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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83화 (83/186)

83화

식사를 마친 클로드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내일부턴 나와 단 둘이 식사를 하겠군.”

“네? 왜요? 카르시안이 아카데미에 가는 건 내일모레라면서요?”

“아, 내가 미처 말을 안 했군.”

내가 의아해서 물으니 클로드가 짓궂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며 무표정을 하고 있는 카르시안에게 시선을 보냈다. 마치 카르시안이 말하라는 듯 말이다.

냅킨으로 입술을 닦던 카르시안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건 내일모레지만, 내일 수도에 올라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야 해.”

“그럼 실질적으로 내일 헤어진다는 소리잖아!”

내가 놀라서 외치니, 카르시안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난 클로드를 보며 말했다.

“이걸 왜 지금 말해 주세요?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뭐. 네가 좋아하는 딸기라도 양보할 생각이냐?”

“그건!”

실제로 카르시안에게 뭐라도 더 줄걸!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마침 수잔이 디저트를 가져왔다.?

클로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식사는 제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또래보다 작아 오몽 살롱의 마담도 걱정하더구나.”

“아, 음…….”

많이 먹는 거랑 쑥쑥 자라는 건 별개긴 하지만, 어릴 때 학대를 받아 그런지 성장이 더디긴 했다.

“그럴까 봐 말하지 않은 거다. 대신 지금 말했지 않으냐.”

클로드가 내 앞에 놓인 디저트를 눈짓했다. 캐러멜 소스가 듬뿍 뿌려진 푸딩이었는데, 내 접시에만 두 덩이가 있었다. 클로드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보다. 난 클로드에게 볼을 부풀려 보이고는 한 개 반을 덜어 카르시안에게로 옮겨 줬다.

“하나만 줘도 돼.”

카르시안도 클로드의 뜻을 미리 알고 있던 건지,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싫어. 반 개 더 줄 거야. 아카데미는 황도에 있으니까 더 맛있는 걸 많이 먹을 순 있겠지만, 수잔이 만든 푸딩은 공작성에만 있으니까. 많이 먹고 가.”

“그래. 고맙다.”

카르시안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난 카르시안의 손길을 받으며 푸딩을 끼적끼적 먹었다. 하지만 역시 반개는 적어서, 내가 가장 먼저 스푼을 내려 뒀다. 클로드는 아직 먹고 있는 중이었는데, 일부러 식사 이후 카르시안이 내일 떠난다는 걸 말한 클로드가 괘씸해서 방해하자고 생각했다.

“공작님.”

먹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로 한 것이다. 클로드가 작은 스푼으로 푸딩을 뜨다 내게 시선을 보냈다.

“저 마법사 좀 불러 주시면 안 돼요?”

“마법사?”

“네. 보존 마법을 걸고 싶은 게 하나 있거든요.”

역시 내 예상대로 클로드는 내 말에 관심을 가지며 푸딩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하지만 수잔이 만든 푸딩은 굉장히 맛있으니, 이대로 못 먹게 되는 건 아깝다.

“푸딩 다 드시면 말씀드릴게요.”

“못 먹게 하려고 말 건 줄 알았는데.”

“공작님이 미운 거지, 푸딩이 미운 건 아니니까요.”

내가 새침하게 말하자 클로드가 큭큭 웃었다.

“내가 아니고 버려질 푸딩을 안쓰러워하다니, 아빠는 슬프구나. 라티아.”

장난스럽게 말한 클로드가 정말 슬프단 듯 눈썹까지 늘어뜨렸다. 예전엔 저런 표정에 몇 번 속아 넘어갔는데, 이젠 어림도 없다. 난 클로드에게 보란 듯이 흥, 하고 고개를 돌리고 카르시안을 쳐다봤다.

“아빠…….”

푸딩을 잘 먹고 있던 카르시안은 클로드가 말한 ‘아빠’라는 말이 충격적인지 몇 번 되새기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아빠를 뺏을까 봐 아주 많이 무섭나 보다.

내가 네 아빠를 뺏긴 왜 뺏어, 카르시안.

언제는 정말 어른스럽다가도 또 어떨 때는 나보다 한참 어린아이라는 티가 팍팍 났다. 나는 몇 번이나 “입양은 안 되는데…….” 하고 중얼거리는 카르시안을 바라봤다. 여기서 정정하자니 클로드가 쪼오금 신경이 쓰이기도 해서.

잠시 후, 푸딩을 전부 먹은 클로드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보존 마법을 걸 물건은 무엇이냐?”

“아, 라일락이에요.”

“라일락?”

“네. 어제 카르시안이 제 귀에 꽂아 준 건데 곧 시들 것 같아서요.”

지금은 화병에 꽂아 두고 있긴 한데 하루 지났다고 생기를 잃었다. 그래서 혹시 가능하다면 그 라일락에 보존 마법을 걸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흐음, 카르시안이 라일락을 줬다고…….”

“콜록, 콜록!”

클로드가 나른하게 웃으며 말하자 카르시안이 사레에 들렸다.

“괜찮아?”

난 얼른 카르시안에게 물을 건넸고, 그는 연신 기침하며 물을 받아갔다. 고개를 돌린 채 물을 마시고 있는 카르시안의 귓가가 조금 붉었다. 단단히 사레에 들린 모양이다.

“그것도 보라색 라일락을……. 보라색 라일락의 꽃말은 분명…….”

그러나 클로드는 카르시안이 사레에 들리거나 말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물컵 하나를 전부 비워 낸 카르시안이 잔기침을 하며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그가 테이블에 물컵을 내려 두며 말했다.

“아, 안 버렸어?”

“응?”

“라일락 말이야. 버린 줄 알았는데…….”

“왜 버려? 네가 준 건데.”

“하지만 고작 꽃 한 송이인데…….”

“고작이라니. 너한테 받은 건 다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어. 아, 과자나 캐러멜은 다 먹었지만.”

내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가까스로 얼굴색이 돌아왔던 카르시안의 낯이 불붙은 듯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직 사레가 덜 멈춘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딸꾹.”

이번엔 딸꾹질이 시작됐다. 그 모습을 본 클로드가 혀를 쯧 하고 차며 카르시안에게 물을 챙겨 줬다.

“가지가지 하는군.”

“딸꾹. ……딸꾹!”

카르시안은 멈추지 않는 딸꾹질에 제 가슴팍을 팡팡 때려 대며 클로드가 건네는 물컵을 받아들었다. 카르시안의 눈 밑이 창피함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클로드는 카르시안을 보던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마법사에게 말해 놓으마. 그 외에도 보존 마법을 걸고 싶은 게 있다면 정리해 둬.”

“네,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클로드가 됐다며 손을 내저었다. 카르시안의 딸꾹질은 우리의 식사가 전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 * *

다음 날, 난 카르시안을 배웅했다.

“물건은? 다 챙겼어? 놓고 가는 건 없고?”

클로드는 꼭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진 수도에 가서 사라고 했지만, 내 의견은 반대였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 낯선 곳에 떨어져서 모든 게 새로울 텐데, 쓰는 물건이라도 손에 익은 거여야지. 그래야 적응하기 쉽지.”

“응, 꼼꼼하게 챙겼어. 너무 걱정하지 마.”

내 말에 귀족가 자제처럼 단정하게 차려입은 카르시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적응하긴 힘들 거야.”

“응? 왜?”

설마 늦게 들어간다고 막 눈치 주고 그러나??

아카데미는 내로라하는 귀족 자제들만 들어가는 곳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따돌림을 당할지도 몰라! 아니, 그렇지만 카르시안은 제국 영웅의 아들인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걱정 때문에 떨면서 바라보자, 킥 웃은 카르시안이 내 눈가를 톡 건드렸다.

“거기엔 가장 익숙한 게 없을 테니까.”

난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는데, 그동안 카르시안의 미소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가장 익숙한 거?”

그게 뭐지?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카르시안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나 없어도 밥 잘 먹고. 너무 야채만 먹지 마. 고기도 먹어야 해. 알지?”

“응.”

“밥 못 먹으니까 간식 많이 먹지 말고.”

“응.”

“양치도 잘 하고. 어디 나갔다 오면 손 꼭 씻고.”

“아우, 잔소리.”

내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아르릉거리듯 말하자 카르시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나갈 땐 꼭 어른들이랑 같이 다녀. 유리드 대장간에 갈 때도 급하다고 혼자 다니지 말고, 앤이나 메리 손 꼭 붙잡고 다니고.”

그러면서 내 손을 슬쩍 잡아 왔다. 그리고는 제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올려 두고는 한참이나 바라봤다. 마치 내 손 크기를 잊지 않으려는 듯이 말이다.

“열네 살은 되어야 황도에 올 수 있을 텐데…….”

카르시안이 내 손을 요리조리 돌려보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오늘 가면 4년은 지나야 볼 수 있다. 난 카르시안을 달래듯 말했다.

“너도 열세 살인데 공작님이 황도에 가는 걸 허락해 줬잖아.”

“난 덩치가 크고 무기를 다룰 줄 아니까. 하지만 넌 아직도 내 손 하나를 다 못 잡잖아.”

“그건…….”

끙, 사실이라 반박을 못 하겠다. 뭐 좋은 말 없을까 생각하던 중, 마땅한 대답이 떠올랐다.

“다음에 만났을 땐 다 잡을 수 있을 거야. 손도 커져서, 깍지 끼고 오래 있어도 아프지 않을 거야. 그러면 우리, 손잡고 같이 건국제에 가자.”

황도에선 1년에 한 번씩 일주일 동안 축제가 열린다. 내가 황도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카르시안과 함께 다니면 좋을 것이다. 내 말에 카르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던 때에 클로드가 나타났다.

“카르시안, 채비를 다 했으면 슬슬 출발하도록 해라. 학장과 오후에 약속이 있잖아.”

“아, 네. 알겠습니다.”

카르시안은 클로드에게 대답하고는 내 손을 한 번 세게 잡았다. 꺅 소리가 날 정도로 억센 힘이었는데, 난 아픈 티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의 손을 꽉 잡아 줬다. 카르시안은 내 손등을 한참이나 보다가 이내 손을 놓아줬다. 그가 마차에 올라타기 전, 귀중품이 든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 가방 위에는 내가 만들어 준 화관이 있었다.

“뭐야…… 저건 왜 챙겨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르시안이 화관을 챙기는 게 좋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다녀올게.”

“응, 조심히 가.”

난 마차에 올라탄 카르시안에게 슬슬 손을 흔들었고, 카르시안도 내게 손을 흔들어 줬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지.”

클로드와 마부가 인사를 나눴고, 카르시안이 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그 자리에 선 채 카르시안이 탄 마차가 멀어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쩐지 심장의 한쪽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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