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그럼 우리도 들어가자. 벌써 날이 덥다.”
“아, 네.”
난 카르시안이 탄 마차가 떠난 방향을 한 번 더 보고는 클로드와 함께 성안으로 향했다.
클로드가 방까지 데려다준다고 해서, 우린 나란히 걸었다. 타박타박 걷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렸다.
“성이…… 텅 빈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곁에서 걷던 클로드가 웃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르시안은 원래도 시끄러운 아이가 아니었는데도?”
“음, 그래도요.”
클로드의 말마따나 카르시안은 걸을 때도 고양이처럼 조용히 걸었고, 그와 나의 생활 반경은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방은 반대고, 나는 서재와 도서관에 상주하는 반면 카르시안은 연무장과 자신의 방에서만 지냈으니까.
“그런데도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거 있죠.”
“흐음. 왜 그런지 알려 줄까, 라티아?”
“네?”
클로드가 멈춰 섰고, 나도 따라서 멈춰 섰다. 클로드가 내 이마를 가볍게 톡, 짚었다.
“여기에 가득 찼었기 때문이다.”
“뭐가요?”
“카르시안이 말이야.”
“카르시안이, 제 머릿속에요?”
“그래. 그만큼 네가 카르시안을 많이 생각하고, 카르시안이 네 안에 가득 찼었단 뜻이겠지. 그러니 허전한 걸 테고.”
클로드는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헝클어뜨렸다.
“으앗.”
내 고개가 푹 꺾이자, 클로드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
“편지를 보낼 때 지금의 이야기를 쓰거라. 그 녀석에겐 이보다 기운 나는 이야기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클로드는 기분 좋게 웃고는 먼저 앞서 걸었다. 난 그런 클로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머리를 정리하고 곧장 따라갔다. 늘 클로드가 내 머리를 헝클어뜨린 다음에는 카르시안이 정리를 해 줬는데, 이젠 내가 스스로 해야 한다.?
그 차이가 뭔가 서글퍼져, 클로드를 따라 걷는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 * *
같은 날 늦은 밤, 클로드는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클로드가 움직일 때마다 온더락 잔에 들어있는 얼음들이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클로드는 테라스의 난간에 대강 기대어 선 채 주황빛 액체를 연신 삼켜 댔다.
조금 뒤, 누군가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으므로, 클로드는 개의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런, 같이 하자고 들고 왔더니 이미 시작했군.”
낮고 짓궂은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헥터였다. 그는 싸구려 럼과 해풍에 말려 색이 탁한 육포를 들고 있었다.
“그것도 고상하게 비싼 양주 따위나 마시고 말이야.”
헥터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클로드의 곁으로 다가갔다. 클로드는 헥터가 난간에 종이 한 장을 깔고 육포를 와르르 쏟아 낸 후에야 그에게 시선을 건넸다.
“싸구려 럼에 육포라, 옛날 생각이 나는군.”
“뭘 그렇게 오래된 기억을 말하듯이 굴어. 고작해야 3년 전이면서.”
헥터가 낄낄 웃으며 클로드가 들고 있는 잔을 뺏어버렸다. 대신 뽁! 소리 나게 딴 럼주 병을 건넸다.
“잔에 따라 마시는 고상을 떨기는. 갑판이었다면 파도가 쳐서 진작에 다 흘러넘쳤을 거다.”
“여긴 배가 아니고 성인데.”
클로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헥터가 건넨 럼주 병목을 잡아 꿀꺽꿀꺽 마셨다. 누가 싸구려 술 아니랄까 봐 목 넘김이 칼칼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오히려 이런 칼칼함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꼭 배를 타고 있는 것마냥 마음이 술렁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기분은 좀 어때.”
“기분?”
“그래. 카르시안을 아카데미로 보내서 싱숭생숭할 거 아냐.”
헥터가 특유의 직설적인 말투로 정곡을 찔렀다. 클로드는 쓰게 웃었다.
“넌 말을 좀 아낄 필요가 있어.”
“해적에게 고상함은 사치지. 하지만 때로는 이런 직구가 사건을 해결하기도 한다고.”
헥터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클로드는 그의 말에 십분 공감하며 방금 마신 럼을 헥터에게 건넸다. 그는 바다에서 그랬듯이 입구를 닦지도 않고 벌컥벌컥 마셨다. 헥터가 육포 하나를 거칠게 물어뜯었을 때였다.
“그저 그래.”
“엉?”
“카르시안을 아카데미로 보낸 거 말이야. 그저 그렇다고.”
“흐음, 그런 거치고는 상당히 가라앉아 있는데.”
“보이기엔 그럴지 몰라도 속마음은 그저 그래. 알고 있던 일이기도 하고,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네가 반대한다면 카르시안은 아카데미로 가지 않았을 텐데? 사실 너도 카르시안을 좀 더 끼고 살고 싶었잖아.”
헥터가 육포를 질겅거리며 말했다. 클로드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 그를 따라 육포를 물어뜯었다. 씁쓸하게 웃은 클로드가 말했다.
“헥터, 자식새끼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
“흠?”
“전에 한 번 말했잖아. 내가 막 귀환했을 때, 카르시안이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카르시안이…… 아, 아아.”
곰곰이 생각해 보던 헥터가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재판에 서기 전, 너한테 와서 ‘라티아는 이제 자신의 가족을 잃어요.’라고 했던 거?”
“그래.”
클로드가 입술 사이로 가벼운 조소를 흘렸다.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클로드는 막 귀환을 하여 카르시안과 무척 애틋했다. 하지만 글라델리스 후작저를 처벌하는 게 급선무라, 감동의 재회는 잠시 뒤로 밀어뒀다. 그런데 재판장으로 향하기 직전, 카르시안이 먼저 다가왔다. 클로드는 기쁜 마음에 카르시안을 안으려고 했지만, 정작 아들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무사히 다녀오셔서 너무 다행이에요. 무척 기뻐요. 하지만 라티아는 이제 자신의 가족을 잃어요. 그런데 우리가 애틋한 모습을 보이면 라티아의 기분이 어떻겠어요.’
조금 데면데면한 척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클로드는 굉장히 서운했다.?
‘내가 바다에 왜 나갔는데, 바다에 나가서 뭘 위해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무엇 때문에 아이샤의 브로치까지 팔았는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카르시안에게 티 내지는 않았다. 카르시안을 위해 바다에 나간 것도 맞고, 고생한 것도 사실이며 아이샤의 브로치까지 팔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보상을 카르시안이 해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그런 선택 때문에 카르시안이 하지 않아도 될 고생, 학대를 받았으니 사과를 해야 옳았다.
‘전 라티아가 걱정돼요.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스스로 가족을 버리는 일이에요. 괜찮을 리가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외로운 카르시안에게 한 줄기 햇살이 되어 준 이가 바로 라티아다. 그러니 카르시안이 클로드보다 라티아를 더 우선시하는 것도 머리로는 이해가 됐다. 다만 무척이나 서운하여, 당시 클로드는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마셨고 그 곁은 헥터가 지켰다. 오늘처럼 말이다.
클로드가 잔뜩 골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 3년 전에도 막 재회한 나보다 라티아를 더 챙기더니 오늘도 내가 준 검은 마차 짐칸에 뒀으면서 라티아가 준 화관은 직접 들고 타더라.”
“푸핫, 뭐?”
늘 여유롭고 느긋해 보이는 클로드가 이렇게 투덜대는 것도 오랜만이라, 헥터는 하마터면 술을 뿜을 뻔했다.?
헥터가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술 마시는 이유가 카르시안이 아카데미에 가서 외롭기 때문이 아니라, 라티아랑 차별해서 삐졌기 때문이란 거야?”
“삐졌다니, 괘씸한 거지. 말했잖아. 기분은 그저 그렇다고.”
클로드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헥터의 손에서 술병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고개까지 뒤로 확 젖히고 벌컥벌컥 마셔 댔다. 그 모습에 헥터는 저도 모르게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헥터는 쉬지 않고 술만 들이켜는 클로드를 보다 육포를 마저 질겅거리며 말했다.
“놔둬. 네 유전자가 어디 가겠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클로드가 입술을 닦으며 되물었다. 그에 헥터가 건들거리며 말했다.
“뭐, 라움디셀 백작. 유명하던데? 소꿉친구이자 첫사랑과 결혼한 애처가라고 말이야.”
그런 클로드를 빼다 박은 이가 카르시안이니, 카르시안이라고 덜 할 리가 없었다.
“소꿉친구, 맞지. 카르시안이 열 살, 라티아가 일곱 살에 만났으니까. 첫사랑, 이것도 맞지. 그러니까 포기하란 거야. 너도 네 아버지가 제수씨와의 결혼을 반대했을 때 죽는시늉까지 했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지.”
헥터가 얄궂게 씩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라티아를 가만히 지켜보니까 말이야. 걘 다른 눈치는 엄청 빠른데 카르시안 앞에서는 맹해지더라?”
라티아부터가 카르시안에게 있어 복병이자 최대의 난관일 거라며, 헥터가 이야기를 줄줄 늘어놨다. 클로드는 카르시안에게 고백을 들어 놓고도 눈치채지 못한 라티아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본 헥터가 육포를 건네며 말했다.
“그러니까 놔두라고. 서운해하지도 말고, 질투하지도 말고. 너도 라티아를 카르시안보다 더 챙기면서, 질투는 무슨…….”
“그건…….”
?
변명하려던 클로드는 최근 자신의 행보를 돌아보고 묵묵히 육포를 받아 씹었다. 그러며 조금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아버지도 이런 기분이셨을까. 다 알면서도 서운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군.”
클로드의 아버지는 카르시안의 탄생까지 지켜보고 눈을 감았다.
“갓 태어난 카르시안을 보며 나와 쏙 빼닮았으니, 이제 내가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거라 했는데…….”
“그래. 딱 그런 기분이셨을 거다. 하늘에서 아주 고소해하고 계실걸.”
헥터의 말에 클로드는 다시 한번 럼주를 마셨다. 조금 전까지 칼칼하기만 하던 목 넘김이 이제는 세상의 그 어떤 술보다 매끄럽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술이 달군.”
오랜만에 과음을 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