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잠시 후, 그가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
?
카르시안은 급격히 피로해진 얼굴을 몇 번이나 쓸어내리며 마른 세수를 하더니 한숨처럼 말했다.
“……그래. 공부, 같이하자.”
“응? 왜 그래? 혹시 이 소리가 아니었어?”
내가 묻자 일순간 울컥한 카르시안이 뭐라 말하려다 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그는 뭔가를 참는 것처럼 연신 심호흡만 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니, 그 소리 맞았어, 같이…… 같이 공부하자고.”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카르시안의 목소리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건가?
난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딱히 실례되는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하…….”
카르시안은 내 옆에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어쩐지 굉장히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난 그를 보다 문득 꿈속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그때 카르시안은 내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안겨 있는 게 마뜩찮아 보였지만, 내가 준 화관 때문에 화를 참았다.
화관을 주면 기분이 좀 풀릴까?
난 아까 만들어 둔 화관 중 가장 예쁜 걸 골라 가져왔다. 그리고는 눈가를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카르시안의 머리 위로 톡 올렸다.
“……?”
머리 위로 뭔가가 올라오자 놀란 카르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난 그의 앞에서 뒷짐을 지고 배시시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당장 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서. 아카데미 입학 선물.”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르시안이 손을 위로 올려 더듬더듬 화관을 매만졌다. 그것이 화관이라는 걸 깨달은 카르시안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내가 만든 것 중 가장 예쁜 거야.”
“나한테 줘도 돼? 가장 예쁜 거잖아.”
“응. 가장 예쁜 사람한테 주는 거니까 괜찮아.”
내 말에 카르시안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화다닥, 얼굴에 급히 불이 붙었다. 화관을 매만지던 카르시안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가장 예쁜 사람 나 아닌데…….”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자니, 카르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다 꽃 한 송이를 꺾어 왔다.
“난 화관 만들 줄 몰라.”
그러면서 머리카락을 넘긴 내 귓가에 손바닥에 숨겨 온 꽃을 꽂아 줬다. 킁킁, 향기를 맡아 봤지만 워낙 많은 꽃들이 피어 있어 알 수가 없었다.
카르시안은 꽃을 꽂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바람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아카데미에 다녀오면, 그때 네가 알려줘.”
“화관 만드는 법을?”
“응.”
뭘 그런 걸 다 배우나 싶었지만,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아카데미에 다녀오고 나서의 약속이 생긴 게 더 중요했으니까.
“그런데 카르시안.”
“왜?”
“아카데미에 간다고 해서 못 보는 건 아니지 않아? 내가 놀러 가면 되잖아.”
아카데미에는 방학이 없다. ‘배움에는 쉼이 없다’는 아카데미 초대 학장의 뜻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출’도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외부인도 미리 허가만 받아 두면 아카데미 안에 방문할 수도 있다.
내 말에 카르시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줄, ……거야?”
“응?”
“날 보러, 와 줄 거야?”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에 난 아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당연하지!”
“……!”
“지금은 너무 어려서 황도에 나가지 못하지만, 황도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가장 먼저 아카데미에 갈게. 널 만나러 갈게.”
내 말에 카르시안은 마치 봄바람에 눈이 녹듯이 사르르 웃었다. 늘 나를 보면 다정하게 풀어지지만 지금은 조금 더 부드럽게 휘어졌다.
“꼭 와 줘야 해. 날 보러.”
“응, 알았어. 편지도 쓸게.”
“아, 편지. 응. 나도 쓸게.”
카르시안은 장난감을 사러 가자는 아이처럼 신나서 몇 번이고 내게 확답을 받았다. 난 그럴 때마다 카르시안에게 듣고 싶은 대답을 열심히 해 줬다. 사실은 나도 그에게서 ‘내가 보러 가면 만나러 나온다’, ‘내가 편지를 쓰면 답장을 해 준다’는 말을 듣고 싶었으니까.?
“약속할까?”
“좋아.”
우린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꼭꼭 약속했다. 엉켰던 손가락이 풀어졌을 때, 수잔이 달려왔다.
“도련님!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응, 수잔.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헥터 장군이 찾으세요. 연무할 시간이라면서요.”
수잔의 말에 카르시안이 주머니에 넣어 뒀던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수잔의 말이 맞는지 카르시안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가 볼게.”
“응. 열심히 해!”
내가 응원해 주자 카르시안이 피식 웃으며 꽃이 꽂혀 있는 귓가를 툭 건드렸다.
“잘 어울리네.”
“너도 화관 잘 어울려.”
우리는 어리둥절한 수잔을 사이에 두고 키득키득 웃었다. 난 카르시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와 함께 카르시안을 배웅한 수잔이 말했다.
“그런데 웬 꽃이에요? 그것도 라일락이네요.”
“라일락?”
어쩐지 시야 사이로 자꾸 보랏빛이 비쳐 보인다 했더니, 비죽 튀어나와 있어서 그런 거였구나.
“카르시안이 꽂아 줬어.”
난 귓가를 더듬으며 멋쩍게 말했다. 그러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수잔이 이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런 거였구나.’ 하듯이 말이다.
수잔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아세요, 아가씨?”
“응?”
“라일락의 꽃말이요.”
“음…… ‘아름다운 맹세’였나?”
“그건 흰색이죠. 아가씨의 귓가에 있는 건 보라색이고요.”
수잔이 내가 아까 더듬느라 모양이 흐트러진 라일락을 재차 꽂아 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보라색 라일락의 꽃말은 ‘사랑의 싹이 트다.’”
“‘사랑의 싹이 트다’……?”
“네. 그리고 ‘첫사랑’. 기억해 두면 언젠가 도움이 될 거예요. 자, 됐어요. 도련님 말대로 잘 어울리네요.”
수잔이 치마의 주머니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 비쳐 줬다. 내 눈동자 색보다 조금 더 진한 보라색 라일락이 귓가에 펜을 꽂은 것처럼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카르시안이 내내 이 모습을 보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민망해졌다.
“음…… 근데 보통 귀에 꽂는 꽃은 좀 납작한 걸 고르지 않아? 시야에 걸려…….”
“글쎄요. 꼭 이 꽃을 주고 싶으셨나 보죠.”
내가 좀 투덜거리자 수잔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난 거울에 몇 번이나 라일락 꽃을 낀 내 귀를 비쳐 봤다. 카르시안이 꼭 이 꽃을 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단 이야기를 들은 탓일까? 조금 전까지 라일락 꽃이 비죽 튀어나와 어색하게 느껴지던 모습이 좀 마음에 들었다.
다음 날, 나는 식당으로 가는 길에서 클로드에게 카르시안이 아카데미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다음 주에, 당장이요?”
“음, 그래. 중도 입학이라 여기보단 거기에 가서 할 일이 더 많거든. 시험엔 일찌감치 합격했어도 순번 때문에 여태 밀렸던 거니까.”
“아, 네에…….”
“서운해?”
“네?”
“우리가 너한테 비밀로 하고 있어서.”
“아, 아뇨. 어제 카르시안이 이야기해 줬어요. 저 때문에 아카데미 입학을 생각한 거라고요.”
“그래. 그래서 비밀로 해 달라고 사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난 얼른 손사래를 쳤다.?
“사실 언제 허가가 날지도 모르는데, 그때까지 너희가 마음 졸이며 놀게 하고 싶진 않았어.”
“아, 네…….”
그것도 일리가 있었다. 만약 내가 카르시안이 진즉 아카데미에 간단 걸 알았더라면 이제나 갈까, 저제나 갈까 계속해서 신경 썼을 테니까.
“공작님 덕분에 3년 동안 카르시안과 재밌게 지낼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클로드가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너도 더 바빠지겠군. 카르시안과 수업 일정도 맞췄다 들었는데.”
“아, 네. 카르시안이 저와 같이 걷고 싶다고 해서요.”
“같이 걷는다고?”
난 클로드에게 어제 카르시안과 나눈 대화를 짤막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클로드의 표정은 아리송했다. 흐뭇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우스워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제가 과목을 따라가겠다고 한 거예요. 같이 걷는 거잖아요.”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클로드는 진심으로 탄식했다.
“아…….”
뭔가 엄청나게 귀한 걸 아깝게 놓친 사람처럼 멈춰 서서 한동안 넋까지 놓고 있었다. 난 그런 클로드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님?”
“아, ……음. 그래. 그래서 수업을 맞췄다고…….”
침음하듯 중얼거린 클로드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난 그런 클로드를 의아하단 듯 바라봤는데, 찹. 어깨에 앉아 있던 삐로리가 날개로 내 뒤통수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뭐야? 왜 때려?”
놀라서 돌아보자, 삐로리가 날개로 내 뒤통수를 문지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치 ‘으이구…….’ 하듯이 말이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얻어맞고 눈치 없는 아이 취급을 당해 기분이 좀 상했지만, 클로드의 착잡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진짜 뭐 잘못했나?
“당분간 아버님 소리도 물 건너갔군.”
난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한숨만 푹 내쉬는 클로드와 함께 카르시안이 있을 식당으로 향했다.