 씩 웃으며 비켜섰고, 하녀 한 명이 든든한 식사가 실린 카트를 밀고 나타났다. 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을 보다 멋쩍게 웃었다.

“그래. 밥 먹고 해도 안 늦겠지?”

“그럼요. 설령 아가씨가 식사를 하시느라 늦어도 상관없어요. 아가씨의 첫 나들이, 저희가 책임지고 시간에 맞추겠습니다.”

“맞아요. 그러니 시간 생각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식사하세요. 체해서 못 나가면 아쉽잖아요.”

내 물음에 메리와 앤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난 그들을 믿고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세 시간 후, 나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나, 어때?”

?

난 거울 앞에 서서 긴장한 표정으로 모습을 둘러봤다. 그러자 앤이 쓰러지는 연기를 하며 말했다.

“와아, 아가씨. 오늘 존X 귀여워요!”

“존X 귀엽다니. 아가씨께 무슨 말버릇이니?”

“수잔 하녀장님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난 속으로만 하고 있잖니.”

앤과 수잔이 작은 목소리로 투닥거렸다. 난 그들을 보며 풋,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모르는 사람들이 즐비한 파티에 나간다는 게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난 회귀 전에 참석했던 무도회에서 엘레네에게 속아 드레스 때문에 큰 창피를 당했다.?

그럼에도 나는 괜찮을 수 있었다. 그때의 트라우마는 황성 경매 전야 파티로 이겨냈고, 공작성엔 나를 골탕 먹인 엘레네가 없으니까.

오히려.

“아까 챙겨 둔 영상구는 어디에 있지?”

“오늘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서 외출한 공작님께서도 꼭 남겨 두라고 하셨는데!”

“아, 여기에 있어요. 아까부터 제가 녹화하고 있었답니다.”

이렇듯 지금 내 앞엔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이 있다. 덕분에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를 새는 전혀 없었다.

수잔이 포근하게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정말 잘 어울리세요.”

“맞아요. 오몽 살롱의 마담에겐 미안하지만, 허락을 받고 아가씨의 눈동자 색과 꼭 빼닮은 자수정을 추가하길 잘 했어요.”

“수잔과 앤이 열심히 수선해 준 덕분이야.”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수잔과 앤, 메리가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추가로 수선해 준 걸작이다.?

난 입고 있는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더 예쁘게 해 주다니…… 힘들었을 텐데, 정말 고마워.”

“아휴, 힘들긴요. 하마터면 체하지도 않았는데 열 손가락 다 딸 뻔했지만 아홉 손가락만 땄어요. 괜찮아요.”

“앤, 말 좀……!”

수잔이 눈을 부릅뜨자, 앤이 “내가 뭘요.” 하면서도 슬쩍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폭 내쉰 수잔이 다가와 어깨의 접힌 레이스를 펴 줬다.

“아가씨의 드레스를 수선하는 건 오랜만이라 재밌었어요. 옛날 생각도 나고요.”

난 예전에 엘레네에게서 물려 입은 드레스를 수선해서 입었다. 당연히 기장이 짧고 사이즈가 맞지 않아 불편했지만 수잔이 점점 발전하는 솜씨로 손봐줘서 괜찮았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어서 좋았지만, 때로는 수잔의 손길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저와 앤이 수선한 드레스에 맞춰, 공작님께서 직접 미용 살롱 마담을 불러 예쁘게 치장해 준 머리도 무척 잘 어울리세요.”

끊이지 않는 칭찬에 수줍어진 나머지, 화려한 드레스에 맞춰 사랑스럽게 묶은 머리칼 끝을 만지작거렸다. 내 소매에서 정성껏 세공된 값비싼 보석이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이건 시엘과 셀트론이 구해 온 보석인데, 장신구는 충분하다 말하니 유리드가 소매 단추로 세공해 줬다.

요컨대 지금 내가 갖춘 모습은 모두의 호의로 만들어진 거란 뜻이다. 그러니 난 걱정 없이 기쁜 마음으로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다.

물론 파티에서 어떠한 일이 생길까 봐 조금도 걱정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걱정은 당연히 하고 있다.

어린 영애들끼리만 모이는 티 파티라고 들었는데 내가 너무 과하게 치장한 건 아닐까, 어려서부터 ‘진짜’ 귀족 영애로 자란 이들의 대화에 내가 과연 잘 끼어들 수 있을까, 내가 ‘글라델리스 후작 영애’였기에 꺼려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진 않을까, 애초에 나에게 초대장을 보낸 게 형식상이면 어떡하지?

내 걱정은 아까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내가 우물쭈물한 기색을 보이며 드레스 자락만 만지작거리자마자.

“걱정 마세요, 아가씨. 마차에서 흐트러진 모습은 파티장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봐 드릴 테니까요.”

이렇게, 메리가 바로 내 기분을 살피며 걱정하는 구석을 콕 짚어 위로해 주니 괜찮았다. 난 메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웃었다.

“아가씨,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앤이 씩씩하게 웃으며 배웅해 줬다. 난 메리와 함께 마차에 올라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응! 다녀올게!”

들뜬 마음 탓인지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활기찼다. 맞은 편에 앉은 메리가 호호 웃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마부가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고, 수잔과 앤이 끝까지 손을 흔들어 줬다. 난 그들이 주책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가슴이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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